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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이유 (히 2: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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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이유 (히 2:17-18)
  

성탄절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여러분, 혹시 아이들이나 믿지 않는 분들이 성탄이 뭔가요? 이렇게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아, 성탄은 예수님이 세상이 오신 것이야” 이런 식으로 대답하시겠습니까? 물론 틀린 것은 아니지만 좀 부족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아주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성탄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사건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한 인간으로, 그것도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겁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인간으로 신인양성(神人兩性) 을 갖고 계십니다. 말하자면 신인(神人, God-Man)이신 겁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필이면 왜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을까? 하나님은 분명히 전지전능하신 분이니까, 무엇이든 마음대로 하실 수 있잖아요. 인간이 되지 않고도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는데, 굳이 인간이 되신 이유가 무엇이냐 이겁니다.   

사실 잘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인간이 된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이니까 그렇지, 하나님이 인간이 되는 것은 인간이 짐승 되는 것보다 더 낮고 천해지는 겁니다. 한번 가정해 보십시오! 아무리 강아지를 좋아해서 애완견을 끼고 침대에서 함께 자는 사람이라고 해도 누군가 “이 개XX!” 이렇게 말하면 기분이 좋을까요? 더 나아가 “너 말이야, 개를 너무 좋아하니까 오늘부터 개가 되어 같이 잘 놀아라!” 이렇게 말하면 어떻겠습니까? 이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수치요 고통입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는 것은 이보다 더, 더, 더 끔찍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굳이 인간이 되셨다면 정말 이상한 일 아닙니까?   

잘 생각해 보면 역설적으로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분이니까 인간이 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렇죠? 그리고 굳이 인간이 되신 데에는 그럴만한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 세 가지를 살펴봅니다. 

  
[1] 대속  

예수님은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은 다 죄인입니다. 롬3:10 “ ...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의인은 단 한 명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죄의 결과 어떻게 됩니까?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 ” 죄의 대가는 사망입니다. 영적으로 죽고, 육신이 죽고,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영영원한 사망은 육신의 죽음보다 더 심각합니다. 존재가 끝나는 게 아니라, 영원한 지옥에서 고통 받으며 영원히 존재하는 겁니다. 즉 영원한 고통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 받을 수 있나요? 죄값을 치러야 합니다. 죄값은 죽음으로써만 치를 수 있습니다. 피는 생명입니다. 피 흘림은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피 흘림으로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겁니다. 히9:22 “ ...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인간 본인이, 다시 말해서 나 자신이 죄값으로 피흘려 죽으면 너무 비참합니다. 그 대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피흘려 죽으면 나는 살아날 수 있습니다. 나를 대신해서 다른 사람이 죽는 게 바로 대속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나와 똑같은 인간이 되신 겁니다. 

롬8:3 “ ...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예수님 자신은 전혀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죄 있는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고후5:21 보면 좀 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죄 없으신 예수님이 인간이 되셨고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죄를 짊어지고, 죄 자체가 되어 피흘려 죽으심으로 그를 믿는 자는 죄 사함을 받고 의인이 됩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죄를 예수님에게 넘겨주고, 예수님의 의를 넘겨받는 겁니다. 맞교환(exchange)을 한 셈입니다.   

오늘 본문 17절 말씀이 바로 대속의 원리를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형제(인간)와 같이 되셨습니다. 그 이유는 대제사장이 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성탄 이전 즉 구약 시대에는 대제사장이 속죄의 피를 들고 지성소 하나님 앞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짐승의 피를 갖고 들어갔는데, 짐슴의 피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의 예고편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계속 반복된 겁니다. 그러다 마침내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셔서 자신의 피를 흘리심으로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여기 보면, 속죄를 다른 말로 뭐라고 했나요? 속량!(贖良 atonement) 구원해서 해방시킨다는 뜻인데, 구속(救贖 redemption)이란 말과 비슷한 말입니다. 속량이란 말은 옛날 노예 시장에서 노예 값(속전)을 주고 사서 해방시켜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해방의 의미가 강조될 때는 속량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새 주인이 속전을 지불하고 사들였다는 의미를 강조할 때 구속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대신 지불했다는 의미를 강조할 때는 대속(代贖)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런 예를 들어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겁니다. 옛날 한 사람이 노예 시장 옆을 지나가게 됐습니다. 노예들의 비참한 광경을 지켜보던 그는 한 노예를 보고 그를 사기 위해 엄청난 값을 불렀습니다. 낙찰되어 값을 치릅니다. 그리고 그 노예에게 매매증서를 건네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를 해방시키기 위해 너를 산 것이니 자유롭게 가거라!” 그 노예는 너무 감격해서 다른 데로 가지 않고 자진해서 그 사람을 새 주인으로 모십니다. 그리고 평생 충성합니다. 그 주인은 노예를 너무 사랑해서 양자로 삼았습니다. 이런 게 바로 구속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 예수님의 피로 죄값을 치르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을 생각하면 대충 넘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공의를 생각하면 인간의 죄를 대충 넘길 수 없습니다. 반드시 심판해야만 합니다. 딜레마죠. 사랑을 생각하면 공의가 울고, 공의를 생각하면 사랑이 울고. 묘안이 없을까요? 사랑과 공의를 절묘하게 조화시킨 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그 안에 담겨진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과 더불어 나 자신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초대교회 교부 크리소스톰의 말이 이를 웅변으로 증거합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의 위중함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사랑의 위대함을 알게 된다.”

