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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을 대접하는 것은 … (마 25: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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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대접하는 것은 …  (마 25:31-46)
 
 
1. 지독한 개인주의

프랑스 소설가 알베르 까뮈는 1942년 <이방인>이라는 소설을 발표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인 ‘뫼르쏘’라는 청년은 양로원에서 죽은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했으나 마치 남인 것처럼 슬퍼하지도 않고 눈물 한 방울 흘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장례를 치른 다음날, 여자 친구와 해수욕장에 가서 노닥거리고 코메디 영화를 보면서 깔깔 거리며 웃었습니다. 그러고 며칠이 지난 일요일 직장 동료와 함께 해변을 거닐다가 우연히 마주친 한 소녀를 이유도 없이 살해했습니다. 

재판에 회부된 그는 소녀를 살해한 이유를 “바닷가의 여름 태양이 너무 눈부셨기 때문에 그 소녀를 죽였다”고 말하면서 속죄의 기도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행복하다”고 외쳤습니다. 이러한 내용의 이 소설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2차 대전이라는 시대적인 배경과 실존철학이라는 철학적 사상을 담고 있기는 합니다만, 궁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개인주의’입니다. 즉 자신 외에 다른 사람에게, 비록 그가 혈육일지라도 관심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자기 감정, 자기 생각, 자기 생활에는 대단히 충실합니다.

까뮈가 예언하듯이 발표한 이 소설은 그 이후 현대인들의 정신과 사고방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2004년에 만들어진 일본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일본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으로 4명의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버지 없이 엄마와 함께 살던 아이들이 새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이사할 당시 엄마는 큰 아이 하나만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아이들은 모두 짐 가방 속에 들어가서 짐짝처럼 그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집주인이 ‘2인 이상은 받을 수 없다’는 입주 조건을 걸었기 때문이었고, 가난한 엄마는 그런 식으로 집 주인을 속이고 이사를 한 것입니다. 이사를 끝낸 후, 엄마는 아이들에게 규칙을 정하여 그대로 지킬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 규칙이란 다름이 아니라 ‘절대로 시끄럽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집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아이들이 떠들다가 그 집에 아이들이 많다는 것을 주인이 알게 된다면, 혹은 아이들이 집밖으로 나갔다가 주인에게 발각된다면, 그 집에서 쫓겨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규칙 때문에 아직 어린 아이들은 집 안에서 그야말로 죽은 듯이 지냅니다. 그러던 중 엄마는 가출을 해버립니다. 아이들을 버린 것이죠. 남겨진 아이들은 집 근처 마트 쓰레기통을 뒤져 유통기한이 지난 도시락으로 생계를 유지해 나갑니다. 그러던 중 막내가 방안에서 죽고 맙니다. 그러고 나서도 아이들의 외로운 살아남기는 이어집니다. 

이 영화를 통해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제목처럼 버려진 아이들이나 혹은 노인들, 그리고 이웃들이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아무도 모른다>, 즉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웃에 누가 사는지 별로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 처지가 이러 이러해서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내가 여유를 가지게 될 때, 내가 성공하고 난 다음에 주위를 돌아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차하고 장차 후회를 불러올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왼 편에 있는 사람들처럼 말이죠. 

2. 마지막 날 심판의 장면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즉 재림과 종말에 관하여 말씀하신 비유입니다. 이제 이틀만 지나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짧은 33년간의 육적인 생애의 막을 내릴 것입니다. 그런 시점에 주어진 말씀, 즉 주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주신 이 마지막 비유는 정말 중요한 것이요, ‘비유 중 비유’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비유를 통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시려는 것은 무엇일까요?

1) 심판의 날, 결산의 날이 다가온다(31~33).

첫째는 모든 사람에게 ‘심판의 날, 그 인생에 대한 최종적인 결산의 날’이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31절부터 33절,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주님은 이틀 후면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시는 참혹한 일을 당할 것이지만, 그 견딜 수 없는 고난과 죽음을 넘어 장차 재림하실 때의 영광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처음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는 낮고 천한 마구간에서 나셨고, 육신의 많은 고난을 당하셨으며, 역사상 최악의 흉악범으로 취급당하여 십자가까지 지셨습니다. 이것이 그의 ‘굴욕적’인 첫 번째 오심이었다면, 장차 재림할 때는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즉 하늘의 천군천사들과 먼저 천국에 간 이들과 이 땅에서 주님을 맞이하는 거룩한 성도들의 무리들과 함께 영광된 모습으로 오실 것입니다. 

