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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숙한 사랑의 특성 4 (고전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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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사랑의 특성 4 (고전 13:4-7) 
 
 
❚참 이상합니다

두 아들을 키우면서 아이들에게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 이겁니다. “쟤 때문이에요. 쟤가 먼저 그랬어요.” 둘이 싸워서 야단을 치면 형은 동생 때문이랍니다. 동생이 말 안 듣고 건방지게 굴어 싸움이 났답니다. 거꾸로 동생은 형 때문이랍니다. 형이 먼저 시비를 걸어 싸움이 난 건데 억울하답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 만날 “너 때문”이라고 싸우던 녀석들이 신기하게도 좀 크니까 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철이 들어서 그런지 항상 사로 책임을 미루던 녀석들이 조금씩 서로 이해하고 품어주게 되자 싸움도 적게 하고 형제간에 우애도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이래야 합니다. 이게 정상입니다. 어릴 때, 철없을 때에야 서로 너 때문이라고 탓하며 싸울 수도 있지만 이제 나이 먹고 철들면 상대방을 이해하고 품어주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나이깨나 먹었는데도 여전히 너 때문이라고 싸우면 이유가 뭘까요? 그야 당연히 철이 안 들어서 그렇지요. 나이 먹어도 성숙하지 못하고 여전히 미숙한 어린아이처럼 굴기 때문이지요.

교회 안에서도 똑같습니다. 교회 처음 다닐 때, 성숙하지 못할 때야 그럴 수도 있지만 여러 해 신앙생활 했는데도 여전히 내 입에서 “저 사람 때문에, 당신 때문에” 소리가 늘 나온다면 나는 누가 뭐래도 아직 간난아이입니다. 아직 미성숙한 성도입니다. 목회하다보면 교회 안에서 성도들끼리 갈등이 생기거나 다툼이 생기기도 합니다. 상처를 주고받는 일도 종종 생깁니다. 

그런데 양쪽 이야기를 들어보면 신기하게도 우리 애들 어렸을 때 늘 하던 말들을 똑같이 하십니다. 멀쩡한 어른들이, 나이 살이나 드신 분들이, 집안에서는 어른이고 세상에서도 존경 받는 분들이 꼭 어린아이 같은 말들을 하십니다. 심지어 교회 오래 다니고 직분도 가진 분들이 말입니다. 어떤 말일까요? “저 사람 때문이에요. 저 사람이 먼저 그랬어요.” 신기하게도 우리 애들 어렸을 때와 똑같은 말들을 하십니다. 도대체 원인이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오늘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에서 그 원인을 이렇게 분명히 말합니다. 그건 아직 그 사람들이 어린아이기 때문이다. 아직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교회 오래 다니고, 직분도 얻고, 각종 은사도 풍성하게 받았지만 여전히 어린아이 같은 신앙수준이기 때문이다. 갑도 을도 다 똑같다는 것입니다. 누가 잘못하고 잘못 안하고가 없이 일단 싸우고 갈등을 일으키고 분쟁이 일어나면 양쪽 다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똑같이 어린아이요. 똑같이 미숙한 성도요. 

둘 중에 한 사람만 성숙하면 싸움을 거는 사람은 있어도 싸움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그들이 ‘성숙한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이게 답입니다. 오늘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계속해서 사랑장이 말하는 성숙한 사랑의 특성 열 번째부터 마지막 열다섯 번째 특징까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랑의 속성

성숙한 사랑의 열 번째 특징,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불의’(不義)가 뭡니까? 의롭지 못한 것입니다. 부정한 것, 즉 죄(罪)입니다. 그러므로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말은 죄에 대해 엄격하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뭐든지 대충 넘어가 주는 것으로 아는 분이 많습니다. 사랑하면 다 용서하고, 덮어주고, 다 넘어가 주는 것인지 압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진짜 사랑한다면 불의를 기뻐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우선 자기 자신의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죄에 대해 엄격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5장 1절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안에 일어난 음란한 일에 대해 지적합니다. 고린도라는 도시가 워낙 타락하고 음란하다보니 교인들 중에 성적으로 타락한 사람이 많았는데 심지어 자기 계모와 함께 사는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바울은 2절에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언급하면서 “어찌하여 이런 죄를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고 책망합니다. 

