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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겨울 전에 어서 오라 (딤후 4: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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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전에 어서 오라 (딤후 4:19-22)


브라질에서 이민 목회를 하는 어느 목사님이 조국의 가을을 그리워하며 쓴 수필의 한 토막입니다. 

“한국의 가을이 그립다. 그것도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서있는 감나무가 있는 시골의 가을이, 그리하여 그 감은 무르익어 가고 앙상한 가지에 까치 밥 몇 개가 남겨진 채 저만치 사라져가는 계절을 향해 마지막 손짓하듯 초겨울을 맞이하는 감나무가 있는 우리네 가을 풍경이 그립게 떠오른다. 이때쯤이면 나는 으레 코스모스 가득한 간이역의 작은 마을이나 가을 하늘 끝없이 펼쳐지는 저녁 노을을 맞이하는 이름 없는 나그네 되어 홀로 떠나고 싶어진다. 아쉬움은 연민과 사랑으로 물들여진 낙엽으로 남겨져 책갈피에 가득 채워지고 가을은 깊어  어느 날 겨울을 예감케 하는 바람이 불어 창문을 흔들어 대면 ‘밤중에 일어나 책을 읽고 긴 사연의 편지를 쓰고 그리고 가랑잎이 날리는 가로수가로 불안스레 서성거립니다’ 라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구대로 순수한 고뇌로 가득했던 내 젊은 날의 가을이 또한 그리워진다.” - 이제 가을도 다 지나가 아침, 저녁으로 더욱 쌀쌀해졌습니다. 낙엽도 떨어져 뒹굴고 있습니다. 이제 ‘곧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며 심리학자인 폴 뜨루니에(Paul Tournier)가 쓴 『인생의 4계절』이란 책이 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자연의 4계절이 있듯이 인생도 4계절로 나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연의 4계절과 인생의 4계절이 구분되는 점을 두 가지로 말했습니다.  

인생의 4계절은 한 번 지나가면 다시 올 수 없다는 것과 그리고 인생의 4계절은 꼭 차례대로 오는 것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의 봄을 맞이했는데 여름, 가을을 무시한 채 겨울을 만나서 세상을 떠나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계절이 있습니다. 봄은 유년기, 소년기, 청소년기, 여름은 청년기, 청장년기, 가을은 장년기, 겨울은 노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시간이 흐르면서 겨울이라는 절기(인생의 계절)를 맞게 됩니다. 

요즘에는 사건과 사고도 많아 우리는 언제, 어느 때 이 세상을 떠날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다 겨울이라는 인생의 계절을 맞고, 또 인생의 종말을 맞습니다. 누군가 이야기하기를 ‘시간은 금이다’ 라고 했는데, 나는 ‘시간은 생명이다’ 라고 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이 인생의 계절들은 바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시간에 겨울이라는 계절의 문턱에서, 겨울이 오기 전에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겨울 전에 어서 오라’는 말씀을 한 내용으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이 누구입니까? 젊은 시절 유대교를 광신했던 율법사였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기독교 신앙을 박멸하는데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초대교회 열심 있는 사역자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데 한 몫을 한 사람입니다. 교회가 다메섹까지 퍼져 나갔을 때 그곳의 교회를 없애는데 앞장을 선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예상치 않았던 사건이 일어납니다. 자기가 그렇게 박해하던 예수 그리스도를 직면하게 됩니다. 그 순간 바울은 눈이 멀고 자기의 삶을, 바로 자기가 박해하던 그리스도를 위해 바치도록 도전을 받게 됩니다. 

사흘이나 다메섹에 머무는 동안 아나니아 라는 사람이 와서 예수를 믿는 신자가 되라고 권유합니다. 이 권유를 받아들여 예수를 믿고 따르겠다고 결심하던 그 순간, 바울은 사랑과 봉사와 선교의 사도로서 그의 온 생애를 바치게 됩니다. 바울은 그의 생애동안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에게 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던 사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어떠한 시험과 고통도 견디어 냈습니다. 때로는 돌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깁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사랑에 감격하여 자기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섬겼으며, 그리스도안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가는 곳마다 전파했습니다. 

그렇게 얄밉게 굴던 초대 교회의 적이요, 원수였던 바울이 성경의 ‘사랑장’ 이라고 부르는 고린도전서 13장을 쓴 사랑의 사도가 됩니다. 

