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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시작과 마침 (욥 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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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과 마침     

(욥8:5-7)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1. 삶의 지혜를 깨우치는 전도서 7:8에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다.” 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의 하는 모든 일이 그 시작보다 끝이 나은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또한 전도서 1:9-10에,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there is nothing new under the sun.)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2010년이 다 지나고 2011년, 새로운 해가 된다고 해서 2010년 365일 동안 떠올랐던 ‘그 해’(sun)가 ‘새 해’, brand new sun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그 해’ 아래 아담과 하와가 살았었고, ‘그 해’ 아래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지금 ‘그 해’ 아래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고, 홍수 40일 동안 ‘그 해’를 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병든 히스기야에게 “너는 회복되지 못할 것이니 모든 것을 정리하고 죽을 준비를 하라.”(사38:1)며 사망을 선고하셨습니다. 그러자 히스기야는 얼굴을 벽 쪽으로 돌리고 ‘여호와여, 내가 마음을 다하여 주를 성실하게 섬긴 일과 내가 주 앞에서 선하게 살려고 했던 것을 기억하소서.’ 라고 기도하며 크게 통곡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통곡하는 눈물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일영표에 해 그림자가 10도 뒤로 물러가게 하겠노라.”(사 38:8) 오늘 우리는 히스기야의 기도로 뒤로 10도나 물러갔던 ‘그 해’ 아래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모리군을 패하게 하시고 이스라엘 군에게 승리를 주던 그 날에,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보는 데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태양아, 기브온 위에 머물러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머물러라!’ 그러자 이스라엘 군이 그들의 원수를 다 쳐부술 때까지 해와 달이 각각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살의 책에는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 거의 24시간 동안 그대로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이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해와 달을 멈추신 이와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그 후에도 없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수아의 기도에 24시간 동안 중천에 머물러 있었던 ‘그 해’ 아래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한낮인데도 온 땅에 어둠이 계속되었습니다. 해가 가리어졌습니다. 지금 우리가 그 가리어졌었던 ‘그 해’ 아래 살고 있습니다. 

또한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전1:4)고 했습니다. ‘해’도 그 ‘해’이고, ‘땅’ 역시 그 ‘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사는 땅에 아담이 살았고, 노아가 살았고, 아브라함이 살았고, 히스기야와 여호수아가 살았었습니다. 다만 ‘그 해’ 아래, 그리고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이 사용했던 사물이나 생활 방식을 토대로, 즉 과거의 것들을 바탕으로 해서 한 세대가 가고 한 세대가 오면서 발전시키고 개선시킨 것 뿐입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말은 이 죄악된 세상에는 새로운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죄악된 세상은 모든 것이 헛되고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깨끗이 씻지 못하면 해 아래서는 새로울 것이 없다는 것, 그리고 과거나 현재 혹은 미래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더 이상 낮의 해가 네 빛이 되지 않을 것이며 밤의 달도 네 빛이 되지 않고 나 여호와가 너의 영원한 빛이 되며 너의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될 것이니라.”(사60:19)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 사함을 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더 이상 낮의 해와 밤의 달 아래 살지 아니하고’,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빛 아래 영광스러운 삶’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빛 아래 살아야 영원히 기억되는 영광스러운 삶이 되는 것입니다. ‘낮의 해와 밤의 달 아래 사는 인생은’ 하나님 앞에 기억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빛, 영원한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오실 자”(계1:8)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기억되지 아니하는 삶은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허무하고 헛되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7:13에, “이스라엘의 희망이신 여호와여, 주를 버리는 자는 모두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여호와를 떠나는 자들이 흙에 기록된 이름처럼 사라질 것은 그들이 생수의 샘이신 여호와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죄 사함을 받지 못한 인생은 그 이름이 흙에 기록된 이름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영원히 기억되지 아니합니다. 참 빛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기억되지 아니하는 인생은 여전히 어두움이라는 뜻입니다. ‘알파와 오메가’는 시작과 마지막이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것들, 천지만물의 시작과 마지막이 되신다, 다시 말해 그것들을 시작하시고 마감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세상 역사의 시작과 마지막, 인생의 시작과 마지막을 주관하시는 분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생사화복이 하나님 손에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역사의 처음과 나중이 되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역사의 시작인 동시에 마지막이 되십니다. 

