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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세대(체험세대), 다른 세대(역사세대) (삿 2: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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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세대(체험세대), 다른 세대(역사세대) (삿 2:6-15)


모세의 뒤를 이어 광야교회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상을 유산으로 남기고 싶은 불타는 그의 단심(丹心)이 그의 마지막을 더욱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여호수아의 절절한 호소는 마침내 그들로 하여금 이방신을 버리고 정녕 여호와 하나님만을 선택하여 섬길 것을 약속케 했습니다. 그리고 너희 마음을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끝나지 아니하고, 여호수아는 백성들의 약속을 하나님의 율법책에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큰 돌을 취하여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세우고 증거를 삼고 이 돌들이 너희들의 약속을 들었다고 했습니다(수 24:26~27)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설교만 한 것이 아니라 다짐을 받고 증거를 세웠습니다.
마침내 여호수아는 그의 나그네 세월 110세를 마감하고 경내에 있는 딤낫세라에 장사되었습니다. 
여호수아가 떠난 다음에 이스라엘의 그 세대, 즉 체험 세대와 다른 세대, 즉 역사 세대가 극명한 대조를 보이게 됩니다. 

Ⅰ. 그 세대 사람들은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본문 2장 10절에 『 그 세대 사람도 다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 24장 31절에 『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의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 』고 했습니다.
사사기 2장 7절에 『 백성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고 했습니다. 
이 말은 여호수아와 여호수아 당시의 장로들이 모두 죽고 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Ⅱ.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했습니다.

본문 2장 10절에 『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큰 일들을 알지 못했던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들에게 더 이상 하나님이 필요치 아니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큰 일을 체험하지 못한 역사세대는

① 우상을 숭배했습니다(삿 2:11-12). 
② 하나님이 보내신 사사의 말을 순종치 아니했습니다(삿 2:17). 
③ 열조들이 행하신 길을 속히 떠났다고 했습니다(삿 2:17). 
④ 열조와 세운 언약을 저버리고 말씀을 순종치 않았습니다(삿 2:20). 
⑤ 이방인들과 경계를 두지 않고 살았습니다(삿 3:5). 
⑥ 마침내 이방인들과의 혼인이 횡행했습니다(삿 3:6). 
이 말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경계가 무너지고 가치관이 다르지 아니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불신자들과 가치관이 비슷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타락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첫째, 그들이 참되신 하나님에 대하여 효과적인 증거와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것이 그 원인입니다. 

둘째, 부존효과(賦存效果), 소유효과(所有效果, possession)를 살리지 못했습니다. 
이른바 남의 밥에 있는 콩이 더 크게 보이고 상대적 빈곤감에 허덕이다 보니 자신이 소유하고 부존(賦存)한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다른 신을 동경하게 되고 하나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이 저들의 강력한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에 붙잡혔다고 했습니다(행 18:5).
하나님을 떠나면 반드시 속화(俗化)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을 떠날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Ⅲ. 그 세대와 다른 세대는 이스라엘의 신앙 역사를 계승해야 합니다.

여호수아 24장 32절에 『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이끌어 낸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세겜의 아비 하몰의 자손에게 금 일백 개를 주고 산 땅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고 했습니다. 
요셉이 그 자손들을 향해 자신의 해골을 메고 가라는 요구는 전통계승의 차원에서 수용해야 합니다. 전통계승은 하나님이 사람을 통하여 하십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 생전에는 이상이 없었는데 여호수아와 그 사실을 아는 장로들이 죽고 난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떠났다는 것입니다.
사사기 8장 33절에 『 기드온이 이미 죽으매 이스라엘 자손이 돌이켜 바알들을 음란하게 위하고 또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고 』라고 했습니다. 
기드온이 죽고 난 후에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했습니다. 

1) 전통계승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영력 있는 지도자의 지도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와 또 하나님의 기적적 구원을 목도한 지도자(장로)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여호와를 잘 섬겼습니다. 이 사실을 감안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지도자들의 영향력이 공동체 안에 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영향력이란 것이 인간적인 어떤 힘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영적 운동은 하나님의 섭리적 간섭이 없이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적 능력도 인간이란 매개를 통하여 실시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 여호와를 위하라, 기도온을 위하라 』고 했습니다(삿 7:18). 

로마서 10장 17절에 『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세우신 기관은 역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지도자를 모본으로 세워주셔서 그들의 신앙생활이 구체화되도록 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용기를 주기 위하여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고 헸습니다(약 5:17-18). 

목사의 눈물이 성도들의 눈물을 발생시키고, 지도자의 사랑의 수고가 지도를 받는 자들의 마음 속 깊이에 아름다운 덕행의 동기를 발생시킵니다. 이것은 오직 인간인 지도자를 통로(通路)로 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고난당하는 일도 없고 눈물도 없습니다.

