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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그리스도의 오심 (눅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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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오심 (눅 2:1-14)  
 
 
설교시간에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설교를 하던 목사가 조용히 전화기를 끄라고 했습니다. 조금 후에 또 전화가 울렸습니다. 그래서 조금 짜증 섞인 음성으로 "예배시간에는 전화기를 끄고 들어오는 것이 예배자의 예의가 아니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런데 조금 후에 또 전화가 울렸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설교하는 목사의 주머니에서 울리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당황하던 목사가 곧 태연하게 전화기를 꺼내더니 "여보세요, 아 하나님이세요, 지금 예배중이니까 예배 끝나는 대로 전화 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하고 끊더랍니다. 

우스개 이야기지만 가끔씩은 하나님과 이런 직통 전화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세상에 이해 안 되는 일들이 하도 많아서 이 같은 전화가 있다면 하나님께 그 때 그때마다 직통으로 물어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도 이해가 잘 안 되는 일들이 많습니다만 성경을 보면 역시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가 안 되는 불가사의한 일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것은 예수님의 탄생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는데 귀하고 주목 받을 만큼 부티 나게 보내신 것이 아니라 아주 빈약한 모습으로 보내셨다는 사실입니다. 집안형편도 그렇고 부모도 빈약한 사람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의 아버지인 요셉의 직업은 목수였습니다. 

그 시대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직업이 목수였고 그리고 또 하나의 직업인 목자들이었습니다. 목수와 목자는 그 시대에 가장 천한 직업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탄생을 상식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가장 천한 직업을 가진 부모에게서 가장 평범하게 출생했다는 사실입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 이토록 비천하게 출생하셨느냐가 하나의 불가사의한 일이고요, 

또 하나 예수님이 태어나신 시점도 불가사의 합니다. 당시 로마 정부가 세금을 거두기 위해서 인구를 파악해야했고 그것을 위해 모든 백성들에게 각자의 고향에서 호적정리하기를 강요함에 따라 요셉도 갈릴리 나사렛을 떠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가야했습니다. 사실 마리아는 여자이기 때문에 가지 않아도 됩니다. 요셉 혼자 가서 호적정리를 해도 됩니다. 

그런데 마리아도 따라 나섰고 가던 도중에 예수님이 태어났습니다. 결혼을 하고 임신한 것이었다면 아마 요셉도 마리아를 혼자 두고 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둘은 결혼식도 하지 않은 상태였고 그 상태에서 마리아 혼자 남아 있었더라면 누구에게 어떤 말을 들을지 모릅니다. 처녀가 아이를 가진 것만으로도 부끄러운 일인데 혹시 남편 될 사람이 여자를 혼자 두고 도망갔다는 오해라도 받으면 마리아가 감당하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확히 그런 이유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지요. 하여간 이런 저런 이유로 만삭의 몸을 이끌고 함께 떠났고 그 여행 도중에 출산을 한 것입니다. 

요즘도 간혹 택시 안에서나 버스 안에서 출산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만 어디에서 출산해도 깨끗하게 정리도 되고 병원까지 쉽게 가지 않습니까! 어떤 산모가 병원에 도착해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분만했답니다. 간호사가 빨리 뛰어나와 부끄러워하는 산모에게 미안해 하지마라고. 몇 년 전에는 병원 마당에서 분만한 산모도 있었다고 위로했답니다. 그랬더니 산모가 갑자기 울면서"그게 바로 나예요."하더라나…….

하여간 예수님은 마리아가 여행 중에 태어났습니다. 교통수단이 발달한 것도 아니고 병원이 군데군데 편리하게 있었던 것도 아니니까 그 형편이 오죽했겠습니까? 병원은커녕 여관마저도 없는데다가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다보니까 방은 말할 것도 없이 꽉 찼고 결국 마구간에서 태어나 강보로 싸였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마도 여관숫자도 적었거니와 그나마 한꺼번에 많은 무리가 같은 마을로 호적 하러 갔으니 그 일반백성들과 그들을 관리하는 로마공무원들이 다 차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치더라도 한편으로는 해산달이 다된 임산부에게 방 하나를 양보하지 못할 정도로 삭막한 도덕성과 부패한 인심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의 입장에서도 갑자기 여행 중에 아이가 태어났으니 무슨 준비를 제대로 했겠습니까? 그래서 겨우 포대기에 쌀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인정으로나 상식으로 세상을 창조하실 만큼 능력이 무한하시고 못하실 일이 전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는데 어찌 그런 모습으로 와야 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하나님의 사랑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상식이며 인간의 생각입니다. 문제는 이제 그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의 진정한 의미를 알면 곧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그렇게 낮고 천한 곳에 조용히 오셨습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순전히 세상을 구원하실 목적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는 그렇게 오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성탄의 목적을 바로 알아야 예수의 오심과 전혀 다른 의미의 성탄을 보내고 있는 이 세상을 향해서 가르칠 수가 있습니다.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성탄의 의미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귈 수가 없고 하나님의 영원과 인간의 유한이 서로 만날 수가 없어서 인간과 영원히 친구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친히 인간이 되어 세상에 오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쉬운 말로 성탄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신 최고의 선물이며 은혜요, 사랑의 배려입니다. 