한 국가의 흥망성쇠와 온 세계의 종말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그 섭리 아래 진행되고 있음을 말합니다. 인간의 역사는 우연히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 아래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움직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류 구원의 알파, 시작이요 오메가, 나중이 되십니다.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게 된 것은 구원의 ‘알파’, 즉 구원의 ‘시작’이 되시는 하나님의 뜻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앞에 기억되지 아니하는 역사와 인생은 헛되고 허무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의 2010년의 삶이 하나님 앞에 영원히 기억되는 복된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오실 자”(계1:8) 라고 하신 것은 인생이 그 시작이 비록 미약할지라도 마지막은 창대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인생이 그 시작을 비록 그르쳤을지라도 마침내, 그 마지막이 가장 행복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약속의 땅 베들레헴에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풍족한 삶을 누렸습니다.(룻1:21) 

그러나 그 땅에 흉년이 들자 온 가족이 모압 땅으로 이주했습니다. 흉년을 피해 들어간 모압 지방은 어느 곳이겠습니까? “모압”이라는 히브리어는 “아버지의 씨”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압은 롯이 자기의 큰딸과의 근친상간을 통해서 얻은 맏아들(창 19:37)로 모압 족속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 모압의 후손이 흩어져 살던 곳을 “모압 땅” “모압 지방”이라고 부릅니다(렘 48:24; 룻 1:2, 6; 2:6). 

이처럼 “모압 지방”은 소돔에 살던 육신의 사람 롯의 후손들, 불륜의 후손들이 사는 땅입니다. 한 마디로 모압은 영적인 사람들이 사는 곳이 아니라 육적인 삶을 추구했던 사람들, 음란한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모압은 세상의 모형인데 나오미는 잠시 흉년이 들었다 해서 베들레헴을 떠나 이러한 모압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그러나 모압으로 이주해서 먹을 거 걱정없이 잘 사는 가 싶더니 기둥같은 남편이 죽고, 그 땅에 산 지 10년쯤 되었을 때 모압 여성과 국제 결혼한 두 아들마저 야속하게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과부들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축복하여 그 땅에 풍년이 들게 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두 며느리와 함께 모압 땅을 떠나기로 작정합니다. 그런데 두 며느리 중 하나는 자기 친정으로 돌아가고 룻만이 한사코 “(룻1:16)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고,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라.” 며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이들이 베들레헴에 이르자, 온 마을이 떠들썩한 가운데 아낙네들이 ‘이게 정말 나오미인가?’ 하고 반깁니다. 

그러나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지들 마십시오.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몹시도 괴롭게 하셨으니, 이제는 나를 마라라고 부르십시오. 나는 풍족하게 이 곳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를 텅 비어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주께서 나를 치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불행하게 하셨는데, 이제 나를 나오미라고 부를 까닭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나마 돌아온 나오미에게 상상할 수 없는 축복으로 섭리하셨습니다. 나오미의 며느리 룻으로 하여금 나오미의 유력한 친족 보아스를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보아스가 룻에게 (룻2:11-12) “댁은 남편을 잃은 뒤에도, 시어머니를 극진히 섬겼다는 사실을 자세히 들어서 다 알고 있소. 댁은 친정 부모, 정든 고향을 떠나, 낯설고 물 설은 타향 이곳으로 단지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섬기고자 따라오지 않았소? 댁이 한 일은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오. 이제, 댁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날개 밑으로 보호를 받으러 왔으니, 그분께서 댁에게 넉넉히 갚아 주실 것이오.” 라며 마침내 룻을 아내로 맞게 됩니다. 그리고 그 보아스를 통해 아들을 낳게 됩니다. 

