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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라 (약 2: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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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함으로 믿음을 보이라 (약 2:14-26)


개신교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바로 sola fide(솔라 휘데)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라는 말인데, 이 말이 왜 나왔냐면 믿음만 가지고는 안 된다고 하는 잘못된 가르침 때문이었습니다. 그럼 믿음만 가지고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믿음과 행위가 함께 있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카톨릭입니다. 그래서 뭐가 나오는가 하면 성자(聖者)가 나옵니다. 성자! 이것의 신학적 가치가 뭐냐면, 이 사람들은 구원받고도 남을 만큼의 공덕, 즉 선한 일을 많이 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성자의 위를 추존합니다. 

그 전제는 ‘잉여 공덕설’입니다. 공덕이 무엇입니까? 공덕을 쌓아 구원을 받는데, 이 분은 천당 가고도 남을 만큼 공로가 남아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을 많이 세워 두면 세상에 있는 죄인들, 선행이 부족한 사람들이 그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 남은 잉여 공덕이 성자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로 전가된단 말입니다. 잉여 공덕이 즉 ‘계좌 이체’가 된단 말입니다. 이래서 성자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자가 많은 것이 좋을까요, 적은 것이 좋을까요? 뭐가 좋겠습니까? 많아야 좋을 것 아닙니까?

여기서 얻어오고 저기서 얻어오면 되니까! 자, 그러면 누가 성자인지 결정은 누가 하느냐 하면 사람이 하는 거지요. 이 사람은 천당 가고도 남는다고 사람이 판단하는 겁니다. 기준을 누가 정해요? 인간이 정합니다. 이것이 모순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모순적인 얘긴데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말하면 꼴딱 넘어갑니다. 인간은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쉽게 이해를 합니다. 이해가 쉽습니다. 그리고 통제도 쉬워요. “너, 그따위로 하면 천당 못 가!” 이러면 꼼짝 못하는 거지요. 교리가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말을 잘 듣지요. 육체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이해하면 이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절대로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잘 알아두어야 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요한복음 1장 12절은 기록합니다. 또한 에베소서 2:8~9예서는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야고보를 통하여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얼핏 보면 행함이 없이는 구원도 받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어떻게 산 믿음도 아닌 죽은 믿음을 가지고 구원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사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7:21~23을 통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많은 역사를 이루었다고 해도 아버지 하나님의 듯대로 행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으니 그렇다면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맞는 것처럼 들립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마지막 심판의 때를 설명하시면서도 오른편에는 양을 왼편에는 염소를 구분하여 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십니까?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결국 여기서도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베푼 행위가 강조가 되고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께서 요 5:24에서 말씀하시길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서는 행위를 통한 구원을 말씀하시고 또 어디서는 믿음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도대체 기준이 무엇이냐 물을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백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는다면 동시에 입으로 시인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입으로 시인하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는다면 당연히 시인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과 행함은 어떤 연관성이 있습니까?
아마 이런 이야기를 여러분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줄타기 선수 불론딘(Blondine)의 이야기입니다. 블론딘이 나이아가라폭포 위에 줄을 매고 줄을 타게 되었습니다. 미국 쪽에서 캐나다 쪽으로 먼저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는 줄을 타기 전에 운집한 군중에게 확성기를 통해서 소리쳤습니다. “제가 이 장대 하나만 들고 이쪽에서 저 캐나다 쪽으로 건널 수 있다고 믿습니까?” 그때 많은 관중은 입을 모아 “믿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정말 나이아가라폭포 위에 맨 줄을 막대 하나만 들고 건넜습니다. 사람들은 손에 땀을 쥐고 아슬아슬한 스릴을 느끼면서 지켜보다가 블론딘이 성공하자 우레 같은 박수로 환호했습니다. 이번에는 캐나다 쪽에서 미국 쪽으로 건너가려 하면서 또 물었습니다. “여러분, 여기 조그만 손수레가 있습니다. 이 수레를 제 몸에 걸고 건너려고 하는데 성공하리라 믿습니까?” 관중들은 “믿고말고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드디어 블론딘은 그의 몸에 수레를 걸고 장대를 들고 아슬아슬하게 건너는 데 성공했습니다. 관중들은 흥분해서 수건을 던지고 모자를 벗어 던지며 대환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주 엄청난 질문을 했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성원으로 나이아가라폭포 위를 줄을 타고 건너는 일에 성공하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마지막으로 제 등 뒤의 손수레에 사람을 태우고 건너가려 합니다. 성공하리라 믿습니까?” 그랬더니 두 번씩이나 성공한 그가 이번에도 성공할 것을 믿고 모든 관중은 박수를 치면서 “네, 믿습니다”라고 응답했습니다. 그러자 블론딘이 관중 속에 용감해 보이는 한 청년에게 가서 “자, 타십시오” 했더니, 그 청년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면서 “아니오, 아니오” 하면서 달아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믿는다면 자기를 내어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참 믿음입니다. 성경은 의지의 결단이 없는 지식만의 믿음, 감정만의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구원에 있어서 행함을 이야기하는 것은 행함이 구원의 전제조건이라는 뜻이 아님을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무엇이 믿음이냐 하면 이 음식이 내게 해가 되지 않는다고 믿는다면 당연히 그 음식을 먹어야 그것이 참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고 하신 이유는 말로는 믿는다고 하는데 사실은 전혀 믿음이 아닌 가짜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예수님께서 주셨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보았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형제나 자매야말로 지극히 작은 자입니다. 아주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그들에게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무엇을 베푼다고 해도 그들에게서 어떤 대가를 기대한다고 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 정말 보잘것없는 사람이 헐벗고 일용할 양식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밤을 지새워야 하는 사람입니다. 헐벗었고 먹은 것이 없으니 더 춥고 배고플 것입니다. 무슨 잠이 오겠습니까? 그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 있겠어요? 바로 좋은 것은 아닐지라도 그들이 몸에 걸칠 것을 주고 무언가 허기를 면할 수 있는 것을 줄 때 그것이 참다운 사랑의 실천이 아니겠습니까? 