(오늘 본문 디모데후서 4장) - 그런데 이런 사도 바울도 로마 감옥에 갇혀 마지막 날들을 보내면서 마지막 편지를 쓰게 될 때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고독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마지막 재판결과가 사형선고로 떨어지자 바울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은 제 고향으로 뿔뿔이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10절)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그래서 바울만이 낯선 타향의 감옥에서 쓸쓸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마지막 순간에도 바울이 잊을 수 없는 친구로는 3사람을 꼽습니다. 첫째 친구는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요, 둘째 친구는 바울의 전도여행을 늘 수반했고, 그의 약한 건강을 항상 돌보아 주던 누가라는 의사(11절), 셋째 친구는 디모데였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항상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고 까지 불렀습니다.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돌매를 맞고 시궁창에 버림을 받았을 때 그를 구출해 준 사람이 디모데였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바울을 찾아 상처를 싸매 주고, 먹을 것을 갖다주고, 집에 모셔다가 그의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 돌봐 준 사람이 곧 디모데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점에, 수 천 리 타향 로마의 감옥에서 마지막 처형을 기다리는 순간 세 친구 중, 디모데만 자기 옆에 있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디모데에게 두 번째이자 마지막인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의 사연인즉, 디모데에게 로마로 속히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오래 살 것 같지 못한 예감이 들었던 것입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바울,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야, 빨리 와라, 겨울이 오기 전에 어서 오라’,

(13절) 오는 길에 드로아 가보의 집에 맡겨 두었던 겉옷을 가져오라고 부탁한 것으로 봐서 로마에도 벌써 아침, 저녁으로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여 겉옷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또 디모데에게 책과 특히 가죽에 쓴 두루마리를 가져오라고 한 것으로 봐서 죽기 전에 디모데와 함께 꼭 할 말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바울이 원했던 것은 디모데 자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편지의 마지막 장에 (9절)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21절)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고 간곡히 부탁을 한 것입니다. 

왜 “겨울 전에” 오라고 했을까요? 추워지니까 겉옷 생각이 나서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자기가 처형당할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되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당시 겨울이 되면 지중해의 항해 사정이 어려웠습니다.  그 전 해 겨울에도 이 지중해에서 바울이 풍랑을 만나 고생을 했습니다. 지중해는 10월이 지나면 작은 배의 항해는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만일 디모데가 겨울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면 그 이듬해 봄까지는 로마에 가는 배도 없고, 바울 자신이 이듬해 봄까지 살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던 것이기에 바울은 “겨울 전에 어서 오라”고 편지를 한 것입니다. 지금 오지 않으면 나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옥중에서 이런 편지를 써 보낸 것입니다. 

디모데가 이 편지를 받고 어떻게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추측과 상상을 해 보면, 디모데가 이 편지를 받고 하루도 지체하지 않고 드로아로 가서 바울의 책과 겉옷을 찾아 가지고 로마를 향해 곧장 떠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바울이 갇혀있는 감옥으로 달려가 그를 기쁨으로 만났고, 바울과 더불어 책도 읽고 마지막 편지도 썼을 것입니다. 바울의 그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불굴의 신앙을 배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는 바울과 함께 그의 사형장에까지 가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 버리는 장엄한 순간까지도 목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디모데가 겨울 전에 왔으니까 가능했지 조금만 늦었더라도 바울을 볼 수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겨울 전에 준비할 것이 있습니다. 김장도 해야 하고, 추위를 잘 이길 수 있는 두툼한 옷도 꺼내어 준비하고, 집의 난방도 점검, 수리를 해야 하고, 운전을 하는 사람은 부동액도 갈고, 타이어도 점검하고, 체인도 준비해야 .... - 겨울 전에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도 준비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비추어 우리들이 생각할 것은 우리들에게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영영 할 기회가 없는 일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생 동안 단 한 번밖에 없는 기회, 지금 놓치면 다시는 붙잡을 수 없는 기회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 중에도 봄이 오기 전에 세상을 달리할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부모님, 친구나 존경하는 은사일 수도 있습니다) 

겨울이 오고 또 지나면 봄이 옵니다. 그 다음에는 여름이 오고.. 그 계절의 변화는 늘 있는 것이지만 그 계절이 오고 감에 따라 우리의 기회도 오고 갑니다. 지금의 계절이야말로 우리의 인생을 비유합니다. 아름답던 단풍도 벌써 떨어져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번 주에 좋은 일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기회를 놓치면 그 기회는 영영 돌아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매일의 생활에도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이 소리는 어떤 소리일까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1. 사람다운 사람이 되라는 소리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양심에서 들려오는 소리입니다.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① 어떤 사람들은 흔히 “내일부터는 내가 새 사람이 되어 보겠다. 오늘밤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재미를 보고 내일부터는 새 사람이 되어야지” 하고 말합니다.  