이에 동네 여인들이 “(룻4:14-15)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주께서는 오늘 이 집에 자손을 주셔서, 대가 끊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시어머니를 사랑하는 며느리, 아들 일곱보다도 더 나은 며느리가 아기를 낳아 주었으니,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며 축하합니다. 

그리고 이름까지 지어주었습니다. “오벳”이라고.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이 “오벳”이 바로 이새의 아버지요, 다윗의 할아버지입니다.(룻4:14-22)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라.’ 며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에 온 이방 여인 룻이 다윗 왕의 고조 할머니가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조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생이 그 시작을 실패했을지라도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면’, 다시 말해 약속의 말씀 가운데 거하면 반드시 그 마지막을 축복으로 인도하십니다. 인생의 알파와 오메가를 축복으로 인도하십니다.  


3. 한 해를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 것과 어떻게 마쳐야 하는가는 인생에 있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하듯이 시작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7절)는 말씀은 그 시작보다는 그 마침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욥의 친구 빌닷의 충고입니다. 이에 앞서 욥의 또 다른 친구 엘리바스가 욥이 하나님의 징계를 겸손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비방합니다. 그리고 이어 빌닷은 욥이 하나님의 공의를 모독한다고 책망합니다.

(욥8:3) 너는, 하나님이 심판을 잘못하신다고 생각하느냐? 전능하신 분께서 공의를 거짓으로 판단하신다고 생각하느냐?

욥에 대한 친구들의 이러한 비방과 책망은 욥이 당한 모든 재난이 욥의 범죄 때문이라는 주장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이 자신의 범죄 행각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불평하는 것은 하나님이 불의하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어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악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욥이 고난당한 것은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욥과 그 자녀들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그같은 엄청난 재난을 당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회개하고 새 출발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지금 네 시작은 미약할지라도 나중을 심히 창대하게 축복해 주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욥의 시작은 미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욥은 본래 당대 동방에 으뜸가는 부자인 데다 신앙도 좋고 많은 자녀를 둔 유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그 소생은 남자가 일곱이요 여자가 셋이며 그 소유물은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욥1:1-3) 그런 욥에게 엄청난 재난이 닥쳐왔습니다. 

하루 아침에 모든 가축을 약탈당하고 종들이 살해되었습니다. 자녀들이 갑자기 몰아치는 대풍에 집이 무너져 한 순간 다 압사 당했습니다. 자신의 몸은 아주 몹쓸 병에 걸렸습니다. 아내는 욥이 그 지경에 되었으면서도 “(욥1:21)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자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는 폭언을 퍼붓고 가출해버렸습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욥이 가장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은 다 가져가시고 가장 싫어했던 하나를 남겨 두셨는데 그것은 욥의 아내였다.’ 이런 욥의 소식을 들은 세 친구가 위로 차 달려 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욥의 형편을 보니까 무슨 말을 할지 몰랐습니다. 그냥 아무 말도 못하고 일주일을 같이 앉아 있었습니다. 

(욥2:12-13)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칠일 칠야를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곤고함이 심함을 보는 고로 그에게 한 말도 하는 자가 없었더라.

일주일이 지나자 드디어 욥이 입을 열었습니다. 자기 생일을 저주하면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탄식했습니다. 이에 세 친구들은 이러한 욥의 불평은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것임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욥은 지나 온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 분명히 뭔가 불공평한 재앙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해서 욥과 세 친구의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욥은 누구 못지않게 깨끗하고 정직하게, 그리고 가장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으로 살았는데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엄청난 재앙을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세 친구는 종두득두(種豆得豆), 콩 심은 데 콩 나는 법이듯이 욥의 재앙은 욥이나 자식들의 죄악에 대한 형벌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 가운데 본문 빌닷의 충고가 나왔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5-7절) 

