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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찾아 오시는 예수님 (계 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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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오늘은 대강절 셋째 주일입니다. 6일 후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을 맞이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지금도 우리 안에 찾아오시는 주님을 모시는 우리의 자세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본문 계시록 3장 20절은 영국 화가 홀맨 헌트(William Holman Hunt)가 그린 유명한 작품인 ‘세상의 빛’에 영감을 준 말씀입니다. 이 그림에는 육중한 돌집의 무겁게 닫혀 있는 대문 앞에 예수께서 등불을 들고 서 계십니다. 자세히 보면 안에서 문을 열어주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손잡이가 없는 문입니다. 그 문 위에는 거미줄이 많이 엉켜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문 앞에 오랜 시간동안 서 계셨다는 사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마에는 가시관을 쓰시고 한 손에는 등을 가지시고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이 헌터의 그림은 너무나 유명하게 되어 하나는 성 바울 교회당에, 또 하나는 옥스퍼드 대학에 바쳐져 국보급으로 보관되고 있습니다.  

  본문의 라오디게아 교회는 계시록 2, 3장에 나오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마지막으로 언급된 교회입니다. 교회사 2천년을 일곱 시대로 나눈다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현대교회 즉 마지막 종말 시대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한마디로 말해 자기 자신을 생각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고 자긍(自矜)하며 살고 있지만, 예수께서는 “너는 곤고한 자요 가련하고 가난한 자요 눈 멀고 벌거벗은 자” 라고 책망하십니다.
  다시말해 종말의 교회는 눈으로 보기에는 부유하게 보이지만 영적 상태는 대단히 가난하고 눈멀고 궁핍한 가운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교회를 향하여 예수님이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를 찾아오셔서 마음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님에 대하여 좀더 깊이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문 밖에 서 계신 주님 (= 주님의 완전한 준비)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본절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찾아오신 예수님이 문밖에 서 계신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찾아오신 것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본절부터 22절까지는 라오디게아 교회 사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마치면서 모든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약속과 성령의 말씀의 청종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감탄사 ‘볼지어다(이두)’ 로 시작하여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내는 일곱 편지 전체의 대미(大尾)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문 밖에 서서 두드리는 모습을 회화적(繪畵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문’은 자신들의 영적 비참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또는 교회의 ‘마음 문’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절의 ‘서서(헤스테카)’ 는 현재완료형으로 예수님이 문 앞에 당도해 서 계신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예수께서 회개하지 않는 교회와 사람들의 ‘마음 문’ 앞에 ‘벌써 와 있다’ 는 의미로서, 회개하는 자에게는 축복의 뉘앙스를,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뉘앙스를 함축합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진술은 예수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이 문 밖에 서 계신다는 것은 주님께서 모든 준비를 끝내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한 모든 준비를 이미 완료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예수께서 천국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준비 완료된 상황을 언급하십니다.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4절).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해 준비하신 모든 준비가 완료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신혼 부부가 아이를 갖게 되면 얼마나 분주합니까! 어떤 가정은 아이가 태어나기 한참 전부터 아기 신발과 옷들, 모자와 요람과 장난감, 심지어 애기 상비약과 이유식까지 갖추어 놓고 기다립니다. 태어날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지만 부모는 사전에 모든 것을 갖추어두고 아기 태어날 날만 기다립니다.
  우리가 주위의 우주 만물을 관찰해 보거나 교회의 역사를 살펴볼 때, 그리고 우리 개개인의 과거를 고요히 반성해보면 하나님의 준비가 완료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모든 것을 갖추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내용을 완전히 알지는 못합니다.

  영국의 대과학자 뉴턴(Isaac Newton)은 인류 역사에 엄청난 업적을 남긴 물리학자요 수학자입니다. 그는 빛의 스펙트럼, 만유인력의 법칙, 미적분법, 그리고 3가지의 새로운 운동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나이 81세에 세상을 떠나면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마치 나는 해변 가에 서 있는 소년과 같습니다. 내 일생에 이룩한 모든 과학적인 업적이라는 것은 소년이 두 세 개의 조개껍질을 주워서 즐기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넓은 바다 속에는 무엇이 있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치셨습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동안 주님은 우리 구원을 위한 준비를 완료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이번 성탄절기는 우리의 마음 속에 주님을 모실 수 있는 거룩한 때가 되기를 바랍니다. 