예수님은 이 놀라운 십자가를 지기 위해 인간이 되신 겁니다. 마태복음 2장을 보면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방문한 사건이 나옵니다. 그 때 어떤 예물을 드리죠? 황금, 유향, 몰약 세 가지입니다.(마2:11) 황금은 왕에게 드리는 예물, 유향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몰약은 죽을 사람에게 드리는 예물입니다. 아기에게 몰약을 드린다? 이상한 겁니다. 아니, 무례한 것이죠. 그러나 아기 예수님에게 시체 방부제인 몰약을 선물로 드린 것은 십자가 죽음을 예고하는 행위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러 오신 분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대속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마귀의 권세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히2:14~15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이니”  

영국의 위대한 설교가 스펄전 목사의 에피소드입니다. 어느 날 길을 가다 불량소년이 새장 속의 새를 괴롭히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너무 화가 나서 물었습니다. “얘, 새를 어쩌려고 그러는 거니?” 그 소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합니다. “괴롭히며 놀다가 죽일 거예요.” 기가 막힌 스펄전이 2파운드를 주고 그 새를 샀습니다. 그리고 멀리 멀리 날려 보냈습니다. 다음 주일 날 예배에서 스펄전은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마귀는 우리 인간을 괴롭히다가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독생자를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인간이 되셨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저와 여러분을 죄와 사망에서 마귀의 권세에서 구원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이 진리를 믿습니까?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또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11:25~26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아무쪼록 이런 확신을 갖고 성탄하신 예수님께 감사하며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2] 동정   

예수님은 우리를 동정하기 위해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와 동일한 삶을 사셨습니다. 동고동락하셨습니다. 특별히 우리의 모든 인생고를 겪으시고 공감하셨습니다. 그는 미혼모의 아들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그것도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육신의 아버지 요셉이 일찍 죽어 소년 가장의 고달픈 삶을 살았습니다. 그 후 공생애 가운데 얼마나 많은 것들을 체험하셨습니까? 배고픔, 목마름, 피곤, 멸시, 증오, 상처, 고통, 고독, 죽음 ...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온갖 고통을 다 겪으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죄수로 몰려 수치와 고통의 십자가가 달려 죽었습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시고, 그것도 모자라 가장 낮고 천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으신 겁니다. 

본문 18절을 보세요.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예수님이 단순히 하나님의 아들이기만 하면 사실 인간인 우리 입장에서 공감대를 가지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우리 사정 알겠어? 전지하시니까 지적으로 분명 아시죠.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공감대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분은 고고하게 높고 높은 데 계시고 우리는 낮고 낮은 데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직접 체험하셨으니까 공감할 수 있습니다. 

히4:15은 이런 사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sympathize)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동병상련이란 말이 바로 그런 거 아닙니까? 40대 중년에 남편과 사별된 여인이 있습니다. 어린 것들이 있는데 어떻게 사느냐고 통곡하며 몸부림칩니다. 이 상황에서 과연 누가 나서서 그녀를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섣불리 위로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20대 후반에 남편과 사별하고 평생 신앙 하나로 자식들을 잘 키우고 승리하신 노 권사님! 이분은 가능합니다. 그 여인에게 다가가서 등짝을 탁 때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울지 마! 나도 살았는데 왜 못 살아? 하나님이 도와주실 거야! 뚝!” 그러면 그 여인은 노 권사님의 품에 안겨 위로 받고 울음을 그칩니다.   