② 이와 반대로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오늘 최선을 다해서 살아 보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① 내일을 위해서는 그럴 듯한 약속을 하지만 오늘은 되는 대로 살려고 합니다. 
② 내일을 위해서는 아무 약속을 못해도 오늘을 바로 살아가는 데서 내일의 인간이 형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순간에 결단해야 할 것은, 이 두 종류의 인간 가운데서 어떤 인간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이 순간 나의 사람됨이 곧 내일의 나의 인간됨을 결정해 줍니다.  인생에 있어서 모든 순간이 다 중요하지만 그래도 가장 귀중한 순간은 지금입니다. 내일이 아니고 오늘입니다. 내일은 반드시 내가 오늘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2. 사랑과 우정의 소리입니다. 

만약 디모데가 마지막 편지를 받고 로마에 가보기는 해야겠으나 에베소에 볼 일이 있어 그곳에 먼저 가서 거기서 볼 일을 보고, 골로새 교회에 들려 그곳 교회를 살펴보고, 그리고 나서 드로아에 들려 로마로 가려고 했다가 부두에서 로마로 가는 배편을 놓쳤다면 그는 겨울 내내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는 사도 바울을 생각하며 안타까워했을 것입니다. 

봄이 오자마자 로마로 가봤자 디모데를 기다렸던 바울을 못 만났다면 디모데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깊이 후회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사랑과 우정을 갈구하는 우리의 친구와 이웃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도 겨울이 오기 전에 와 달라고 울부짖을 지도 모릅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입니다. 

예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림 성화 가운데 문밖에서 노크하시는 예수님의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에는 문이 단단히 닫혀 있고, 또 문 밖에는 문고리가 없어서 문을 열 수도 없습니다. 그 문은 안에서 누군가가 열어 주어야 하는 문입니다. 주님은 자기의 길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길은 사랑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노크만 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그 문을 열면 주님께서 오셔서 좌정하시고 우리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 자기를 따르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는 그저 내일, 내일 하다가 예수님이 노크하는 소리가 사라지든가 아니면 우리에게 내일이 없는 때까지도 내일, 내일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디모데에게도 그랬고, 우리에게도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인간다운 인간이 되라는 요청, 사랑과 우정의 부름, 심지어는 예수님의 부르심까지도 내일, 내일하고 미뤄둘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것을 호소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 부름에 지금 응하라고 하십니다. 

20세기 초 필라델피아의 큰 교회에서 목회를 하셨던 클라이런스 맥카트니라는 1915년에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설교를 하셨는데, 얼마나 설교를 은혜스럽게 잘 했는지 교인들이 ‘목사님, 그 설교 다시 해주십시오’ 부탁해서 또 했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못 들은 교인들이 있어서 또 해 달라고 부탁해서 이 본문으로 40년을 매년 가을과 겨울 사이에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이 일화는 많이 알려져서 한신대의 박근원 박사님을 비롯해서 한국 교회의 목사님들 중에서도 이 본문으로 매년 같은 설교를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미국에서 어느 해 필라델피아 의과대학 학생이 매카트니의 이 설교를 듣고 깨달은 바가 있어서 기숙사로 달려가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제가 공부한다고 여태 편지도 못 드려 죄송합니다. 저는 어머니가 제 공부를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시고 날마다 저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저만을 소망으로 살고 계신 것을 잘 압니다. 제가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의사가 되어서 어머니 슬하에 돌아가 효도하며 살겠습니다.’ 하고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를 보낸 지 한달 후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전보가 왔습니다. 그래서 기차를 타고 며칠을 걸려 고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이미 어머니는 돌아가신 후였습니다.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누워 계신 베개 밑에 얼마 전 자신이 보낸 편지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보낸 편지를 끝까지 읽으며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것을 보며 아들은 ‘그나마 편지마저 안 보내 드렸다면 얼마나 큰 불효를 범할 뻔했는가… ’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돌아가서 목사님께 감사인사를 드렸답니다. 

여러분, 올해도 어김없이 겨울이 다가왔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언젠가 겨울이 올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이 바로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시간입니다. 2010년 겨울의 문턱에서, 인생의 겨울을 맞이하는 사도 바울을 통해 말씀하시는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는 부르심에 너무 늦도록 기다리지 말고, 바로 응답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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