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예수님은 누구신가? (마 16:13-17)

첨부 1


예수님은 누구신가? (마 16:13-17)


13.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2월 25일은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탄생하신 날을 기념하며 축하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부터 시작해서 12월 한 달 동안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2천 년 전에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똑바로 아는 사람은 매우 적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이 고향의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 얼마나 지혜롭고 능력이 있는지 모든 사람이 감탄하고 감격했습니다. 그렇지만 고향 사람들은 “저 사람이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동생과 누이들이 우리 가운데 살고 있지 않느냐.”라며, 그저 목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자라는 것을 보았으니까 예수님을 잘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예수님을 몰랐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했습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예수님의 친족들이 예수님에게 더러운 귀신이 붙었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잡으러 왔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수만 명이지만 그중에 예수님이 누구 신지 똑바로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시기를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시니, 그들이 대답하기를 “세례요한이라고도 하고, 엘리야라고도 하고,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도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모두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때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6)”라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아주 만족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라고 하셨습니다. 이 베드로의 대답은 그의 신앙고백입니다. 

교회는 베드로와 같이 주는 그리스도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수만 명이 모여도 베드로와 같은 이런 신앙고백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였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그만큼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사람을 가리켜서 ‘주(主)’라고 부른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브라함에게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이시니(창 23:6)」라고 했습니다. 또한,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벧전3:6)」에서처럼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에게 ‘주여’라고 하면서 순종했습니다. 

또, 야곱은 에서를 만나기 전에 사람들에게 「너희는 내 주 에서에게 이같이 말하라 주의 종 야곱이 이같이 말하기를 (창 32:4)」라고 불과 몇 십분 정도 차이 나는 쌍둥이 형에게 ‘주(主)’라고 말합니다. 민수기 11장 28절에는 「내 주 모세여」라고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무엘상 1장 26절에는 한나가 엘리 제사장에게 「한나가 이르되 내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내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에게 ‘주(主)’라고 하는 것은 힘이나 권세가 있는 사람에게 존경하는 마음으로 높여서 부르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옛날에는 주인을 부를 때, “주인어른 안 계십니까?”라고 했습니다. 주인이 나이가 어리든지 많든지 이렇게 최고의 존칭으로 불렀습니다. 종이 자기 주인에게 ‘주(主)’라고 말할 때에는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라는 고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옛날에는 종이 주인의 소유물이자 재산이었습니다. 그래서 종은 자기의 것이 없고, 목숨과 몸도 주인의 것이고 주인의 뜻대로만 살아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하나님의 종, 예수님의 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며, 소유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주인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바로 군주(왕)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라와 국토와 국민과 재산이 모두다 군주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국민들 모두가 다 군주의 종(노예)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군주의 명령이 떨어지면 모든 것을 다 내놓아야 하고, 무조건 복종해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절대적인 군주였던 것입니다. 현재 지구 상에 남아 있는 군주가 한 사람 있는데, 바로 김정일입니다. 나라의 재산은 모두 자기의 것이고, 백성들이 굶어 죽어도 상관이 없이 자기는 넓은 집에서 배부르게 삽니다. 

이렇게 군주(왕)를 가리켜 ‘주(主)’라고 할 때는 그야말로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로마 황제 가이사는 온 백성이 신과 같은 존재로 여기고 ‘주(主)’라고 불렀습니다. 네로는 백성들에게 강제로 자신을 신과 같이 여기도록 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서 헤롯왕은 얼마나 어리석은지, 아첨쟁이들의 칭찬에 교만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기가 하나님의 대접을 받으려고 하자, 벌레가 그 몸을 먹어서 죽었습니다. 그것은 교만한 자가 아무리 신과 같은 영화를 누려도, 한낱 벌레보다 못한 존재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것입니다.

