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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나의 택한 여수룬아 (사 4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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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택한 여수룬아

(사44:1-5)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풀 가운데에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 한 사람은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께 속하였다 할 것이며 또 한 사람은 야곱의 이름으로 자기를 부를 것이며 또 다른 사람은 자기가 여호와께 속하였음을 그의 손으로 기록하고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라.

1. 하나님께서 흙으로 온갖 들짐승과 새를 만드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아담에게 이끌고 가셨습니다. 아담이 각 생물들을 부르는 것이 바로 그 생물들의 이름이 되었습니다.(창2:19-20)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아담이 모든 생물들의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이는 인간, 아담이 만물에 대한 소유권이나 지배권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 하나님께서 직접 피조물의 이름을 짓지 않으시고 그 권한을 아담에게 위임하셨다는 것은 인간이 만물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인정하신 것입니다.(시8:6) 그래서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후 아담과 하와에게 이러한 말씀으로 축복하셨던 것입니다. 창세기1:28입니다.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예수 믿는 성도들이 자녀들의 이름을 지을 때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그 자녀에 대한 소유권을 하나님께 위탁한다는 의미입니다. 부모의 자녀이기 전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자녀의 삶을 다스려 주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디언들은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이름을 짓습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면 ‘바람의 아들’이라거나, 새가 울었다면 ‘새의 울음소리’라고 짓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이름을 무덤에까지 가져가지 않고 아이가 자라면서 이름이 바뀝니다. ‘바람의 아들’이 성장해서 춤을 잘 춘다면 ‘위대한 춤꾼’이라든지, 악기를 잘 다루면 ‘숲 속의 악사’로 바뀝니다. 노년이 된 그들에게 더 특별한 재주가 생겼거나 잊지 못할 기억을 남긴다면 이름이 다시 바뀌는 것입니다. 그들이 태어난 환경과 상황, 그리고 충분한 경험에서 붙여진 긴 이름입니다. 

성경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우가 있습니다. 사무엘서에 보면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쟁에 나가 죽임을 당하고, 엘리 제사장마저 그 소식을 들은 후 의자에서 자빠져 목이 부러져 죽게 됩니다. 졸지에 남편과 시아주버니, 시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며 비느하스의 아내가 갑자기 배가 아파 해산하고 죽어갈 때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그 거룩한 언약궤를 빼앗기고 영광스런 제사장의 가문마저 하루아침에 멸망당하는 것을 보면서 아기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짓고 죽은 것입니다. 

그 이름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 ‘어디에 영광이 있는가?’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당시 시대적, 사회적 현실을 반영해서 지어진 이름들이 또 있습니다. 구약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결혼한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정한 호세아의 신부는 품행이 불량하고 음란한 여인 고멜이었습니다. 고멜은 신부라기보다는 창녀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창녀와 결혼해서 자식까지 낳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음란한 여인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섬기지 아니하는 행위를 영적(靈的) 음란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라는 것은 우상숭배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상을 경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식들을 낳자 하나님께서 직접 이름까지 지어 주셨는데 첫 아들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고 지어주셨습니다. 그 뜻은 ‘여호와께서 흩으셨다’라는 뜻으로 이스라엘의 운명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첫째 딸을 낳고 이름을 ‘로루하마’라고 지었는데 ‘은총을 입지 못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실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다음 아들을 낳고 이름을 ‘로암미’라고 지었는데 ‘내 백성이 아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가 완전히 깨졌다는 선포입니다. 이들 이름은 축복이 아니라 심판과 저주를 경고하는 이름들입니다. 거룩한 선지자 호세아로 하여금 창기 고멜과 결혼하라는 것은, 사랑할래야 사랑할 마음이 도저히 생기지 않는 창기와 같은 이스라엘에 대한 괴롭고 아픈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아픈 사랑’을 통감하며 그 아픈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아픈 사랑’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픈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고서야 어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선지자가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고멜과 결혼해서 낳은 자식들에 대한 이름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경고하며 회개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돌아오라는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인류에게 호소하는 하나님의 ‘아픈 사랑’, ‘아픈 마음’입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죽일 수밖에 없는 사랑의 희생입니다. 인간이 타락했다고 해서 포기하거나 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아픈 마음이 독생자를 십자가에 희생시키신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태어나실 때,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는 뜻입니다.(마1:21-23) 

