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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오심과 사명 (눅 4: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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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오심과 사명 (눅 4:16-21)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누가복음 4장 16∼21절

얼마 전 파키스탄에서 한 젊은 크리스천 여인이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 앞에서 “마호메트가 우리를 위해서 해준 것이 무엇이냐?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몸찢기고 피흘려 돌아가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해주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 여인을 고발했고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마호메트가 뭘 해주었느냐는 말 한마디 했다고 사형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국제인권위원회에서 수없이 호소를 하고 문제를 야기해서 결국 그 여인은 사형을 당하지 않았으나 장기간 복역을 하고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회당에 들어가셔서 읽은 성경말씀이 누가복음 4장 18절에서 19절의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는 말씀입니다.

1.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지으실 때 가난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아담이 있는 에덴은 낙원이었습니다. 낙원이라는 것은 지옥이 아닙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처소를 낙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해서 범죄하므로 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창세기 2장 17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마귀가 하와에게 와서 ‘정말 선악을 아는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더냐?’말하면서 유혹했습니다. 하와와 아담은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죄는 저주입니다. 그 저주가 땅에 임하여서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냈습니다. 가난이 거기에서부터 온 것입니다. 처음에는 가시와 엉겅퀴가 에덴에는 없었습니다. 영과 육이 다 죽음의 종이 되고 만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7절로 19절에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저주 받으니까 사람이 사는 땅이 저주를 받습니다. 복받은 사람이 오면 그 땅도 복을 받습니다. 복이나 저주는 사람따라 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집에 사람이 들어오는데 복받은 사람이 들어오면 복덩어리가 굴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주받은 사람이 들어오면 온집안 만사가 다 가시와 엉겅퀴가 나고 저주가 쏟아지는 것입니다.

불란서의 유명한 작가인 알베르 까뮈의 ‘오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한 집안에 부인이 오누이를 기르면서 살았습니다. 남편은 일찍 세상을 뜨고 죽을 고생을 해서 오누이를 기르고 있었는데 너무 가난했기에 아들이 돈 벌어서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드리겠다며 집을 떠나갔습니다. 아들이 떠나고 난 다음에 부인은 아들이 그리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딸하고 의논하기를 빨리 부자가 되어야 네 오빠를 데리고 올 수 있으니까 우리집을 여관으로 만들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관에 손님이 오면 밤에 잠들었을 때 손님을 목졸라 죽였습니다. 집이 바로 강가에 있었기 때문에 시체는 강물에 던져버리고 짐보따리를 뒤져서 돈을 챙겼습니다. 세월이 좀 흘러 부자가 되었습니다. 집을 떠났던 아들도 돈을 이제는 꽤 벌었습니다. 집 떠난지도 오래되고 이제 어머니를 깜짝 놀라게 해주어야 되겠다고 변장을 하고 보따리에 돈을 넣고 어렸을 적 사진, 편지 등을 챙겨서 집에 왔습니다. 어머니가 아들이 손님인줄 알고 객실에 모셨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자는데 어머니와 여동생이 들어와서 그의 목을 눌러 죽였습니다. 그래서 강물에 던져버리고 그 보따리를 뒤지니까 돈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하고 자기 딸하고 함께 찍은 사진들과 편지들이 나왔습니다. 알고보니까 자기 아들이었습니다. 그때야 가슴을 치고 땅을 치고 통곡을 하며 울었으나 소용이 없습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집안에 사망을 낳았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진 굉장히 부요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 털어버리고 가난한 목수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것은 그의 삶의 희생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가난과 저주를 청산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모든 아담과 하와가 가져온 저주를 청산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더 이상 가난은 없습니다. 죄를 용서하신 예수님은 가난도 다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 6절로 10절도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엄청난 축복을 약속해 놓은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로 14절도 엄청난 약속입니다. 가난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엄청납니다. 이 약속을 다 깨달으면 부자가 안될 도리가 없습니다. 저는 일찌감치 약속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큰 부자 교회가 되고 만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로 14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보배로운 약속의 말씀은 우리가 꼭 마음에 간직해야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 초등학교 다니는 어느 소녀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이 소녀의 가정은 어머니가 홀로 남매를 키웠는데 병든 몸에도 어린 남매를 위해 공사장에서 험한 노동을 하다가 허리를 다쳐서 이제 공사장도 못나가게 되므로 밥먹기가 어렵게 된 것입니다. 중학교 다니는 오빠는 학교를 못가게 되고 초등학교 다니는 자기도 집안 시중하기 위해서 학교를 못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을 다 대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생활비도 제가 넉넉히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삶에 용기와 힘을 주었습니다. 가난은 고통이지 미덕이 아닙니다. 잘 살면서 이웃을 도와줘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되면 일가친척에게도 부담이 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제일 먼저 선포하신 것이 가난한 자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요하신 이로서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인하여 우리를 부요케 하려 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으면 못살아야 된다고 잠재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50여 년 사역가운데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하고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된 경건이란 가난한 것이 아니라 과부와 고아를 그 환난에서 도와주는 것이 참된 경건임을 알았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고 그렇게 실천하고 살아왔습니다.