로마 황제들이 기독교를 핍박한 이유 중의 하나는 황제만을 주(主)라고 해야 되는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주(主)’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가리켜 주(主)라고 말한 사람들은 죽을 각오를 하고서야 그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순교를 각오하지 않으면,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주(主)라고 고백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0장 9절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입으로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은 지금은 너무나 쉬운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죽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믿음이 필요한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고백을 하는 자들에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감옥에서도 지진이 나서 간수장이 달려왔을 때,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느냐고 하자 “주 예수를 믿으라!”고 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주(主)라고 고백한 것은 베드로처럼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으로 주(主)라고 했던 것입니다. 세상의 군주가 아니고, 그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오직 주님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주의 종으로서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는 오직 주님만 위해서 살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포기했습니다. 자신을 위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결혼할 수 있지만 결혼하지 않았고, 재산도 모을 수 있지만 모으지 않았고, 부귀영화를 포기했습니다. 사도로서 교회에서 대접받고 영광을 얻을 수 있지만 전부 내려놓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사람들이 사도 바울처럼 살라고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그렇게 살 수 있는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있느냐 하는 사랑의 문제입니다. 믿음의 사람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원해서, 기쁨으로,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하고 충성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제자들은 디베랴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찾아가셔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이 말을 주님의 음성으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도 주님이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주님이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요 21:15)」라고 대답하자 그때야 주님께서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주의 백성 양 무리를 목양하는 일을 하고, 돌보아라, 주님의 일을 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사랑을 확인하고 나서야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주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자원해서 기쁨으로 헌신하고 봉사하고 충성하면 하나님께서 감동을 받으십니다. 헌금을 해도 인색한 마음으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면 주님께서 감동을 받으십니다. 그뿐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된다면 우리 주님이 한없이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게 되었을 때 이것을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두려울 것이 없고, 죽음도 두렵지 않아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복음이 힘 있게 전파되어 오늘날 이 땅에 수십억의 기독교인이 있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사마리아에 가셨을 때, 예수님이 만나신 수가성 여인은 처음에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저 예수님을 유대인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요 4:9)」라고 말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당시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5절을 보면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 4:15)」라고 예수님에게 주(主)라고 합니다. 호칭이 달라졌습니다. 

19절에는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점점 더 깊이 알아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25~26절에서는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메시아를 만난 기쁨이 너무 커서 물동이도 버려두고 마을로 달려가서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요 4:29)」라고 외칩니다. 

그러자 수가성 사람들이 모두 달려 나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이 여인이 변화되는 과정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알게 되는 만큼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합니까? 예수님을 누구라고 전하고 증거 하시겠습니까?

도마는 요한복음 20장 28절에서 예수님의 상처를 만져 본 후에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라고 고백했습니다. 비로소 예수님이 누구신지 바로 알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다 잡아서 죽이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기독교를 핍박하는 자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평생 헌신하는 하나님의 종으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을 만나면 변화가 됩니다. 저도 주님을 만난 후에 놀라운 변화를 체험했습니다. 

저는 주님을 만난 후에 하루 24시간을 교회에서만 살고 싶고, 주의 일만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24시간 온종일 교회에서만 살고, 주의 일만 하고 싶은데 언제 그런 날을 허락하시느냐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살지 않는다면 이런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고, 차라리 저를 거두어가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내가 산다면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주님을 위해서 살지 않게 된다면 이 세상에서 밥벌이에 시달리면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난 후에는 내 남은 생애를 오직 주님의 뜻대로만 사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제가 금식기도 하다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응답을 많이 받았는데, 그때의 기도제목은 저의 소원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일이든지 하나님의 뜻대로만 사는 것이 소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말씀해주세요. 무조건 순종하겠습니다.”라는 기도였습니다. 이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셨고 그 뜻을 따라 살다 보니 얼마나 큰 축복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저는 오직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살다가 재림하시는 주님을 만나든지, 아니면 순교하게 되는 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 변화된 수가성 여인을 생각해보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그 몸의 상처를 만진 후에 변화된 도마를 생각해보십시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도 바울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평생 교회에 다니고 예배드리지만 주님을 만난 체험이 한 번도 없는 것,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사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그 사람이 목사든지 장로든지 직분은 차이가 없습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 삶의 목적과 자세, 가치관이 너무도 다릅니다. 주님을 만난 체험을 한 사람들은 자원해서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을 기쁨과 영광으로 알고, 행복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교회에 나와서 덕을 보려고 하고, 이용하려고 하니 평생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되도록이면 교회에서 어떤 일을 해도 자원해서 드리며 일하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바라고 하지 마십시오. 주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교회에서 해주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는 피아노 반주를 하면서 받는 수고비를 모두 감사헌금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나를 지금까지 키워주셨고, 이 재능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할 것이므로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쁨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감동 받으실 줄 믿습니다. 교회에서 봉사하시는 분들을 보면 주님을 만난 사람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아주 차이가 많습니다. 우리 교회 건축을 담당하시는 장로님은 월급 받는 것도 아닌데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봉사하십니다. 그러면서 헌금도 제일 많이 하십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은 다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주님을 만난 사람들로 가득 차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자원해서 기쁨으로 주를 위해서 살고 싶은 사람이 많아서 모든 일에 자원해서 봉사하고 충성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정필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