그렇게 오신 주님은 먼저 어떤 일을 하실까요? 오늘 본문에 보니까,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영광의 보좌에 앉으사 재판장의 권위를 갖고서 모든 민족을 자기 앞에 불러 모으실 것이고, 그 가운데서 양과 염소를 구별하는 것 같이 사람들을 구별할 것입니다.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같이”라는 말씀은 당시의 牧羊 風習과 관련된 것입니다. 낮에 풀을 뜯을 때에는 양과 염소는 구분 없이 섞여 지냅니다. 그러나 일교차가 심한 팔레스타인에서는 밤이 되면 양과 염소를 분리해 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양들은 추위에 강하지만 염소는 추위에 약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마지막 때, 종말의 때, 심판의 때가 되면 주님은 어떤 사람이 양인지, 그리고 어떤 사람이 염소인지를 구분하실 것입니다. 

장차 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포함하여 세상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인데, 그 심판의 모습은 오늘 본문과 같이 양은 주님의 오른편에, 염소는 주님의 왼편에 있도록 분명하게 나누어 양분할 것입니다. 오른편이냐, 아니면 왼편이냐? 아주 명확하게 양쪽이 구분될 것인데요. 이것은 ‘제3의 자리’ 혹은 ‘중간지대’는 없다는 뜻입니다. 심판의 때에 오른편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한다는 뜻이고, 왼편에 선다는 것은 영원한 멸망에 떨어지게 됨을 뜻합니다. 구약시대 때부터 ‘오른편’은 위엄과 영광과 존귀와 생명의 자리로, ‘왼편’은 미련함, 상실, 저주와 사망의 자리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른편에 선 자들을 ‘복 받을 자’라고 칭찬하시고, 왼편에 선 자들은 ‘저주받은 자’로 경멸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늘로 승천하신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고, 그 날은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선인과 악인이, 신자와 불신자가,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공존하고 있지만, 주님 재림 시에는 명확하게 구분되어 양쪽이 확실하게 갈라지게 될 것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왼편에 선 자들이 주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주여”라고 부른 사람들이었고(44), 스스로 주님을 믿는다고 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비유가 보여주는 것은 교회 안, 즉 믿는 자라고 하는 이들의 무리들 가운데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장차 양과 염소로 구분되듯, 그렇게 구분과 분리가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지금은 어느 누구도 모릅니다. 심지어 염소인 자신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날이 되면 다 알게 될텐데, 문제는 막상 그날이 닥치면 너무 늦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양인지 누가 염소인지 미리 아는 것이 그 날을 대비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말하는 그 구분 기준은 무엇일까요? 

2) 양들에 대한 재판(34~40). 

먼저 오른편에 있는 자들, 즉 양들에 대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34절부터 40절까지는 주님께서 오른 편에 있는 의인들과 대화하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로 말씀을 시작하신 주님은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넘치는 복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며, “창세로부터 … 예비된 나라를 상속”한다는 말은 천국,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을 차지한다는 뜻입니다. 즉 주님은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칭찬과 함께 ‘주님의 나라를 상속받으라’, 혹은 ‘천국에 입주하라’는 상급과 더불어 그 허가 명령을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천국에 들어가도록 허락하신 주님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35,36).” 주님의 오른편에 서서 칭찬과 상을 받게 된 이유는 그들이 주님이 배고파하실 때에 잡수실 것을 드렸고, 주님께서 목말라 하실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주님께서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드렸고, 주님께서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주님께서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주님께서 옥에 갇혔을 때에 감옥까지 찾아가서 돌보아 주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오른편에서 주님의 칭찬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주님께 물었습니다.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실 때에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언제 주님께서 목마르실 때에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셨을 때에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을 입혀 드렸습니까?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병드셨을 때에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가서 뵈었습니까(37~39)?” 오른편에 선 그들이 생각해 보니까 자신들의 기억으로는 단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주님을 대접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물었던 것입니다. 

이 질문을 들으신 주님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그 의미를 설명해 주셨습니다(40). 이러한 주님의 말씀은  당시 백성들이 衣食住 문제로 얼마나 힘들었는지와 그로 인하여 많은 질병과 억울한 누명과 과중한 채무 등으로 사람다운 삶을 살기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는 것을 설명해 줍니다.  

