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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임마누엘 예수님이 탄생하셨다 (마 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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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임마누엘 예수님이 탄생하셨다  
본  문  :  마태복음1:18-25


대림절(Advent)이란 도착(Arrive)을 뜻합니다.  외국에서 귀한 손님이 오기로 되어 있으면 인천서울국제공항에 나가서 영접하는 것처럼, 또 지방에서 귀한 친구가 찾아오면 서울역에 나가서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를 구원하러 찾아오시는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절기가 대림절기입니다.  

우리는 대림절을 잘 지키면서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이미 2천 년 전에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낮고 천한 자리에 강림하신 주님을 감사하며, 지금도 우리의 마음 중심에 찾아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며, 우리의 어려운 삶의 현장에 깊숙이 찾아오시는 주님과 함께 살아가야겠습니다.  

대림절은 “겨울의 사순절”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수난 받으신 주님, 나의 주님이시며 나를 구원하여 주시는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안에 임재하시고 계시는 주님, 언제나 함께 역사하시고 동행하시는 주님을 기뻐하면서, 다시 오시는 주님을 위하여 헌신 봉사하여야겠습니다.  이제 다시 오시는 주님 앞에 서야하는 성도로서 깨어 기도하며 어두움의 일을 벗어버리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살아가야겠습니다.   

본문에는 의로운 요셉이 있습니다. 본문을 읽어보면 아내의 문제로 고민하며 갈등하는 요셉을 보게 되며, 성령의 가르침에 순종하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고 갈등과 모순을 치유하는 요셉을 보게 됩니다.  

한 청년이 한 처녀를 연모하면서 그를 사랑하고, 그와 부푼 꿈을 나누며, 그와 일생을 함께 하리라고 다짐하면서 결혼하여 한 가정을 가지게 됩니다.  유대인의 결혼은 부모님이 정해주는 언약의 단계가 있고, 그 후에 두 사람이 장성하여 약혼하는데, 약혼하면 결혼이나 다름이 없는 법적인 권리와 의무를 가지게 됩니다.  약혼하면 그 때부터 결혼에 준하는 법적인 구속력을 지니게 됩니다.   오늘의 약혼보다 훨씬 더 엄숙하고 엄중한 관계에 들어갑니다.  법적으로는 이미 부부가 됩니다.  한 편의 상대가 간음하거나 다른 반려자를 가지려고 하지 않으면 결코 파혼할 수 없는 기혼자들이 됩니다.  

아직 결혼하지 않고 약혼만 했는데 요셉을 보고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말씀하기를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또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라고 합니다. 이들이 약혼한 관계인데, 남편이라고 하며 아내라고 합니다.  

대개 약혼 기간은 1년 정도를 가지는데, 이 기간에 한 편이 죽으면 자동으로 처녀 과부가 되기도 하고 청년 홀아비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 결혼이란 신랑이 신부를 자기의 집으로 데려가는 것으로의 축제요, 동거를 공적으로 선포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문서가 오고가기 전에, 한번 약속했으면 영원한 언약이 되며, 약속은 하나님 앞에서 결단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짝지어주셨다고 믿었고, 그렇게 행동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약혼 기간에는 두 사람이 아무리 사랑하고, 앞으로 한 남자의 아내가 된다고 하여도 정조를 굳게 지키고 결혼식을 거행해야만 부부로서의 책임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아, 그런데 약혼한 기간에 여자가 임신한다고 하는 것은 변명할 것도 없이 부정을 저지른 것을 의미합니다.  이 약혼 기간에 임신하였다고 하면 간음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죽음의 형벌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종종 이슬람권의 나라에서 동리 사람들이 돌을 들어 한 여성을 죽이는 끔직한 사건이 보도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한 여성을 처단하는데 남자들이 돌을 던져 죽이는 것을 TV에서 방영한 적이 있습니다.  