무조건 시작은 작아도 나중은 잘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부지런히 하나님을 찾아 정직하게 회개하여 깨끗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재난을 당했다면 그것은 분명 욥의 죄라는 것, 자녀들이 한 순간에 압사 당한 것 역시 자녀들이 부모 모르는 죄를 범했다는 것, 그 많은 재산이 하루아침에 날아간 것도 마찬가지로 욥의 숨은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욥과 그 가족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 진실되고 의롭게 살았다면 어찌 그러한 재난을 당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회개한다면 그 시작이 미약할지라도 나중에는 심히 창대해지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말은 진심어린 충고나 위로라기보다는 말을 돌려 욥의 처지를 비난하는 것입니다. 욥의 ‘시작’을 재앙에 초점을 맞추어 부정해버리는 것입니다. 욥의 ‘시작’보다는 재앙을 그 ‘마지막’으로 보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욥은 자신의 깨끗함과 선함, 그리고 신실한 믿음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욥기 29:14-17입니다. 

(욥29:14-17) 나는 늘 정의를 실천하고, 매사를 공평하게 처리하였다. 나는 앞을 못 보는 이에게는 눈이 되어 주고, 발을 저는 이에게는 발이 되어 주었다. 궁핍한 사람들에게는 아버지가 되어 주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하소연도 살펴보고서 처리해 주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의 턱뼈를 으스러뜨리고, 그들에게 희생당하는 사람들을 빼내어 주었다. 

욥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다.’며 세상 사람들에게 결코 지탄받을 일을 행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욥기 31장입니다. 

(욥31:1-40) 내가 처녀를 정욕의 눈으로 본 적이 없도다. 내가 만일 그렇게 한다면 위에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나는 거짓말을 한 적도 없고 다른 사람을 속인 일도 없다. 만일 하나님이 나를 정직한 저울에 달아 보시면 나의 진실을 아실 것이다. 내가 만일 어떤 여자에게 마음이 끌려서 그녀의 문 밖에 숨어 그녀를 엿본 적이 있다면 내 아내가 다른 사람의 집에서 맷돌질을 하고 다른 사람의 침실에서 잠을 자도 마땅하다. 내 종들이 나에게 불만을 말할 때에도 나는 그들의 말을 듣고 그들에게 정당한 대우를 해 주었다. 나를 만드신 하나님은 내 종들도 만드신 분이시다. 나는 가난한 자의 소원을 거절하거나 과부를 실망시킨 적이 없으며 나는 배불리 먹으면서 불쌍한 고아를 굶겨 본 적도 없다. 사실 나는 젊었을 때부터 고아들을 친자식처럼 돌보아 주었고 과부들을 보살펴 주었다. 나는 돈을 신뢰하거나 재산이 많다고 기뻐한 적이 없으며....나는 나를 미워하는 자가 망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거나 재앙을 만나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 흐뭇한 표정을 지어 본 적도 없다. 나는 나그네를 길거리에 자게 한 일이 없으며 길 가는 사람들을 위해 내 집 문을 항상 열어 두었다. 누구든지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내가 하는 변명에는 조금도 거짓이 없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말에 대답해 주시기를 원하고 있다. 내가 만일 값을 지불하지 않고 그 농산물을 먹거나 소작인들을 굶어 죽게 한 일이 있다면 그 땅에 밀 대신 찔레가 나고 보리 대신 잡초가 나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근래 들어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의 대명사로 경주 최부자집이 손꼽히고 있습니다. 12대를 걸쳐 400년을 쌓아온 부와 명성에 걸맞게 그들 가문이 사회에 베푼 선행은 이 시대에도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진정한 부자의 의미를 깨우치는 그의 6훈에서 최 부자의 삶의 철학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고, 
둘째 재산은 만석 이상 지니지 말라. 
셋째, 과객은 후하게 대접하라. 
넷째, 흉년에는 땅을 사지마라. 
다섯째, 며느리는 3년간 시집온 후 무명 옷을 입으라. 
여섯째,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등입니다. 