묻습니다. 우리가 믿는바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심을 믿습니까? 그리고 그 하나님이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시는 라파 하나님이 되심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고치지 못할 병이 있습니까? 당연히 없죠. 그러면 뭐가 믿음이냐 하면 내가 병들었거나 누가 병들었다고 할 때 염려할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해야 그것이 진짜 믿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말로는 하나님이 라파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정작 내가 어디 아프다 아이가 무슨 문제가 있다고 하면 걱정을 하면서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고 있다면 그것이 무슨 믿음이라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가리켜서 지식적인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건 단지 아는 것에 불과할 뿐이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유명한 랍비 한 사람이 하루는 학교에서 자기 제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답니다. “너희가 만일 길을 가다가 금덩이를 주웠다고 하자. 그러면 너는 그 금덩이를 어떻게 하겠느냐?” 그랬더니 한 학생이, “저는 주인을 찾아 돌려주겠습니다.” 랍비는 그 말을 듣더니, “넌 틀렸다” 했습니다. 두 번째 학생이, ‘선생님은 아마 솔직한 대답을 원하시는가보다’ 생각하여 “저는요. 그 순간 나에게 주시는 것으로 받고 그것을 제가 갖겠습니다.” 그러자 랍비는, “넌 도둑놈이다” 그랬습니다. 셋째 학생은, “저는 금덩이를 주우면 그 순간 하나님의 자비에 맡기겠습니다. 욕심을 이기는 마음, 찾아주고자 하는 마음, 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듣고 랍비는 “네 말이 맞다”라고 칭찬했답니다.

여러분, 선한 일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어림없습니다.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시고 감당할 힘을 주실 때만 선한 일도 하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반응하여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주게 되어 있는데, 이걸 ‘내가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힘주셔서 이 일을 한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이것을 통하여 구원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보답 받으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미 받은 은혜가 너무 많아서 빚진 자의 마음으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랑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렇게 선을 행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인 것, 그렇게 할 수 있는 이 마음 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부족한 마음으로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깨끗한 사랑이고 진정한 행위가 되는 것이요, 이것만이 사람을 감동시키고, 이것만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선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만이 하나님께 받을 우리의 상급입니다. 