그리고 주님이 이 땅을 떠나신 후, 교회와 성도들이 주님과 복음 때문에 뿔뿔이 흩어져 나그네가 될 것이고, 경제생활에 불이익을 당할 것이며, 그로 인하여 衣食住의 심각한 어려움을 겪을 것이며, 옥에 갇히는 일이 빈번히 일어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주님 당시 고난 받고 굶주리며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과 장차 주님으로 인하여 고난 받고 굶주리며 질병에 시달리게 될 사람들에 대한 섬김과 돌봄이 오른편에 설 자격 기준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여기에 신앙적인 비약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바로 주님께 해 드리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즉 오른편에 있는 성도들이 직접 주님께 옷을 드리거나 잡수실 것을 드린 것은 아니지만, 굶주린 자에게 양식을 주고, 나그네를 따뜻하게 대접하며, 헐벗은 자에게 옷을 주며, 병든 자와 갇힌 자를 돌아본 것이 곧 주님을 대접한 것과 똑같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대단히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대통령의 主治醫, 대통령의 理髮師, 대통령의 廚房長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일을 맡는 것은 엄격한 자격과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굳이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인기 스타의 스타일리스트가 되어 그 스타를 멋있고 예쁘게 꾸며주는 직업이 얼마나 각광을 받고 있는지 모릅니다. 대통령이나 스타와 관계된 것이 이러하다면, 하나님이시며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에게 음식을 드리고 예수님을 치료하고 예수님에게 옷을 입히는 것은 얼마나 까다롭겠습니까? 그리고 그 일은 얼마나 명예스럽고 인기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비록 우리가 직접적으로 주님께 음식을 대접해 드리고, 직접적으로 주님을 치료해 드리고, 직접적으로 주님께 옷을 입혀 드리지는 못해도, 주님께서 그와 동일한 것으로 받으시겠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을요? 누구에게 한 것을요?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힘없고 가난한 그 누구에게 친절과 사랑을 베풀었다면 그것이 바로 주님께 해 드리는 것과 똑같다고 인정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배고픈 자를 보면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이 필요한 자에게는 입을 것을 주며, 나그네를 잘 대접하며, 목말라 하는 자에게 마실 것을 주고, 병든 자를 돌아보며, 억울한 일을 당한 자를 위로해 줌으로서 여러분들도 주님의 오른편에 서서 칭찬과 상급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칭찬과 상급보다 그렇게 사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하니 우리가 어떻게 마다하겠습니까? 여러분 곁에 있는 사람들을 잘 섬김으로 곧 주님을 잘 섬기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염소들에 대한 재판(41-46). 

마지막으로 염소와 같은 자들로 여겨진 사람들에 대한 심판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주님은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저주를 받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41). 오른 쪽에 있는 자들에게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라고 부르신 것과는 너무나 대조되는 呼稱입니다. 또 오른 쪽에 있는 자들에게는 ‘나아와’라고 하셨는데,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나를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나아오라’는 말은 밝은 곳으로, 영광의 자리로, 상주는 자리로, 영생의 자리로, 주님 곁으로 오라는 말이고, ‘떠나가라’는 말은 주님 품에서 어두운 곳으로, 영벌의 자리에, 고난의 자리로 가라는 말입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오른 쪽에 있는 자들에게 하신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해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는 말씀과는 정말 차이가 나도 너무나 차이가 나는 대접을 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42절부터 45절까지에는 왜 왼편에 있는 자들이 이런 저주스런 비난과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게 될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살인, 간음, 도적질 같이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42,43).” 

그러자 그들도 오른편에 있던 사람들처럼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44).” 그들은 주님을 아는 사람, 그래도 주님을 믿는다고 스스로 자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께 ‘아니 주님께서 언제 배고파하셨으며, 언제 목마르셨으며, 언제 헐벗으신 적이 있었으며, 언제 병드셨고, 또 언제 갇히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45)”고 하셨습니다. 이 땅에는 작은 자, 어린 자, 병든 자, 외로운 자, 가난한 자, 실패한 자, 울고 있는 자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말이며, 바로 그들을 사랑으로 섬기지 않은 것이 주님을 섬기지 않은 것이요, 바로 그 때문에 그들이 염소의 자리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주 신실하고 경건한 한 성도가 주님을 너무나 그리워 하다가 어느 날 밤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주님,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당신을 뵙게 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도무지 견딜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를 향하여 “내일 중에 내가 너를 찾아 갈 테니 잘 맞아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음 날 그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주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 날 그를 찾아온 사람은 다리를 저는 장애를 가진 거지 한 사람 뿐, 하루 종일 기다려도 주님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 그는 주님께 “어찌하여 약속을 어기셨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내가 너를 찾아갔었지만 너는 나를 냉대하지 않았느냐”라고 대답하셨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은 저 하늘에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지금 이 땅의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 그들의 한숨과 고통과 눈물 속에 임재해 계십니다. 주님은 이 땅의 그늘진 곳, 가난과 소외의 눈물 젖은 곳에 지금도 성육신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속에 예수님이 임재해 계신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을 섬기는 일입니다. 성도에게 ‘내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이웃과 더불어서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그들을 섬김이 곧 주님을 섬김

<열린 편지>라는 인터넷 카페가 많아 정확히 어느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열린 편지>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습니다.