영국에서 어느 교사가 "산타는 가짜다."라고 아이들에게 말해 주었다가 아이들에게 주어진 동심의 꿈을 깨버렸다는 이유로 파직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오늘도 아이들은 성탄절 때만 되면 산타를 기다립니다. 왜요? 선물 때문이지요. 아이들에게는 단지 성탄절은 선물 받는 날이라는 생각이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이라는 생각보다 강하거든요. 이렇게 해 놓으면 아이들에게 성탄의 의미는 곧 선물입니다. 

어떤 부모가 성탄절에 아이의 선물을 사놓고 산타가 주고 간 선물이라고 아이에게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가 그 선물을 받아들고 한참을 들여다봅니다. 그러다가 "이상하다 산타가 준 선물포장지에 왜 우리 아파트 앞에 있는 마트 이름이 쓰여 있지" 그러더랍니다. 여기 어디에 성탄의 뜻이나 의미가 들어 있습니까? 성탄은 하나님의 사랑을 되새겨 보는 날이요, 그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는 절기입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인가를 여러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그 가운데 중요한 하나가 예배는 섬김의 삶이라는 사실입니다. 예배를 영어로 <서비스(Service)>라고 하기도 합니다. 봉사 또는 섬김이라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예배만 드리면 끝나는 게 아닙니다. 예배 후에는 섬김의 삶이 있어야 됩니다. 그 헌신과 섬김을 교회에서 해도 좋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서 하는 것도 좋습니다. 또 직장에서 하는 것도 좋습니다. 어디서든지 반드시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섬김과 봉사가 있을 때 온전한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이렇게도 조용히 오셔야만 했습니다. 오신 주님께서 하신 일들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들이지만 이런 일들을 이루어야 했을 예수께서 왜 이렇게 조용히 천하게 오셨어야만 했느냐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왜 그래야만 했습니까? 왜 예수님이 세상에 조용히 그리고 비천한 곳으로 오셔야 했는지 그 이유는 세상이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왔다는 것을 알면 바로 그 아들을 죽일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실제로 베들레헴에서는 헤롯이 그 태어난 하나님의 아들 하나를 죽이려고 두 살 이하의 모든 남자 아이들을 죽이는 비극이 일어났지 않습니까? 

보통 아이들을 낳으면 누구든지 축하를 받습니다. 딸이든지 아들이든지 일단은 먼저 축하를 보내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생명이 새로 태어난다는 일은 그 자체가 신비이고 관심이 가는 일입니다만 그러나 세상에는 그런 일은 없어야하지만 환영 받지 못하는 출생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입니까? 잘못생긴 아이입니다. 얼굴이 못났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결혼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아이의 아빠마저도 누구인지 모르는 임신을 해서 아기를 낳게 되었을 때는 환영받기보다 부끄러운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꼭 그런 경우는 아니지만 예수님의 출생도 주위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한 출생이었습니다. 일가친척 중에서도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거나 기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또 당시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태어났었어도 그곳 사람들마저도 기뻐하거나 축하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렇게 세상에서는 환영 받지 못한 예수님의 출생에 하늘에서는 엄청난 잔치가 벌어졌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천사들이 수도 없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태어났다고 찬송하고 축하했습니다. 그리고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찾아가서 이 놀라운 소식을 알려 주었습니다. 

왜 하필 목자들입니까? 베들레헴의 목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말이 목자이지 자기의 양도 아닌 남의 양을 키워주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철저하게 성경적인 신앙을 붙들고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셔서 불행과 죄로부터 건져주실 것을 믿는 신앙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의 민족 유다를 버린 이유가 자기들의 죄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들을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회복시키는 것을 소망하고 살았던 사람들이었고 그 신실한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하나님은 천사들을 통하여 가장 복된 소식을 듣게 해주셨습니다. 

여러분,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성경적인 신앙을 가진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두운 시대일수록 잠들지 않고 자기 맡은바 일에 충실하며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성탄하실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성탄 하셨습니다. 우리들을 구원하시고 살리시고자하는 그 목적을 위하여 가장 낮고 천한 곳으로 조용히 오셨습니다. 비천한 구유로 오실만큼 겸손하신 분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믿는 우리들의 가슴에 오늘도 성탄하신 주님의 사랑이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주어진 오늘 하루에도 그 사랑으로 인하여 가슴 따뜻하고 행복을 나누는 시간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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