그러나 욥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최부자를 몇 배 능가하는 수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욥이 왜 이 엄청난 재앙을 당해야 합니까? 이 재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시128:1-5)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과연 이 말씀대로 되는 것이 사실입니까? 오히려 하나님과 거리가 먼 사람들, 별반 노력하지 않은 사람들, 잘 되어서는 안된다고 누구나 공감이 가는 그런 사람들이 결과가 좋다면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그러나 현재의 고난당하는 모습만을 보고 욥의 과거를 판단하거나, 그의 미래까지 섣불리 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욥의 인생을 현재의 모습만을 가지고 그의 과거와 미래까지 싸잡아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하나님께서”(계 1:4) 

욥의 지난 날의 삶을 아시고 현재의 고난을 품으시고 그의 미래를 준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욥의 친구들이 잘못한 것이 바로 욥의 재앙에만 쌍심지를 켜고 들여다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 전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순전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욥의 인생은 ‘그 시작과 마침’이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욥 인생의 ‘마침’을 보겠습니다. 

(욥42:12-17) 주께서 욥의 말년에 이전보다 더 많은 복을 주셔서, 욥이, 양을 만 사천 마리, 낙타를 육천 마리, 소를 천 겨리, 나귀를 천 마리나 거느리게 하셨다. 그리고 그는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다. 첫째 딸은 여미마, 둘째 딸은 긋시아,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고 불렀다. 땅 위의 어디에서도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 더욱이 그들의 아버지는, 오라비들에게 준 것과 똑같이, 딸들에게도 유산을 물려주었다. 그 뒤에 욥은 백사십 년을 살면서, 그의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다. 욥은 이렇게 오래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한 마디로 갑절 이상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욥의 딸들은 “땅 위의 어디에서도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 다른 말로 세 딸들이 모두 ‘미스 유니버스’(Miss Universe) 진선미를 독차지 했다는 말입니다. 건강 회복은 물론 140년을 더 사는 장수의 축복을 받아 자손 사대를 보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는 욥 인생의 ‘오메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들고 어려워도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아온 지난 한 해의 삶은 모두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모두 기억하고 계십니다. 현재의 모습으로 미래를 평가하거나, 미래에 대해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이 믿음으로 살고자 애썼던 마음, 어떻게 해서든 말씀대로 살고자 몸부림쳤던 일들, 하나님 뜻대로 살고자 자신에게 유익되었던 것들을 아낌없이 포기하고 버렸던 일들,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경배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했던 그 모든 예배와 기도와 봉사를 ‘전에도 계시고 지금도 계시며 장차 오실 하나님께서’ 기억하고 계십니다. 성도 여러분의 삶의 ‘오메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모두 기억하고 계십니다. ‘장차 오실 하나님’께서 새 해, 내년에도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6)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고난이나 역경을 천대까지 길게 볼 때는 그 고난이나 역경이 축복으로 가는 한 과정인 것입니다. 천대를 바라볼 때 “(롬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의 삶에 ‘알파와 오메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몫이고 그 ‘알파와 오메가’ 사이, 현재는 성도 여러분의 몫입니다. 욥과 같이 현재의 모습이 어떠하다 할지라도 인내의 믿음으로 항상 말씀 가운데 거하는 삶으로 욥의 ‘오메가’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고 했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로 해 그림자가 뒤로 10도나 물러가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지난 삶, ‘마음을 다하여 주를 성실하게 섬긴 일과 주 앞에서 선하게 살려고 했던 것’들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2010년 지난 한 해 동안 성도 여러분이 ‘마음을 다하여 주를 성실하게 섬긴 일과 주 앞에서 선하게 살려고 했던 것’들을 하나님께서 모두 기억하시고, 그리고 현재의 모든 아픔을 가슴에 품으시고 여러분의 ‘마침’, ‘오메가’의 축복을 하나님께서 준비하고 계십니다. 2011년 앞두고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하나님”,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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