혹시 “교회라는 곳이 사랑으로 다 품어주고 이해해줘야지 정죄하고 쫓아내면 되겠냐?”고 오히려 따지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건 다릅니다. 죄에 대해서는 분명히 지적해야 합니다. 특히 그 죄가 전염성이 강해 교회 공동체를 어지럽히고 죄로 물들게 만들 위험이 있을 때는 더 엄격하게 잘라내야 합니다. 죄를 짓고도 “그럴 수도 있지 뭐” 하거나 “나 같은 사람도 받아줘야지” 하고 자기합리화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덮어주고 용서하는 것이 사랑이냐? 아닙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고 죄는 죄라고 지적해야 합니다. 그래야 죄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 사람의 죄를 모른 척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해결하도록, 불의에서 벗어나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함께 아파하며 팔과 다리를 끊는 아픔으로 함께 죄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자세입니다.

성숙한 사랑의 열한 번째 특징,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정말 기뻐해야 할 때 기뻐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여기서 ‘진리’란 본질적인 것을 뜻합니다. 정말 중요한 일을 위해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내 작은 욕심이 채워졌다고 기뻐하고, 썩어질 세상의 것으로 인해 기뻐하지 말고 하나님의 진리가 선포되고 성취됨을 인해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불신 남편을 위해 수십 년 동안 기도하다가 최근에 남편이 예수 믿고 구원 받게 된 부인이 있습니다. 그토록 교회 좀 가자고 수십 년 동안 애원해도 교회 안 나오고 버티더니 한 번 믿기 시작하니까 이 남편분이 이제는 꽤 오래 믿은 분처럼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교회생활도 좋아합니다. 이 부인이 하는 말씀이 “목사님, 요즘 제 남편이 세상에서 제일 예뻐요” 합니다. 실은 예전에 남편이 돈도 잘 벌어다주고 사모님 소리 들으며 잘 살았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그때에 비해 돈도 없고 살림도 빠듯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돈도 잘 벌어다주고 호강시켜 줄 때보다 남편이 지금 훨씬 더 예쁘답니다. 남편이 예수 믿고 구원 받고 함께 교회 다니며 신앙생활 하는 것이 가장 귀한 일이고 소중한 일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돈 잘 벌어다주는 남편, 출세한 남편, 나한테 사모님 소리 듣게 해준 남편보다 예수 믿고 구원 받아 신앙생활 잘 하는 남편이 더 귀하고 그것이 더 기쁜 일인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내가 저 사람을 위해 정말 해주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노력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순간적인 쾌락이나 썩어질 세상의 것들로 채워주는 것보다 저 사람의 영혼을 위해, 영원한 생명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을 선물하려는 태도가 바로 진정한 사랑인 것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구원을 가장 기뻐하는 태도입니다.

성숙한 사랑의 열두 번째 특징, 사랑은 모든 것을 참습니다. 여기서 ‘참는다’는 말은 인간관계에서의 인내를 뜻합니다. 이 말이 헬라어로 ‘스테고’인데 “...로 덮어준다”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cover입니다. 덮어주는 것이지요. 진정한 사랑은 남의 허물과 실수를 덮어주는 것입니다. 진짜 성숙한 성도는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관대해야 합니다. 

그런데 남에게는 엄청나게 엄격해서 함부로 판단하고 비난하면서 거꾸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도들 중에도 말입니다. 그래서 남이 조금만 실수하거나 잘못하면 마구 비판하다가도 자신의 실수나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그럴 수도 있지” 합니다. 이것은 성숙의 반대말, 아주 미숙하고 간난아이와 같은 태도입니다.

이 말은 앞서 살펴본 사랑의 첫 번째 특징, “사랑은 오래 참고”와 비슷한 뜻입니다. 하지만 앞서 오래 참는 것은 그저 남의 허물을 참고 견뎌주는 것이지만, 여기 나온 “모든 것을 덮어준다”는 말은 훨씬 더 적극적인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그냥 덮어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책임을 같이 져주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남의 허물과 연약함을 덮어주느라 내가 손해 볼 수도 있고, 내가 대신 덮어쓸 수도 있는데 그런 것까지 감수하겠다는 태도인 것입니다. 누구처럼? 예수님처럼. 베드로전서 2장 2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주님이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 죽을 사람은 우리고 벌 받을 사람도 우리인데 왜 우리 죄인을 위해 대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까? 왜 대신 벌 받고 대신 채찍 맞으셨습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을 우리도 함께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6장 2절에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가 성숙한 사랑을 가진 사람이라면 기꺼이 서로를 위해 짐도 지고, 손해도 보라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만 있으면 인간관계에 있어 모든 복잡한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성숙한 사랑의 열세 번째 특징, 사랑은 모든 것을 믿습니다. 이 말을 우리말로 이렇게 번역하면 훨씬 이해하기 쉽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어줍니다.” 비슷한 말처럼 들리지만 ‘믿는 것’과 ‘믿어주는 것’은 정말 다릅니다. ‘믿는 것’은 뭔가 믿을 만한 근거가 있어서, 믿을 만한 구석이 있으니까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어주는 것’은 의지입니다. 근거도 없고 믿어줄만한 구석이 눈곱만큼도 없지만 내 의지로 그냥 믿어주는 것입니다.