요셉이 자기의 아내 될 사람, 곧 아내인 마리아의 몸을 보니 전과 같지 않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는데 아마도 여러 날이 걸렸을 것입니다.  임신 4개월 정도는 되었을 것입니다.  자기가 잘못 본 것 같아서 또 살펴보고 또 살펴본 결과 틀림없이 임신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자기가 잘못 본 것 같아서 “내가 잘못 보았을 거야,  그럼 잘못 보았지”  잘못 본 것으로 넘기려고 하였는데, 아니었습니다.  틀림없이 임신한 것이었습니다.  요셉의 사랑과 꿈과 소망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마리아를 연모하였고, 사랑하고 그와 함께 일생을 살아갈 부푼 꿈으로 가득하였는데, 이것이 어찌 된 일입니까?  결혼도 하기 전에 자기 아내가 임신하다니, 그의 사랑과 믿음과 인내가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지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은 무슨 후덕하고 넉넉하다거나, 은혜로운 사람이란 말이 아닙니다.  

모든 일에 바르고 옳은 판단으로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요,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요셉은 자기의 감정과 경험보다는 율법 중심의 의무와 책임을 잘 감당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려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구약의 말씀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그런 부정한 여자는 돌로 때려죽이라는 말씀이 있어 끔찍한 죽음의 광경을 상상하기도 하였습니다. 

요셉이 조용히 파혼하려고 하는 것으로 율법에 따르고 율법을 존중하려고 한 것입니다.  마리아의 현재 임신한 상황을 모든 동리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가만히 끊고자 한 것으로 보면 마리아의 미래는 자기가 책임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뜻대로 두 사람이 파혼하고 약혼한 관계를 조용히 정리하였다고 하면,  그 다음 몇 달 후에 마리아가 당할 큰 낭패는 말하지 않아도 뻔한 것이었습니다.  동리의 회당에서는 적당히 넘어갈 일이 아니라, 반드시 율법대로 처단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이 일에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의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은 은혜스러운 사람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넉넉하거나 후덕한 사람이라는 말도 아닙니다.   자기는 손을 떼어도 율법대로 처리하기를 바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자기의 손으로 처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에 맡기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임신을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에, 주의 사자가 꿈에 나타나셨습니다.  

20절 말씀입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18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자, 좋은 소식을 가지고 심부름하시는 가브리엘 천사가 처녀 마리아에게 나타나셔서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고 인사하였습니다.  이런 인사는 참으로 의외였습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1:31-33)고 예고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처음에는 장차 요셉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가 이런 놀라우신 역사를 감당하는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과 결혼한 다음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당장 임신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셨습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1:35)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눅1:37)고 하셨습니다.  

성령, 거룩한 영,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마리아를 덮으실 때에 처녀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불신 사회의 많은 사람들처럼, 인간적으로 생각해봅니다.  이것이 어디 이해가 될 이야기입니까?   한 군데도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말도 안 되는 허황된 이야기로 들립니다. 그런데 주의 사자는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에게 나타나셔서 마리아에게 들려주셨던 말씀을 다시금 들려주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셉의 심정을 가지고, 요셉의 신앙으로 사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요셉이 마리아에게 시도하려는 의도를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와 파혼하는 것이나 가만히 끊고자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20절을 봅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무서워말라는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고, 겁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마리아가 임신한 것은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요셉은 이어서 하시는 말씀을 통하여 이 일은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것이 분명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고 하셨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어 낳을 아들의 이름은 예수라고 해야 하고, 그 아들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 구원할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고 살리시기 위해서 한 아들은 세상에 보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이미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23절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고 하니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했습니다.  마리아의 임신과 하나님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는 것이 하나님이 즉흥적으로 행하는 일이 아니라, 이미 800년 전 선지자 이사야가 하신 예언의 말씀대로, 지금 마리아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이 꿈을 통하여 다시는 의심하지 않았고, 무슨 토를 달지도 않았고,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일어났으며,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 마리아를 데려왔습니다. 아직 결혼은 생각하지 않았고,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기에 거창한 결혼식을 준비할 수도 없었지만, 조촐하게 집안 식구들의 축복을 받으며 아내 데려오는 것을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때까지 부부로서 당연한 관계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니 그의 이름을 주의 사자의 지시대로 예수라고 하였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젊은 사람들이요, 왕성한 청년들인데, 이번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이루어지는 일이요, 태어날 아기는 인류를 구원하실 위대한 구속사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믿기에 자신의 정욕까지도 절제하면서 마리아의 임신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요셉이 가지는 위대한 신앙이요, 고결한 인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 두 사람은 혼인관계에서 자연스럽게 가질 수 있는 인간의 욕망도 잘 이겨내고 있습니다.  요셉의 모든 의심과 갈등은 거룩한 계시, 성령의 감동, 주의 사자가 들려주는 말씀으로 충분히 극복하고 남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요셉이란 사람을 잘 보아야 합니다.  그는 진실한 사람,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앞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고 그대로 순종하려고 힘썼습니다.  요셉은 꿈에 나타난 천사의 말씀을 듣고서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말씀대로 순종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의 아내 마리아를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하였던 그의 남편인 요셉이 아내가 분명히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믿었습니다. 