2.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그러므로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나고 죄의 포로가 되고 죄의 삯은 사망으로 죄와 사망의 포로가 되어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 나의 죄, 우리의 사망, 나의 사망을 끌어 안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처형당하므로 주님께서 “내가 다 이루었다”하셨고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13절로 14절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죄에서 해방을 얻고 사망에서 해방을 얻고 죄와 사망을 손에 쥐고 있는 마귀에서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된 것입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고 사망에서 자유를 얻고 마귀에서 자유를 얻고 해방된 우리들이 된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위치를 알았으면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와서 우리를 죄와 질병, 저주와 절망의 포로로 잡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단호하게 마귀를 물리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해방과 자유를 마음속에 누려야 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죄는 여러분의 어깨 위에 있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어린 양인 그리스도의 어깨 위에 있든지 둘 중의 한 곳에 있어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를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청산해 버리셨으므로 예수님께 맡기면 다 맡겨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마귀의 올무와 죄에서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3.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예수님은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영이 죽은 인간은 영의 눈이 어두워져서 물질밖에 안보이는 유물론자가 되고 하나님이 안보이니까 인본주의자가 되어서 인간 중심으로 서게 되고 천국과 지옥을 모르는 쾌락주의가 되고 만 것입니다. 시편 53편 1절에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중생하여 영안이 열리게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니고데모에게 주님께서 말씀하기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한 것처럼 우리가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를 받아들이므로 영혼이 살아나면 영안이 열리게 되고 하늘나라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5절 말씀같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로 7절에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 우리들이었기 때문에 아들의 영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하나님 아들의 영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오늘날 전세계 종교중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습니다. 이슬람교는 마호메트가 99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어도 아버지라는 이름을 없습니다. 

불교는 부처님, 석가모니라는 말은 있어도 아버지 부처님, 아버지 석가모니라고 말안합니다. 공자도 맹자도 아버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읽고 찬양을 하고 방언기도를 하고 이런 것을 통해서 아버지와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저는 방언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을 굉장히 큰 축복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성령으로 우리에게 역사하시면 크나 큰 변화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한 죄수가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에 걸쳐서 40년간이나 교도소에서 복역했습니다. 40년을 교도소에 생활하면서 워낙 성격이 포악한데다가 말썽을 일으켜서 간수들의 채찍에 수없이 얻어 맞고 독방에 들어가기도 하고 강한 훈련과 교육도 받았지만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피투성이가 되어도 변화 안됩니다. 그래서 복역을 마치고 출소하면 또 죄 짓고 또 들어오고 또 죄 짓고 또 들어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출소를 했는데 갈데 올데가 없으니까 기독교 계통에서 하는 수용소에 잠시 하룻밤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곳에 들어가서 하룻밤 자면서 복음을 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성도에게 복음 전도를 듣고 꿇어앉아서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안수를 받은 즉시로 그 마음이 뜨거워져 그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악한 기운, 사탄의 기운이 떠나가고 성령의 기운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냥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데 40년 동안 그렇게 모진 매를 맞고 핍박을 받아도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던 그가 눈물을 펑펑 흘렸던 것입니다. 완전히 180도로 변화되어서 그때 이후로부터 시작해서 18년 동안 그는 열심히 그 교회를 섬겼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중생하면 즉시 새 사람이 되고 눈이 밝아 변화될 수 있습니다.

4. 눌린 자에게 자유를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시면 눌린 자를 자유케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심령을 누르면 마음에 병이 들고 육신을 억압하면 병이 드는데 그 누른다는 말, 곧 스트레스라고 말합니다. 스트레스 걸렸다는 것도 우리 한국 말로 말하면 ‘눌림을 당했다’ ‘가위 눌렸다’고 합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다가와서 처음에는 따라다닙니다. 따라다니다가 안 쫓아내면 붙어 다니는 것입니다. 붙어 다니다가 안 쫓아내면 그 다음에는 올라탑니다. 그 다음 올라타도 그대로 내버려 두면 억압합니다. 그리고 마귀는 자기가 원하는대로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것은 마귀로부터 옵니다.

긍정적이고 좋은 것은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모두 다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선하게 변하게 될수도 있고 마귀를 내버려두면 마귀는 여러분을 따라다니면서 우리를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켜서 우리를 인격을 빼앗고 마귀처럼 만들어 놓고 마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눌려 심신이 병들면 마음에 미움, 분노, 시기, 질투, 불의, 추악, 불안, 우울, 절망 이러한 심적인 병이 짓누르게 됩니다. 이것 쫓아내야 합니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내 마음에서 떠나가라! 물러가라! 물러가라!”하고 대결하면 마귀는 물러가고 마음에 평안을 얻게 됩니다.

이사야 53장 4절로 5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가 사도행전 10장 38절에 말하기를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주셨으므로 이겨야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제게 와서 늘 하는 말이 “목사님, 나는 자신이 없습니다. 목사님은 자신이 있어가지고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큰소리를 하고 하는데 나는 사탄 앞에 서면 겁부터 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고 질문합니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심부름을 시킬수 있는 것은 힘이 세기 때문이 아닙니다. 할아버지의 권위 때문입니다. 성경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기를 누가복음 10장 19절에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우리에게 권세를 주셨습니다. 예수님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큰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권세를 사용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오늘도 예수님 안에서 부요함을 누리게 하시고 성령 충만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조용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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