처음에는 헐벗고 굶주린 사람을 보면서 무언가 좀 걸치지 그러냐 뭘 좀 먹지 그러냐고 말만하고 끝날 수 있지만 진짜 믿음의 사람은 마음이 불편해서 견디지를 못합니다. 아니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내 마음에 자꾸 도전합니다. 뭐 누군가가 저를 돕겠지 하다가도 결국은 견디지를 못하고 가서 작은 것 하나라도 건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임을 우리는 믿습니다. 보십시오. 어찌 보면 내 자식만큼이나 소중한 목장의 소 돼지들을 구제역으로 인해서 땅에 매몰 처분하는 그 심정을 아십니까? 정말 눈 뜨고는 못 볼 광경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소중한 자식 같은 놈들이라고 해도 구제역이 왔다 하면 생매장을 해야 합니다. 아무리 이건 내건데 안 된다고 해도 안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또 깨닫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것 가운데 내 것은 없다 단지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정말 믿는다면 내게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이 내게 잘 관리하도록 맡겨주신 것이요 그 주인은 하나님이시라고 믿는다면 당연히 주인의 것을 가지고 주인이 하라고 하는 대로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주인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얻은 소득의 십분의 일과 거기에 더하여 헌물을 반드시 내게 돌려라 그러면 내가 더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겠고 기한 전에 열매가 떨어지지도 않고 소출이 해를 당하지도 않게 하겠다고 했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연히 그 주인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요 내게 더하여주시는 모든 것에 대해 더 감사하며 이웃과 함께 나누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럴 때 하나님이 더욱 부하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자식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자식조차도 내 자식 이전에 하나님의 자식임을 믿는다면 그 자식으로 인해서 염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일에 있어서 주님의 주되심을 고백하면 됩니다. 주님이 주인이시라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묻겠죠. 나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 여쭙습니다. 이럴 때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리고는 고백합니다. 이 자식이 내 자식 이전의 주님의 자식임을 믿습니다. 

그의 가는 길을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세요. 보혜사 성령님이 그와도 함께 계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는 더 이상 염려에 매이지 않는 것 이것이 참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참 믿음은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씨앗이 살아있는지는 땅에 심어보면 압니다. 살아있는 씨 생명이 있는 씨는 땅에 심으면 싹이 나서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기억하십시오. 귀신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니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구주가 되심을 알 알고 믿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귀신들도 믿고 떤다고 했습니다. 귀신도 하나님이 만왕의 왕이심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온 세상의 구주가 되심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를 자기의 주인으로 영접하지를 않습니다. 자기의 주인도 되신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아요.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합니다. 이게 바로 가짜 믿음입니다. 이게 바로 죽은 믿음이란 말이에요. 그리고는 예수를 대적하려고 덤벼듭니다. 시험하려고 합니다. 귀신들린 자에게 명령하니 귀신이 나가며 귀신 들렸던 자로 크게 몸부림치게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그저 몸부림만 쳤을 뿐 귀신은 주님의 명령 앞에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몸부림이 두렵습니까? 그저 몸부림은 몸부림일 뿐 결과적으로 귀신은 나가지 않을 방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인이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더 강한 자가 명령하셨습니다. 왜 나만 가지고 그러느냐고 몸부림을 쳐보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것을 믿는다면 더 이상 귀신들린 사람이라고 해서 또는 귀신이 덤벼든다고 해서 우리가 두려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냥 주님께 맡기면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명령하면 됩니다. 그러면 나와 함께 하신 성령 하나님께서 처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의 대명사가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할 때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믿음이 뭐냐 하면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100세가 되어서 믿음 안에서 얻은 아들이 이삭입니다. 처음 하나님이 네 아내 사라를 통해서 아들을 얻게 하시겠다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었다고 했습니다. 어처구니가 뭡니까? 맷돌을 돌리는데 쓰리는 손잡이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맷돌을 돌리지를 못합니다. 