늘 사고만치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말썽만 부리는 통에 모든 사람이 손가락질 하고 “저 놈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 합니다. 그런데 끝까지 이런 아들을 믿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어머니입니다. 누가 뭐래든 “우리 아들 언젠가 잘 될 거”라 합니다. 다들 쟤는 안 된다, 포기하라는데 끝까지 믿어줍니다. 왜 그러실까요? 몰라서 그럴까요? 어머니도 압니다. 자기 아들이 얼마나 말썽꾸러기 문제아인지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런데 알면서도 믿어주는 겁니다. 왜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 이 사랑이 있으셨기 때문에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 이런 끝까지 믿어주고 참아주는 사랑이 없으셨다면 벌써 우리를 포기하셨을 것입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날마다 동구 밖에 나가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린 것은 포기하지 않고 언젠가 돌아올 것이라 믿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랬더니 결국 돌아오지 않습니까? 이 아버지가 하나님이라면 탕자는 바로 우리 아닙니까? 탕자요 죄인의 괴수지만 끝까지 믿어주고 기다려준 아버지가 계셔서 우리가 돌아온 것 아닙니까?

우리가 만약 이 어머니 같은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 같은 사랑이 있다면, 그래서 저 사람 안 되는 줄 알지만, 못 고치는 줄 알지만, 번번이 나를 실망시키고 힘들게 하는 것 다 알지만 그래도 믿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주면 그 다음은 하나님이 해주십니다. 하나님이 마음먹으시면 아무리 희망 없는 녀석이라도, 패륜아라도, 남들은 다 불가능하다고 해도 고쳐주십니다. 바꾸십니다. 이 사실을 믿고 끝까지 믿어주는 것이 바로 성숙한 사랑인 것입니다.

성숙한 사랑의 열네 번째 특징,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랍니다. 여기서 ‘바란다’는 말은 희망을 가진다는 뜻입니다. 사랑하기에 희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환난과 어려움을 당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믿으면 희망도 버리지 않고 모든 것을 바라게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기에 참아주고, 사랑하기에 믿어주고, 사랑하기에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붙드는 것입니다. “저 사람, 언젠가는 돌아올 거야. 언젠가는 바뀔 거야.” 이게 희망 아닙니까? 도저히 안 되겠습니까? 희망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싶습니까? “저 인간은 안 돼, 가능성이 없어”라고 생각되십니까? 그런 상황에서도 결코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언젠가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랑한다면 포기하지 마세요. 사랑한다면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한다면 그 사람에게 희망을 품고 기도하며 인내하고 기다려 주세요. 정말 변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바꾸어 놓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잘 해보려고 하는데 오히려 더 악화되는 것은 내가 저 사람을 바꾸겠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바꾸긴 어떻게 바꿉니까? 안 됩니다. 오히려 더 악화될 뿐입니다. 점점 더 완악해 집니다. 하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하나님이 바꾸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번 손대시면 놀랍게 바뀝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이렇게 인간관계 뿐 아니라 지금 겪는 환난, 근심, 고통과 절망적인 상황도 사랑이면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왜요? 사랑하면 희망을 얻기 때문입니다.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확신하며 그분께만 희망을 두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해결해 주십니다. 이게 바로 믿음이요 사랑입니다.