누가 의심하고 있습니까?   사실 우리는 제3자이지만, 이 사건의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요셉입니다.  오늘 우리는 요셉의 영성, 요셉의 신실함, 요셉의 사람됨에 무게를 두어야 합니다.  요셉은 무엇보다도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씀에 온전히 시인하고,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에 자기 부부가 중심에 서 있다는 것으로 감사하면서 성령의 지시를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온 우주 만물을 말씀 한 마디로 창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이 인간의 방법이 아니고, 과학적인 방법이 아닌,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는 것이 성령으로 잉태하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하나님다우신 방법이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기에 우리는 이 사건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믿어 의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겨우 하시는 일이라는 것이 인간이 다 이해하고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면 그것이 무슨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가 있으며, 구원하는 위대한 진리가 들어 있을 것입니까?   우리 하나님은 능히 하지 못하실 일이 없습니다.  사람으로 할 수 없어도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위대하신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의 구원자요, 창조주이신 하나님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을 생각할 때마다 감격이요,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예수님의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을 외면하시지 않고, 우리의 삶 중심에 항상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문제 깊숙이 들어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인간의 영원한 숙제인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오신 주님은 우리의 사소한 문제들, 우리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난제도 함께 하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방황하며 어둠에 헤맬 때에도 임마누엘의 주님은 항상 우리 편이 되어 주셨고,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사람들이 나의 진면목을 알아주지 못하고 조그만 실수에도 뭇매를 가할 때에도 주님은 나와 함께 계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미래에도, 우리가 죽은 다음에도 항상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예수님이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지상명령을 주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고 했습니다.  임마누엘의 예수님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장래에도 항상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고 있으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17세기 일본의 기독교 박해 사건을 배경으로 쓰여진 침묵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는 인간으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순교의 장면들로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가장 끔직한 장면은 펄펄 끓어오르는 온천 구덩이에 집어 던지는 것이며 망망대해로 끌고 가서 그냥 바다에 던지는 것입니다.  

로마 천주교회의 신부들로부터 말씀을 전해 듣고 예수를 믿는 두 농부가 잡혀서 죽음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많은 동리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배에 태워 바다로 나가서 바닷물에 띠운 적은 나무 십자가에 매달리게 합니다.  조금 후에 밀물이 되어 거센 파도는 두 사람의 농부를 집어삼키고 말았습니다.   그들 두 사람의 농부는 그렇게 외롭고 쓸쓸하게 그리고 고통스럽게 죽어갔습니다.   다만 그들이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언덕 위에서 숨어 보고 있던 신부는 이런 만행에도 하나님이 가만히 두고 보시는 것 때문에 탄식합니다.  “하나님, 도대체 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은 존재하는 것입니까?  존재하신다면 이렇게 침묵하실 수 있습니까?”  

그리고 나중에 신부가 하나님을 만나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먼저 신부가 하나님께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침묵하고 계시는 것으로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고통 가운데 죽어갈 때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셨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 이렇게 신부에게 말씀했습니다. “아들아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과 함께 고통당하고 있었을 뿐이다.”   

신부는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사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그 고통스러운 자리에 함께 계셨다는 사실은 놀라운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결코 침묵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의 고통과 아픔을 나 몰라라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내 편이 되어주셨고,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죽음에 처해지는 처절한 순간에도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고통 받으시지만, 그 자리에서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받게 하시는 순간이었습니다.  

구차하게 죽음이나 면하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바꾸어주시고, 우리의 연약한 손을 붙들어 영원한 하늘나라로 이끌어주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며 산 자의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에 순종하면서 주님을 맞이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들이 예언하신대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셨습니다.  임마누엘 예수님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다고 알려주십니다.  오늘도 여러분과 함께 계시는 주님, 고통과 아픔 속에 함께 계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하고 영력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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