따라서 갈 수가 없죠. 그러니까 어처구니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란 바로 그런 뜻입니다. 아니 의학적으로는 이미 끝난 몸입니다. 그런데 아들을 낳는다고요? 그러니 웃죠. 그랬더니 하나님이 진짜로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네 몸에서 날 자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라고 하십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이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낳은 아들이 이삭인데 그런 이삭을 어느 날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곳으로 데려가 거기서 제물로 드리라고 하십니다. 이삭이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삭을 주시면서 그 이삭을 통해 이 땅에 자녀 손들이 세루 수 없이 많은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 같이 많게 하리라고 하셨던 바로 그 아들입니다. 그런데 이삭을 제물로 드리면 그 약속은 어떻게 됩니까? 그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 이삭을 제물로 드려도 다시 살리실 것으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을 들어 이삭을 죽이려고 할 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스톱 이제 되었다 네가 진짜로 나를 믿는 것을 이제 알았다. 그러니까 드러난 모습은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고 했던 행동이지만 사실은 그 밑바탕에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께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행함이라는 것은 믿음으로 행함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는 것은 결국 우리의 행함은 믿음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기생 라합도 여리고 성을 정탐하던 두 사람을 숨겨주는데 그때 그가 고백한 것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당연히 라합은 자기가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숨겨준 것 같이 그들이 자기와 자기의 모든 가족들을 살려줄 줄로 믿었습니다. 그 결과 그와 그 집에 속한 모든 자가 다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하지만 이를 믿지 못한다면 과연 그렇게 목숨을 걸고 정탐꾼들을 숨겨줄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참 믿음은 순종하여 섬김이요 순종하여 드림이요 순종하여 나눔이며 순종하여 베풂입니다. 아브라함이 순종함으로 그 믿음을 보였고 그 결과 복을 받은 것처럼 우리 역시 아브라함과 같이 순종하여 믿음으로 나아갈 때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순종하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프리카에 있는 한 추장에게 외동딸이 있었는데, 한 무당이 그들 종족이 신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추장의 외동딸을 산채로 땅에 묻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추장은 자기의 외동딸이기는 하지만 그들 종족 모두를 위하는 일이기 때문에 마다할 수가 없어서 마지못해 허락을 했습니다. 제삿날이 되어 그들 종족이 모두 모여 있는 가운데 구덩이가 파여지고, 추장이 딸을 그 구덩이에 넣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딸을 안아 내리는데, 그 딸이 “아버지, 잠깐만 기다려요, 아버지 수염에 흙이 묻었어요.” 하면서 추장의 수염에 묻은 흙을 털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죽을 줄을 알면서도 아버지 수염에 묻은 흙을 털어주는 딸을 보자, 추장은 그만 구덩이 밑으로 내리려던 딸을 끌어 올려서 두 팔로 가슴에 꽉 껴안고 둘러선 사람들에게 “이 딸을 잃어버리고는 난 살 수 없소, 추장도 그만두고 이 마을을 떠날 테니 내게서 딸을 빼앗을 생각일랑 마시오.” 하고는 그 길로 가족과 함께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고 합니다.

백세에 귀하게 얻은 독자 아들을 번제물로 드려야 되는 아브라함은 추장과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번제에 쓰일 나무를 지게하고 자신은 불과 칼을 들고서 모리아산으로 올라갑니다. 얼마쯤 올라가던 아들이 뒤를 돌아보면서 “아버지, 나무와 불은 여기 있지만 번제로 드릴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자리에서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얘야, 번제 할 제물은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신단다.” 산꼭대기까지 올라간 아브라함은 아들과 함께 제단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제단이 완성되자 아브라함은 아들을 준비한 끈으로 묶기 시작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온 몸에서는 진땀이 흐르고 눈에는 눈물이 흘렀을 것입니다.

그가 칼을 높이 들고 막 내리치려는 순간에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가 칼을 멈춰라. 네가 네 외아들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정말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큰 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인간으로서 보여 줄 수 있는 최고의 믿음을 행함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네게 믿음이 있느냐, 너는 행함으로 네 믿음을 내게 보여다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복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외침입니다. 무엇이 믿음입니까? 순종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함으로 섬기고 순종함으로 드리고 순종함으로 나누고 순종함으로 베푸는 귀한 믿음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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