2.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주님 (= 주님의 부르심, 영원한 현재형)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라오디게아 교회를 찾아오신 주님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여기 ‘두드리노니(크루오)’ 는 현재형으로서, 한 번 두드리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두드리는 것을 나타냅니다. 완벽한 준비를 이미 갖추신 주님이 이제 계속적으로 두드리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영원한 현재형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여전히 회개하지 않는 교회와 사람들에 대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예수님의 사랑하심’ 을 암시합니다(19절). 이처럼 본문은 끝까지 범죄한 교회와 인생들을 구원하시려는 예수님의 영원한 사랑과 인내를 회화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생동감 있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은 지금 계속하여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주님은 영원한 현재의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과거나 미래의 하나님이 아니라 현재의 모든 세계에서 모든 자의 마음속에 계속해서 역사하십니다.

  마 7:7절에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모두 현재형입니다. 계속해서 구하라, 계속해서 찾으라,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도 계속적이고,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도 계속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또한 그 역사함에 있어 현재형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거룩한 계시의 말씀입니다. 성경에 우리의 진리가 있고 우리의 교리가 있고 우리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나 교리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성경 말씀은 살아서 우리에게 두드리고 있는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성도 여러분! 주님의 부르심은 영원한 현재형입니다. 성경은 지금도 성도의 마음을 두드리는 말씀입니다. 성경만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예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여기 모여서 함께 신앙 고백을 올리고 함께 찬송하고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받습니다. 함께 기도하고 함께 봉헌도 하며 한 시간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한 시간의 형식으로 끝날 수는 없습니다. 이 의식(儀式) 속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신다는 현재형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찬송부르는 가운데 혹은 기도하는 가운데 혹은 설교 말씀을 듣는 가운데서 우리의 마음속에 현재적으로 역사하시고 두드리고 계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우리의 일터에서, 혹은 가정에서, 혹은 꿈속에서라도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언제나 현재적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직 회심하기 전 사울이었을 때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그는 해보다 더 밝은 빛을 받고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때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말씀은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였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한참 지난 과거이었는데, 그 예수님이 지금 살아서 현재 자기 머리 위에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에 사울은 깜짝 놀랬습니다. 그는 완전히 그리스도에게 정복당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생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신앙은 현재형의 신앙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네로 황제의 박해가 무서워 로마를 등지고 도망가다가 하늘에 있는 예수님의 형상을 보았습니다.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가시는 예수님의 거룩한 모습을 보고 베드로는 발걸음을 멈추고 묻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쿼바디스 도미네)”
  “나는 패역한 로마의 사람들을 위해 두 번째 못박히러 간다. 그런데 너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느냐?”
  베드로는 깜짝 놀랐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몇 십년 전의 과거의 사실인데 지금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니, 이게 웬 말입니까? 
  “주여 그러실 것 없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가겠습니다.” 베드로는 발걸음을 돌이켜 다시 로마로 돌아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장렬히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현재적인 주님의 부르심 앞에 온전히 순종하는 성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교제를 약속하신 주님 (= 주님과의 참된 코이노니아)
  20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본절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여는 자에게 들어가서 식탁의 교제를 가지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문을 여는 자에게 주님과의 참된 코이노니아를 약속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의 최종 목적은 우리와의 코이노니아에 있습니다. 


  본절에서 ‘음성(포네스)’은 인격적인 말씀을 의미합니다. 범죄한 교회와 ‘보편적인 인간(티스)’ 곧 ‘죄인들’ 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노크와 인격적인 말씀은 그들이 그것을 듣고 문을 열기를 촉구하는 간곡한 사랑의 심정을 잘 보여줍니다. 