지난 번 연평도 포격 이후 국가 안보에 대한 염려가 고조되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이 군대를 기피할까봐 걱정들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최근 해병대 인기가 올라가 고 있습니다. 지원자가 몰려 경쟁률이 3.57대 1에 달했다고 합니다. 평소에는 2대 1 정도였는데 이렇게 치솟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더욱이 가장 힘들다는 수색 병과 는 무려 21대 1이었습니다. 우스갯소리로 해병대 가기가 서울대 가기보다 어렵다는 말도 합니다. 신문에서 신병 훈련 르포 기사를 흥미롭게 감동을 받으며 읽었습니다. 교관이 훈련병들을 영하 16도 혹한에서 혹독하게 훈련시킵니다. 얼음 조각이 깨져 있는 땅바닥 에서 포복을 시킵니다. 그래도 아무 소리 없이 다 따라 합니다. 

수료하던 날 고된 훈련을 마친 훈련병들이 감격스레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혹독한 훈련을 시킨 교관의 품안으로 뛰어 들면서 “교관님, 사랑합니다!” 이렇게 외칩니다. 교관들도 이렇게 말합니다. “내 새끼들이 전쟁터에 나가서 살아남아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혹독한 훈련을 시키는 거다.” 교관들은 이미 훈련병들의 백 배, 천 배 고된 훈련을 다 겪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공감대가 있으니까 고된 훈련 가운데서도 위로받고 승리할 수 있는 겁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 하나님이면서도 참 인간으로 우리 이상으로 인생고를 경험하시고 온갖 고초를 겪으셨기에 우리와 마음이 통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친근하게 느끼면서 쉽게 다가가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동정을 가지고, 동시에 신적인 능력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보살피시고 도와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병자들을 도와주시고, 어려움 당한 자들을 박대하지 않고 보살펴 주셨습니다. 심지어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눈물을 흘리신 적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해도 괜히 소외감에 빠지지 말고 동정하시는 예수님을 의지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히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in our time of need)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아무쪼록 우리를 동정하기 위해 인간이 되신 예수님을 의지하면서 위로 받고, 새 힘 얻어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3] 모범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시기 위해 인간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먼저는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서 참 자유와 기쁨, 영생을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궁극적으로는 중요한 목적이 또 하나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롬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은 인생의 모델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아름답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범죄함으로 거룩한 형상을 상실했습니다. 인생이 망가진 겁니다. 비유해서 말하면, 하나님이 명품 인간으로 만들어주셨는데, 인간 스스로 망가져 짝퉁 인간이 된 겁니다. 이제 예수님을 통해 참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시고 이를 회복시켜 주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엡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예수님)에게까지 자랄지라 ... ” 우리가 예수님만 따라 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가장 복되고 존귀한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지난 6월에 스웨덴의 빅토리아 공주(왕위 계승 서열 1위)의 결혼식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랑은 시골 우편배달부 아들이며 휘트니스 강사였던 다니엘입니다. 8년간의 연애 끝에 이루어진 결혼입니다. 시골 출신으로 촌티가 난다 하여 ‘개구리 왕자’라는 별명이 붙었던 다니엘에게 비로소 왕자의 공식 직함 수여됐습니다. 

그들은 스톡홀름의 한 체육관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다니엘은 덥수룩한 머리에, 청바지를 입고 머리에는 야구 모자를 쓰고, 촌티 나는 매너에 사투리까지 쓰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주가 첫 눈에 반했습니다. 그러자 왕실에서 난리가 났고, 스웨덴 귀족과 언론이 놀려대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공주의 아버지 국왕도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하지만 빅토리아 공주의 마음은 확고했습니다. “왕위보다 그를 사랑한다”고 천명했고, 그 대신 개구리 왕자를 ‘진짜 왕자로 만들기’ 프로젝트에 들어갔습니다. 

왕실 교육관과 홍보회사까지 동원해 그를 변신시킨 겁니다. 마침내 스웨덴의 저널리스트는 다니엘을 가리켜 이렇게 평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다니엘은 이제 4개 국어에 능통하고, 정장이 잘 어울리는 매끈한 귀족으로 바뀌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공주의 결혼식은 전 국민의 축제가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다니엘처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촌티 나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당신의 거룩한 형상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짝퉁 인생이 명품 인생으로 변화되어 가는 겁니다. 이게 바로 성화 과정이죠.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고전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as I follow the example of Christ)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을 본받고, 또 서로에게 본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성탄절이 가까운 이 계절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왜 인간이 되셨는지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우리를 대속하려고, 동정하려고, 그리고 모범이 되려고 인간이 되셨습니다. 아무쪼록 이 귀한 목적을 명심함으로 구원의 기쁨과 위로를 받으시고, 예수님의 형상 이루기 위해 더욱 정진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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