독일에서 100만 부가 팔리고, 유럽 14개국에서 번역 출간된 ‘요제프 키르쉬너’가 지은 「이기주의자로 살아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모든 사람은 이기주의자다”라고 단언한다. 그는 “우리 모두 한 배를 타고 있으니 자신을 생각하지 말고 남들을 배려하라”, “남을 도와야 너도 도움을 받는다”,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미루어라” 등의 격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들을 복종시키려는 사람들이 지어낸 허구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그 다음에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그리고 결정을 내릴 때마다 항상 거리낌 없이 그것이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라는 질문을 던져 보라”고 했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이기주의를 논리적 이기주의, 미학적 이기주의, 도덕적 이기주의로 나누어 설명했다. 論理的 이기주의란 자기의 판단은 언제나 옳다고 하는 생각이고, 美學的 이기주의란 자기의 느낌을 항상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道德的 이기주의는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선이고 자기에게 해가 되면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현실적이고 현명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인간을 동물적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원리이다. 동물은 본능에 의해 살아간다. 만약 인간도 동물들처럼 본능에 의해서만 살아간다면 ‘짐승 같은 인간’, ‘짐승 같은 세상’이 되어 버릴 것이다. … 동물적인 본능만 난무한 절제되지 않은 이기주의는 결코 자신과 타인의 행복을 증진시킬 수 없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극단적인 개인주의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자신과 다른 사람을 불행으로 몰고 가는 원인이 됩니다. 만약 예수님이 이기주의자였다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이 땅에 오지 않았다면 저와 여러분은 지금도 불행할 것이고 장차는 더 불행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타주의자로서, 섬기고 희생하는 분이셨기에, 하나님께 반역하고 마귀의 편에 서버린 인류를 구원하시고 섬기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자기를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삶, 이웃을 위한 삶으로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개인주의나 이기주의를 배격하고 철저하게 다른 사람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와 십자가의 복음 안에서 성도에게 주어진 무한한 자유를 노래하면서도, 다른 사람 때문에, 다른 사람이 실족할까봐 스스로 그 자유를 제한한다고 말했습니다. 자유보다 다른 사람이 더 우선인 신앙의 원리를 보여주는 것이죠.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에게 먼저는 다른 사람, 여러분의 이웃, 그 중에 굶주린 자, 마실 것이 없는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갇힌 자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런 삶에 대해 주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주신 놀라운 말씀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주변에 있는 작은 자 낮은 자 가난한 자 갇힌 자 외로운 자 병든 자를 돌아보는 것은 곧 주님을 섬기고 대접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 모두가 주님께 감사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없는 것이나, 우리에게 버거운 것이나, 혹은 일부러 찾아다니면서가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우리가 가진 것으로 주님의 오른 편에 설 수 있는 자격, 칭찬받고 상 받을 자리에 설 수 있게 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가난한 자는 자기의 적은 돈으로, 부자는 자기의 큰돈으로, 많이 배운 자는 자신의 지식으로, 배우지 못한 자는 자신의 적은 지식이나 혹은 몸으로 이웃을 봉사하도록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판 때에 어느 누구도 변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난한 자도 자기가 가진 사랑을 필요한 자에게 나눌 수 있어서 그 사랑 때문에 오른편에 설 수 있게 해 주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정말 어렵다고 했으나 부자는 자기의 부를 가지고 큰 사랑을 나눌 수 있으니 그런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형편이 나쁘고 불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자기가 현재 가지고 있는 것으로 얼마든지 나눌 것이 있기 때문에 주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지금 우리가 가진 것으로 얼마든지 형제를 사랑하고 대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을 주님은 주님을 섬기고 대접한 것으로 여겨주시겠다니 이 또한 은혜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주님처럼 생각하고 그들을 도우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장차 주님께 칭찬받고 하늘의 상급을 받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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