  한편 ‘문을 열면’에서 ‘열다’ 라는 의미로 번역된 동사(아노익세)는 부정과거 가정법으로 사용되어 ‘한 번만 문을 열기만 하면’ 이라는 뉘앙스를 전달합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 교회와 죄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애타는 심정을 나타내는 동시에 예수님께서 강압적인 방식으로 마음의 문을 여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문은 교회나 죄인들 편에서 열어야만 열리는 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본절은 자신의 인격적 결정으로 마음의 문을 연 교회와 죄인들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그런데 고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함께(메트) 음식을 나눈다’ 는 것은 ‘화해와 신뢰와 친밀감’ 의 표시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공생애시 바로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세리와 죄인들, 그리고 심지어 창녀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고, 이러한 파격적 행동을 보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 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본절의 ‘더불어 먹는다’ 는 표현도 그리스도와 더불어 긴밀한 영적 교제를 나누는 것을 뜻합니다.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 말씀은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자녀는 부모의 혜택으로 필요한 모든 것을 부모로부터 공급받아 살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녀는 부모와 더불어 먹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부모가 손해만 보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부모도 자녀와 더불어 먹고 있습니다. 자녀로부터 정신적인 위안과 기쁨을 받고 있습니다. 주님과 성도와의 관계가 이러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육신의 평안, 영혼의 구원, 풍성한 삶을 위해 하나님의 은총이 절대 필요합니다. 
  동시에 하나님도 우리가 필요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영광 때문입니다. 자연 만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지만 그것은 생각이 없는 ‘보통 영광’ 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생각이 있는 ‘고등 영광’ 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이것이 필요합니다.

  자연 만물을 보십시오. 피차간에 도움을 주고 받는 모습이 아름답지 않습니까? 동물은 산소가 필요합니다. 산소를 마시고 이산화탄소를 내어놓습니다. 식물은 그 반대로 이산화탄소를 먹고 산소를 내어놓습니다. 동물과 식물은 이처럼 서로 주고받으면서 공생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 거룩한 식탁의 교제가 하나님 나라의 영상입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초청에 문을 여는 자는 주님과의 참된 코이노니아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한편 이러한 식사에 대한 이해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가지셨던 성만찬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주님의 최후의 만찬이 모태가 된 성만찬은 그 자체로 단순히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회상에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진 현재적 화해와 축복과도 관련되며, 나아가 예수님의 재림으로 도래할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혼인 잔치와도 관련됩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이라고 하셨습니다. 문은 성도들의 마음의 문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이 주님을 향한 마음 문이 닫혀 있음을 의미합니다.
  왜 닫혀 있는 것일까요?  주님은 왜 라오디게아 성도들에게 다가가서 교제를 나누지 못하고 마음 문 밖에 서 계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주님께 신실하거나 충성되지 않은 것은 둘째치고 너무도 미지근하였기 때문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성도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주님께 대하여 신실하고 충성되어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 교제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마음 문을 열라고 요구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에 비해 라오디게아 성도들은 영적으로 침체되어 있어 주님과의 영적 교류의 열정조차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무지하고 불쌍한 자기 백성들에게 친히 찾아오셔서 마음 문을 두드리는 수고를 하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탄절기입니다.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위대한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주님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자신의 물과 피를 쏟아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대속의 사역을 완수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지금도 자기 백성을 찾아오십니다. 이 시간 우리 마음 가운데 주님이 계신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을 향한 마음 문이 열려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정직하게 자기 진단을 해 봅시다. 나는 주님의 말씀에 무관심한 것은 아닌가? 나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일에 민첩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형제 사랑을 나누기 보다는 이기적인 자기 사랑으로 가득한 것은 아닌가?

  만일 여러분의 상태가 이러하다면 여러분의 마음 문은 닫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망하기에는 이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우리 마음 문을 두드리시기 때문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이 주님의 거룩한 모습을 바라보고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주님의 음성이 들리십니까? 이 음성을 듣는 것이 주님과의 진정한 교제의 시작입니다.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주님과 온전한 교제를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 거룩한 신앙의 교환, 이 거룩한 신앙의 교제가 우리 신앙의 요소가 되기를 바랍니다. 크리스마스에 하나님 나라의 큰 축복이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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