성숙한 사랑의 마지막 열다섯 번째 특징,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딥니다. 앞에 나오는 내용들과 비슷하지요? 사랑이 모든 것을 믿어주고, 모든 것을 바라는 것처럼 모든 것을 견디게 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의 힘은 우리에게 인내라는 능력을 줍니다. 잘 견디고 참고 이겨내게 해줍니다. 돈이 많아도, 건강해도, 다 잘 되는데도 부부가 다투고 나누어지고 갈라섭니다. 서로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돈이 없어도, 건강이 없어도, 가진 것도 아무 것도 없는데 부부가 사랑만 있으면 견딥니다. 왜요? 환난과 고통도 견딜 수 있는 힘, 그리고 서로를 견뎌주고 이해해주고 품을 수 있는 힘이 다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랑을 가진 사람, 이 성숙한 사랑을 품은 사람은 참 잘 견딥니다. 세상에서 겪는 환난 고통도 잘 견딜 뿐 아니라 특히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들도 참 잘 견딥니다. 다른 사람과의 사이에서 받는 어떤 상처도 잘 견딥니다. 심지어 저 사람이 나를 힘들게 하고 절망에 빠뜨릴지라도 참 잘 참아주고 견뎌줍니다. 그래서 이 네 가지, 모든 것을 참고,  믿어주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은 다 같은 맥락일 수밖에 없습니다. 같은 시리즈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을 끝까지 믿어주고, 희망을 품어주고, 견디고 참아주게 됩니다. 이런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 하고 싶습니다

오늘까지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을 살펴보는 가운데 ‘성숙한 사랑의 특성 열다섯 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정말 멋진 사랑입니다. 정말 성숙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진정한 사랑입니다. 저는 이런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 아내에게, 자녀들에게, 그리고 성도들과 제가 아는 모든 사람과 이런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 심지어 나를 괴롭게 하고 상처 주는 사람에게도 말입니다. 정말 힘든 일이지만 사랑장은 이런 사랑을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야 내가 변하고, 상대방이 변하고, 세상이 변한다고 말입니다. 

이런 사랑을 품지 못한 채 상대방을 바꾸려 하고 세상을 바꾸려 하니 안 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제가 이런 사랑을 갖지도 않은 채 누군가를 바꾸어보려고 할 때마다 실패하고 오히려 더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랑도 못 가지고 있으면서 누군가를 훈계하고 가르치려 들고 바꾸어보려고 드니 안 된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우리 주님은 말로만 사랑하지 않으셨습니다. 입으로만 사랑타령을 하신 게 아니라 제일 먼저 이 사랑을 보여주고 몸으로 삶으로 실천하신 후에야 제자들에게 사랑에 대해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누구보다 먼저 품어주고 믿어주고 누구보다 제일 많이 희생하고 손해보고 견디시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자신 있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 때문에 대책 없던 제자들이 변한 것입니다. 성질만 급하던 베드로, 소심하기 짝이 없던 요한, 우레처럼 급한 야고보, 머리만 잘 돌아가던 빌립, 의심만 많던 도마 등등 정말 안 되는 사람들만 모아 놓은 제자들이 그래서 변한 것입니다. 바로 이 사랑 때문에 죄인의 괴수요 아무 희망도 없던 내가 구원 받고 이렇게 변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대책 없이 싸우고 분열되고 시끄럽던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정말 저런 사람들도 변할까 싶은 그들에게 이 사랑을 가르치고 실천하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오직 이 사랑이 있어야만 고린도교회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참 예수장이가 되겠기에 말입니다. 그래서 저도 이런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이런 사랑을 하기 바랍니다. 명심하십시오. 오직 이 사랑만이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상대방을 바꾸어놓을 수 있습니다. 

정말 안 변한다면, 아무리 해도 희망이 없어 보인다면 내게 과연 이 사랑이 있었는지, 나는 이런 사랑을 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런 사랑을 품지도 않은 채 상대방만 변하기 바랐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이 사랑을 품고 내가 먼저 변해야 상대방이 변합니다. 내가 먼저입니다. 내가 먼저 변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오늘은 송년주일, 올해 마지막 주일입니다. 한해를 돌아보며 혹시 인간관계에서 힘든 일 없었습니까? 가정에서, 직장과 이웃 사이에, 특히 교회에서 말입니다. 상처 받고 힘든 일 없었습니까? 그런데 그런 기억이 있다면 꼭 이 질문을 해봐야 합니다. 왜? 왜 그런 일이 생겼고 왜 지금도 해결 못하고 있을까? 다른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내게 아픔과 상처 준 사람 문제가 아니라 내가 원인이었음을 깨달아야만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장’이 가르쳐주는 사랑을 나도 품어 꼭 해결하고 넘어가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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