2) 전통계승은 교육을 통하여 보편화할 수 있습니다.
인생은 올바른 영적 교육을 받아야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자녀들에게 엄격한 신앙교육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신 6:6-7; 시 78:5-8). 이 일에 대해서 원천적으로 지도할 곳은 교회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자기 시대만 책임진 것이 아니고 장래 세대에 대해서도 책임져야합니다.
디모데후서 2장 2절에 『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수 있으리라 』고 했습니다.
시편 78편 3-4절에 『 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3) 전통계승은 신의에 기초한 것입니다.
전통계승의 과제는 교육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역사의식은 훈련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통계승 역시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보편적인 인식작용은 가능할 수 있으나 후손에게 계승하는 데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이 모두는 하나님이 역사하는 가운데 자신의 절대 필요에 의해서 후손에게 계승되는 것입니다. 즉 역사계승의 사활의식(死活意識)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다짐을 받고, 확인하고, 기념비를 세우고 하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저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전통계승이 계승자나 피계승자나 공히 생사문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 세대는 체험세대입니다. 다른 세대는 역사세대입니다.
다시 말하면 체험세대가 다시 체험세대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것은 체험세대의 성공적 삶, 곧 자신의 정체성을 견지하는 데 있습니다. 
체험세대가 역사세대에게 정체성에 기초한 성공적 능력을 보여주어야 역사세대가 그것을 보고 체험세대와 계연성을 가지고 그 체험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딤전 4:15). 
체험세대는 곧 본질에 기초한 성공세대로 집약되어야 역사 세대에게 그 화려한 전통이 계승되는 것입니다.
성급한 결론을 내리면, 역사는 체험을 먹고 전통을 생산합니다.
역사는 전통을 생산할 때 그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역사의식이 있어야 역사주권에 대한 필요의식이 생깁니다. 

그것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 사활적 필요(死活的 必要)에 의해서 되는 것입니다.
전통계승은 새로운 창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의 복고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성된 계시 곧 성경을 통하여 모든 규례와 법규를 다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상대적 빈곤감, 상대적 열등감이 교회 안에 파고 들어오므로 많은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개혁주의 과제입니다.
잃어버린 본래의 것을 다시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32장 7절에 『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 』라고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의 속성은 피부적입니다. 그래서 『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 』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절대역사관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한 절대역사관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상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두 가지를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계에 복고주의, 상대주의, 상황주의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역사적으로 옳고 그른 것의 판단이 흐려지는 일종의 몰가치적 현상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옛것이면 모두 좋다는 복고주의, 역사적 사실을 두고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상대주의, 그 상황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상황윤리주의에 빠지면 역사의 실패는 되풀이됩니다.

그래서 역사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벼슬이나 출세나 성공은 역사주권의 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확장보다 더 중요한 것, 부흥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정체성 확립입니다.
왜냐하면 정체성을 'ID'라고 하는데 ID는 '또 다른 나'입니다. 나는 가도 또 다른 나, 곧 정체성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가도, 여호수아는 가도, 손양원, 주기철 목사는 가도 그들의 정신은 지금도 말하고 있습니다.

본래보다 더 본래 같은 가짜가 판을 치고 있는 세상입니다.
체험세대는 그 체험의 놀라운 능력의 시너지 효과(synergy effect-상승효과(相乘效果)-하나의 기능이 다중(多重)으로 이용될 때 생성 되는 효과)를 역사세대에게 실물 교훈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른 바 체험세대는 역사세대의 '등교육'이 되어야 합니다.
루터파의 크라우세 회장은 루터의 이신득구(以信得救)가 오류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역사세대의 패륜(悖倫)입니다.
고신측의 젊은 교수들과 몇몇 지도자들이 '한상동 목사를 재평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역사세대의 패륜(悖倫)입니다.
합신측의 부분적이긴 하나, 젊은 교수들이 박윤선 박사의 사상에 동조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역사세대의 패륜(悖倫)입니다.
합동측의 사람들이 전부는 아니지만, 박형룡 박사의 사상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역사세대의 패륜(悖倫)입니다.
자신들의 정체성이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붕괴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세대는 불가분 체험세대의 에너지를 빨아먹고 삽니다.
먹을 것이 없으면 떠나는 것입니다.

체험세대는 역사세대가 먹을 것이 있도록 해야 합니다.
먹을 것이 바로 우리가 가진 개혁주의 신학의 원리와 우리가 가진 신앙의 전통입니다. 이것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 외에 다른 것을 가지고도 살 수 있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교회는 우리가 주장하는 개혁주의 신학의 원리와 신앙의 전통이 아니면 우리교회에서 살 수 없도록 해야 됩니다.
역사계승은 절대절명의 사명의식에서 잉태되고, 이것이 죽음을 불사하는 사활의식(死活意識)으로 행동화될 때 역사 계승은 비로소 순교적 삶을 통하여 그 찬란한 모습으로 탄생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19~20절 말씀에 『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하니 』라고 하였습니다.
교사 강습회 때 교사 교육은 교육자나 피교육자가 진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유는 교회에 가서 다시 가르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병행해서 우리도 후세를 위하여 역사계승의 사활으식을 가져야 합니다. 

체험세대가 죽으면 역사세대가 그 뒤를 이어받기 힘듭니다. 
슬로베니아 국가대표 축구선수 연습장에 걸려 있는 표어에는
『크기로 판단하지 말라 내용으로 보여주라. 연습장으로 우수한 축구 신동을 보내 주지 않는 자들에게 우리는 경기장에서 그들의 응원을 사양한다 』 는 말이 적혀 있습니다. 이 말은 전도하지 않는 성도는 교회 공동체가 그 어떤 경우에도 환영하지 않는다는 말로 병행해서 수용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게팔로스와의 대화에서 "정의란 남에게 진 빚을 갚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모에게 진 빚을 갚는 것이 효도입니다.
국가에게 진 빚을 갚는 것이 충성입니다.
주의 사랑에 진 빚을 갚는 것이 순교입니다.
학교에게 진 빚을 갚는 것이 모교를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스승에게 진 빚을 갚는 것이 학문계승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롬 1:14).
교회운동은 어떤 사람의 주장이나 고집이나 야망이나 집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객관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그 일차적 이유가 바로 하나님 자신의 말씀 때문이요,
그리고 그 말씀을 현장화시켜야 되는 사명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의 행보(行步)는 
신의(信義)에 기초한 거룩한 영광의 길이요, 
각인의 인생에 지는 노을 황혼에도 궁극적 승리가 보장된 왕도(王道)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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