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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더불어 일어나 건너갑시다! (수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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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일어나 건너갑시다! (수 1:1-4)   
     

: 1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 2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 : 3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 4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 

어느 농부가 독수리 알을 주워서 닭 알과 함께 부화시켰습니다. 새끼 독수리가 나와서 병아리들과 자랍니다. 땅을 헤집고 심지어 울음소리도 “꼬끼오”합니다. 어느 날 새끼 독수리는 하늘을 나는 독수리보고 넋을 잃고 엄마 닭에게 “저게 뭐예요?”하고 묻습니다. 암탉은 “으응, 독수리야.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새지!”라고 대답합니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어요.”라고 하자, 암탉은 “꿈 깨라. 우리와는 전혀 다른 족속이야!”라고 합니다. 그리고 저 새가 나타나면 빨리 숨으라고 까지 친절하게 가르쳐 줍니다. 자신이 독수리인지 모르는 새끼 독수리는 하늘을 나는 독수리를 부러워하고 두려워하며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독수리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역시, 어느 한 농부가 독수리 알을 병아리들과 부화하여 함께 키웠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가 농부에게 “독수리가 닭하고 사는 것이 참 이상하다”고 하였습니다. 농부는 그것은 독수리가 아니라 닭이라고 우겼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은 독수리를 팔에 얹고 “그대는 독수리로다. 독수리답게 날아가라.”고 합니다. 하지만 독수리는 팔에서 뛰어내려 다른 닭들과 어울려서 땅을 뒤졌습니다. 농부는 “그것 보세요, 이것은 닭이라고요.”라며 웃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은 포기하지 않고 이번에는 독수리를 들고 높은 산으로 갔습니다. 다시 독수리를 향하여 “그대는 독수리로다. 독수리답게 날아가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독수리가 여섯 자나 되는 날개를 활짝 펴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날개를 펼치고 하늘 높이 솟아올랐습니다. 

우리는 ‘너는 닭이다’는 말에 속아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땅을 헤집으며 작은 행복에 만족하고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나는 독수리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비록 땅에 살아도 하늘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땅의 사람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라는 속삭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새해에는 독수리처럼 여호와를 앙망함으로 새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31) 

우리가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희망의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역설적으로 우리의 희망은 죽음에 있습니다.

I. 죽음

구약성경 여호수아서는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이야기입니다. 여호수아서는 어떤 내용으로 시작합니까?
     
1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 1a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하나님의 종이라고 불렸던 모세가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충직한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인간적으로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영웅입니다. 그런데 그 영웅의 시대가 끝났습니다.
     
1. 위대한 시대가 끝났습니다.
     
영웅이 죽었다는 것은 절망입니다. 위대한 시대가 끝이 났다고 하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이제 앞으로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지 막막하고 답답할 수도 있습니다.
지난 해 연말, 한국교회가 받아든 성적표의 점수는 처참하였습니다. 낙제점수인 41.48점이었습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사장 우창록)은 지난 해 11월 8일부터 10일까지 만 19세 이상의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2010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이에 따르면, 한국교회의 신뢰도는 5점 만점에 2.58점에 그쳤습니다. 이 점수를 100점 만점으로 계산하면 41.48점입니다. 한국 개신교회를 신뢰한다는 사람들의 비중은 응답자의 17.6%에 불과하였습니다. 반면, 신뢰도 불신도 하지 않는다는 사람들의 비중은 33.8%였으며, 불신한다는 사람들의 비중은 48.4%로 조사되었습니다.
     
한국교회가 마땅히 비판 받아야 할 부분에 대해서는 겸허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과도하게 비난의 초점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교회의 이미지를 개선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위대한 시대는 끝이 났습니다. 교회 간판만 달아도 개척교회가 되는 시대는 이미 오랜 전에 지나갔습니다. 교회가 사회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교회를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여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죽음에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죽었다는 것을 아는 것에 희망이 있습니다. 죽음은 희망이 아닙니다. 그러나 죽었다는 것을 아는 것에 희망이 있습니다. 자신의 죄인 됨을 아는 것에서 교회는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는 바로 십자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생명을 거둬가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가나안을 향한 행진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1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 1b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세우셨습니다. 모세의 곁에서 섬기던 여호수아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던 모세를 대신하여 모세를 곁에서 지켜보았던 여호수아를 세우셨습니다(출 33:11). 하나님께서 모세를 거두고 여호수아를 세우셨습니다.
     
