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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늘 보다 나은 내일이 온다 (사 10:2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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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보다 나은 내일이 온다-사 10:


우리가 본문을 통하여 묵상해야 할 것은 첫째 앗수르가 어떻게 강대국이 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약 200년간이나 북 이스라엘을 포함한 근동전역을 지배하던 대 제국 앗수르가 갑자기 힘을 읽고 무너져 버렸는지...

또 왜? 하나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생고생해서 일구어 낸 기름진 포도밭과 삶의 터전을 버리고 오늘 본문 29절 이하와 같이 “영을 넘어 즉‘산길’ 골짜기 길을 따라 게바 에서 유숙하며” “딸 갈림아”라고 외치며 극단적 공포와 두려움을 떨어야 했는지...

 그리고 급기야 32절“ 이 날에 그가 놉에서 쉬고 딸 시온 산 곧 예루살렘 산을 향하여 그 손을 흔들리로다”와 같이 6.25때 북괴가 쳐들어와 하루아침에 수도가 점령당하고 몇 일만에 낙동강 하류까지 피난해야 했던 우리 민족처럼 앗수르에 의해 몇 날도 못 되어 자신들의 모든 땅이 점령당하고... 이제 예루살렘이 바로 보이는 ‘놉’ 땅까지 쳐들어와 풍전등화 같은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격동 가운데서도 살아남은 자는 어떠한 이유에서인지...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1. 앗수르가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오늘 본문 1절과 2절에 보면 아이러니 하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도자를 잘못 만나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는 지도자들이 불의한 법을 공포 하였으며, 양민을 괴롭히는 법령을 제정하였고, 가난한 자들의 소송을 외면하였을 뿐만 아니라 과부들을 노략하고, 고아들에게까지 약탈을 하였으며, 가난한 자들의 권리까지 박탈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오늘 본문 6절에서 7절 중 하반 절까지에서 보듯이 범죄 한 북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려는 목적으로 앗수르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2. 앗수르가 패망한 이유

그런데도 앗수르는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체 7절 후 반절에 보면“...오직 그 마음에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려 하여 ...”와 같이 그들 앗수르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며 다른 민족들을 정복하고 괴롭히는데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8-11절 말씀을 보십시오. 
“8이르기를 나의 방백들은 다 왕이 아니냐 9갈로는 갈그미스와 같지 아니하며 하맛은 아르밧과 같지 아니하며 사마리아는 다메섹과 같지 아니하냐 10내 손이 이미 신상을 섬기는 나라에 미쳤나니 그 조각한 신상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신상보다 우승하였느니라 11내가 사마리아와 그 신상에게 행함 같이 예루살렘과 그 신상에게 행치 못하겠느냐 하도다.”

이제 앗수르가 극도로 교만해 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많은 강대국 우상을 파괴 하였으니 그들보다 더 약한 남 유다 왕국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 쯤이야 ...한 것이지요. 이는 천지의 주체이신 하나님을 열국들의 허다한 우상들과 동급으로 취급한 것입니다. 

이에 이사야는 오늘 본문 12-14절 말씀을 통해서 

“12이러므로 주 내가 나의 일을 시온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한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리라 13그의 말에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 나는 총명한 자라 열국의 경계를 옮겼고 그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또 용감한 자 같이 위에 거한 자를 낮추었으며 14나의 손으로 열국의 재물을 얻은 것은 새의 보금자리를 얻음 같고 온 세계를 얻은 것은 내어버린 알을 주움 같았으나 날개를 치거나 입을 벌리거나 지저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는도다 ,”

그래서 이사야는 “아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리라.”는 하나님 말씀을 선포 하였습니다.

이 예언대로 급기야 앗수르는 예루살렘 정복을 코 앞에 두고 내부의 혼란과 다툼으로 갑자기 멸망 당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 나는 말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한 말 말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에게도 만홀히 여김을 당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결코 용남 하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갈6:7)

그렇다면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지도자를 잘못 만나 고생 고생한 그들이 너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20절 이후 ‘남은 자’가 적었던 것을 보면 아담 이후 뿌리 깊게 내려 온 죄성이 지도자들과 손벽을 맞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남은 자들’은 여호와께서 두 이방 민족을 철저하게 징벌하시는 사건을 목격하고 또 겪을 것은 겪을 수박에 없었던 그들은 ...고난이 풀무불이 되어 우리 속에 있는 맑고 순순한 것을 들어내게 하는 것처럼 회개하고 돌아와 근본인 ‘하나님의 뜻’을 붙잡고 여호와를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그들에게 ...

23절을 같이 읽어 볼까요.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모든 것을 빼앗기고 밟히고 수모 당한 분이 있습니까? 또는 그런 고초를 지금 겪고 있습니까? 온 사방이 다 막혀 칠흙 같은 어둠이 자신 주위에만 있는 것처럼 느끼는 분이 있습니까?

그런 분이 있다면 오늘 ...아니 지금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런 힘든 사항 일수록 세상 속에서는 어리석어 보이는 ‘신앙’ ‘믿음’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손양은 목사님처럼...성프란체스코 처럼...거룩한 바보가 되어 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남은 자들에게 그루터기라 했습니다. 밑둥까지 싹둑 잘려 나가 뿌리만 남아 있는 그루터기.... 그러나 그 속에 생명이 있습니다. 봄이 되면 그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돋아나듯이 ... 달이 가려 칠흙 같은 어둠은 태양이 솟아오르기 위한 준비 단계 이듯이 .... 우리의 이 고난이 희망을 맞이하는 이 아침처럼....

이사야도 내일 상고 할 11장 6-8절로 평화의 나라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니는 세상 말입니다.”

여러분! 이 꿈이 허망해 보이십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믿음’은 바랄 수 없는 것 중에 믿는 것이고, 또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을 이루어 가는 것이며,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꿰뚫어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함께 외쳐 볼까요. “반드시/ 오늘/ 보다/ 나은/ 내일이/ 온다.”

기도 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의 꿈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도 우리 귀에 들리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꾸신 그 꿈의 성취를 위하여 움직인다고 했습니다. 반드시 우리에게 합력하여 선을 행하실 줄 믿습니다. 믿음을 주시어 꿈을 주시고 소망을 주시어 용기 있게 나가게 하시고, 비전을 주시어 이루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 삶 가운데 어둠과 두려움/ 시기와 미움/ 다툼과 괴로움은 다 물러 갈 지어다.  
늘 물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풍성하고 탐스러운 결실을 맺게 될 줄 믿습니다. 
강건하고 평강케 하실 줄 믿습니다. 

물질 가운데 넉넉함으로 나눔과 베품의 삶을 살아가게 하실 줄 믿습니다. 
명예가 회복되며 자녀의 지혜가 샘솟게 되며 그 꾼 꿈들이 다 이루어지게 하실 줄 믿습니다. 
이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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