2.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인간적으로는 구시대의 사람입니다. 여호수아는 110세의 나이로 임종의 순간을 맞았습니다(수 24:29). 여호수아가 수행한 가나안 정복 전쟁은 약 7~8년 정도입니다. 점령한 땅을 분배하고, 정착, 안정시키는데 20년 정도입니다. 대략 30년을 지도자로 살았습니다. 그의 나이 80세 정도에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워졌습니다. 그러니 여호수아를 젊은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를 특징지을 수 있는 것은 도전 정신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를 대신하여 아말렉과 싸웠습니다(출 17:10). 그는 다른 사람들이 단 안된다고 할 때 갈렙과 함께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민 14:6-9). 무엇보다도 여호수아에게는 지혜의 영이 충만하였습니다(신 34:9). 애굽에서 탈출하고 광야에서 방황하던 시절에는 모세와 같은 강력한 지도력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가나안을 향하여 들어가는 데는 또 다른 지도력이 필요했습니다. 
     
한국교회를 이끌어가는 이름 있는 교회, 이름 있는 목사님이 필요한 시대가 있었습니다. 대형교회를 부정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대형 교회의 간판을 자랑하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이름 있는 목회자의 이름 밑에서 신앙 생활하던 것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제는 모든 교회들이, 모든 성도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 할 시대를 맞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각자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야 합니다. 모세의 죽음은 인간 모세의 끝이지 하나님의 역사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영웅의 시대가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와 용기가 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는 죽었으나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되었습니다.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II. 시작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새로운 시작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병아리 틈에서 자란 독수리를 날개 치며 올라가게 하는 데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2절 두 번째 구절 말씀입니다.
: 2b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히브리어 성경의 어순에 따르자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하신 첫 번째 명령은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미 죽었으니 슬퍼하고 낙심하고 주저앉아 있지 말고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1.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본문에서 ‘일어나다[!Wq/쿰]’는 말 그대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일어나다는 말의 히브리어 발음은 ‘쿰’입니다. 
우리는 ‘쿰’이라는 말을 예수님의 입으로 들었습니다.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예수님을 찾아와 그 발아래에 엎드려 간절히 구하였습니다. 그의 열두 살 된 외동딸이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집으로 가실 때, 그의 딸은 이미 죽었습니다. 더 이상 소망이 없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집으로 들어가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소녀야 일어나라’는 말입니다. ‘달리다’는 소녀라는 말이고 ‘굼’은 일어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었습니다(막 5:35-42).

여러분을 향하여 ‘쿰’이라고 명령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슬픔의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 원망의 자리, 탄식의 자리, 절망의 자리, 두려움의 자리에서 떨치고 일어나십시오.
쿰! 여러분의 자리에서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일어나서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다시 2절 두 번째 구절 말씀입니다.

: 2b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2절에서 두 번째 명령은 ‘건너가라[rb'[;/아바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단강을 건너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이것은 극복하라는 말씀입니다. 벗어나라는 말씀입니다. 넘어가라는 말씀입니다.

2. 요단을 건너가야 합니다.

요단강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하여 반드시 건너가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 요단강은 죽음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606장 후렴)

우리가 건너야 할 요단강은 무엇입니까?
연말에 아들 녀석이 읽는 책을 짬짬이 읽었습니다. 레스 패로트 3세가 지은 ‘3 세컨즈’라는 책입니다. 3초, 3초는 하루 86,400초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재를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는 데는 단 3초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비범한 인물과 평범한 인물의 차이, 성공과 실패의 요인이 3초라는 짧은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여섯 가지 충동을 3초 안에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어.”를 “다 할 수는 없지만 뭔가는 할 수 있어!”로 바꾸는데 3초 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너무 엄청나서 시도조차 할 수 없어.”를 “일어나서 전력을 다해 시도해 보겠어!”로. “그냥 되는 대로 살지 뭐.”를 “반드시 내 꿈을 이룰 거야!”로. “내 탓이 아니야.”를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로. “해야 할 만큼 했으니까 이젠 됐어.”를 “최소한도 그 이상을 하겠어!”로. “언제가 하겠지만 지금은 아니야.”를 “당장 행동에 돌입하겠어!”로 바꾸는데 단 3초면 된다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말은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면 부정의 힘을 산산이 부서뜨릴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말을 긍정적인 말로 바꾸면 새로운 걸음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건너야 하는 요단은 덩치가 크고 요란한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경험하는 가장 흔한 부정적인 충동들을 극복하는 것도 요단을 건너는 것입니다. 원망, 탄식, 절망, 두려움의 자리에서 일어나 그것을 넘어가기로 마음을 먹어야합니다.
일어 설 뿐만 아니라 건너가기로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일어나야 할 뿐만 아니라 건너가야 합니다. 그런데 혼자서 일어나 건너가겠습니까?

다시 2절 두 번째 구절 말씀입니다.
: 2b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이번에 주목하려는 말은 ‘더불어[ lKo/콜]’입니다. 본래 의미는 ‘전체’ 즉 모두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 혼자서 일어나 요단강을 건너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모든 백성과 함께 전체가 일어나 요단강을 건너가라고 말씀하십니다.

3. 모두 함께 가야 합니다.

모세와 같은 영웅의 시대에는 어떤 면에서 모세 한 사람만 잘 하면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모세가 하라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백성이 함께 말씀을 듣고, 더불어 행동하여야 합니다. 영웅의 시대는 누군가 혼자서 책임지고 혼자서 영광 받았습니다. 그러나 시민의 시대에는 모두가 함께 책임을 지고 모두가 함께 영광을 받습니다. 이것이 시민 사회의 특징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교회는 이 땅에서 함께 책임을 지고 그 나라에서 함께 기쁨을 누립니다. 교회는 결코 목사 한 사람의 교회가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지시를 따르기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인들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함께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여야 합니다. 목사 한 사람 때문에 잘 될 수도 없고 잘못 되어서도 안 됩니다. 목사는 모든 성도들이 함께 참여하도록 돕는 사람일 뿐입니다. 모두 함께 가야 합니다.
함께 더불어 일어나 건너가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일어나 요단을 건너 함께 가야 할 곳은 어디 입니까? 우리가 희망을 두어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III. 희망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그가 가야할 목적지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가야할 곳도 분명합니다.

2절 세 번째 구절 말씀입니다.
: 2c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과 함께 일어나 요단강을 건너서 가야 할 곳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가나안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단지 ‘내가 주는 그 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땅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그곳이 목적지입니다. 가나안 땅이라도 하나님이 허락지 아니하시면 가야 할 곳이 아닙니다. 

1. 하나님이 주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범위 안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에 충실하여야 합니다.

2010년을 보내며 ‘사사시대를 닮아가는 한국교회’라고 합니다. 사사시대를 대표하는 말씀은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17:6)는 것입니다. 저마다 자기 옳은 대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목청을 높입니다. 교회마다 교인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마음대로 행하고 있다는 뼈아픈 자성의 목소리입니다. 

우리는 계속하여 하나님의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에 이끌리심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계획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났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도록 창조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지금의 모습으로 지음 받았다’ ‘우리는 사명을 위해 지음 받았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할 곳입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목적에 충실한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면 그것을 끝입니까? 하나님이 주셨으니 가만히 앉아 있으면 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3절 말씀입니다.
: 3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하나님께서는 ‘너희 발바닥이 닿는 곳은 어디든지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단지 발이라고 하지 않고 발바닥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기 위해서는 자신의 발로 밟아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순종하여야 합니다.

2. 우리의 발로 밟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받기 위해서는 발걸음을 내디뎌야 합니다. 여기에 믿음과 순종이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셨다는 믿음과 발로 밟는 순종은 분리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순종하는 행동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나미라는 가수가 부른 ‘빙글빙글’이란 유행가가 있었습니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지 그저 눈치만 보고 있지 / 늘 속삭이면서도 사랑한다는 그 말을 못해 / 그저 바라만 보고 있지 그저 속만 태우고 있지 / 늘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우리 두 사람 / 그리워지는 길목에 서서 마음만 흠뻑 젖어가네

그저 바라만 보고, 그저 속만 태우며, 멀어질까 두려워하는 것은 진짜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에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을 믿고 믿음으로 나아가 발바닥으로 밟는 순종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믿고 온 몸으로 순종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밟아야 할 크기는 얼마나 되어야 할까요?

4절 말씀입니다.
: 4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남쪽의 광야에서부터 북쪽의 레바논까지, 동쪽의 유프라테스 강에서부터 서쪽의 지중해까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모두 그들의 영토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흔히 가나안의 경계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실제로 그 땅은 넓이로 계산하면 얼마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광야에서 산지까지, 강에서 바다까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들이 밟아야 할 것은 땅의 넓이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온 세상을 품어야 합니다.

3. 지경을 넓혀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창 13:15,17)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고작 벧엘에서 헤브론으로 옮기는 것에 그쳤습니다. 그리고 그곳만이 약속의 땅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더 멀리 다녔다면 가나안은 더 넓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꿈은 꾸는 사람의 몫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에 맞는 꿈이라며 얼마든지 크게 꾸십시오. 사람의 크기는 그 사람의 꿈의 크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에 섰습니다. 모세가 아니라 여호수아가 아니라 이제는 우리가 주인공입니다. 더불어 일어나 건너갑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발바닥으로 밟아 차지합시다. 눈을 감고 꾸는 꿈이 아니라 눈을 똑바로 뜨고 꿈을 꾸어야 합니다. 비전을 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개인과 가정에, 일터와 사업장에, 자녀들과 교회학교에, 이 나라와 이 민족에게 커다란 꿈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꿈을 함께 이루어가는 새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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