‘임마누엘’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인들인 인간과 함께 하셔서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표현하시는 이름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 이름대로 죄인들과 함께 하시며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더러운 죄인들과 함께 한다는 온갖 비방과 조롱을 받으면서까지 죄인들과 함께 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셔서 죄인들을 의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신 성도 여러분은 옛 이름의 ‘옛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로 새로 지음 받으신 ‘새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예전 이름 그대로가 아니라 새롭게 지음 받으신 ‘새 이름’을 지닌 ‘새 사람’이라는 것입니다.(엡 4:24) 예수 믿음으로 ‘새 사람’으로 지음 받은 ‘새 이름’을 가진 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는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하나님 말씀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3:12입니다. 

(계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새 예루살렘의 이름’이 주어진다는 것은 ‘새 예루살렘의 시민권을 소유한다.’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에 영원히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예수 믿는 성도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고백했습니다.(빌3:20)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새 이름’을 주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와 인격, 그리고 성품을 소유한 온전한 이름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전도서 7:1에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다.” 고 했습니다. 세상의 썩어질 금은보화보다는 “아름다운 이름”, 영원히 기억되는 아름다운 이름, 즉 하나님 자녀의 이름으로 사는 것이 가장 지혜롭고 복되다는 뜻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 2011년 한 해를 가장 지혜롭고 복된 하나님 자녀의 이름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2.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의 종 야곱’이란 이름은 별로 좋은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은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발뒤꿈치’란 뜻으로 태어날 때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와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장자에 대한 욕심과 시기가 얼마나 강했는가는 보여주는 이름이었습니다. 쌍둥이로 태어나는 것인데 단 몇 초 사이에 동생이 되어 억울하다는 뜻입니다. 또 그 이름이 나쁜 의미로는 ‘속이는 자’ ‘남을 사취하는 자’란 의미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야곱은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삼촌 라반을 간접적으로 속이는 등 자신의 욕심을 달성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야곱이 인간적인 약점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므로 그는 새 이름 ‘이스라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롬 9:11-13) 그래서 야곱을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종”으로 불렀다고 해서 기분 나쁜 것이 아닙니다. 종은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서 그 가치가 대단히 달라집니다.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종은 축복입니다. 그러나 마귀의 종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곧 저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야곱을 가리켜 “나의 종 야곱아!”라고 부르신 것은 축복인 것입니다. “나의 종”으로 부르시고 “내가 택한 이스라엘”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야곱을 종으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 부르심 속에는 언제,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쓰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반드시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지렁이 같은 야곱’이라고 부르시기도 했습니다.(사 41:14) ‘지렁이 같은 야곱’은 야곱이 무력하고 무가치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비록 ‘지렁이 같은 야곱’이라도, 즉 잘났거나 못났거나, 솜씨가 있거나 없거나 따지지 않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목적대로 그 종을 불러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먼저 사랑을 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9:11-13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롬 9:11-13)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택하심을 따라 세우신 하나님의 뜻이 지속되게 하시며, 하나님의 이러한 일이 사람의 행위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시는 분께 달려 있음을 나타내시려고, 리브가에게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였다’ 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사랑하여 택하시고 그를 다시 이스라엘이 되게 하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 여러분을 창세 전부터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택하신 것은 전혀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 여러분을 ‘종’으로 부르시고 택하신 것은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성도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미련하면 지혜롭게 만들고, 약하면 강하게 세우고, 무능하면 능력으로 입히고, 천하면 존귀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하나님의 자랑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지렁이 같은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하란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던 중, 해가 져서 하룻밤을 보내려고 한 곳에 돌을 베고 누웠는데 꿈에 보니 끝이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 하나가 땅에 서 있고 그 위에 하나님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 위에 서서 야곱에게 “나는 너의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너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네가 누워 있는 이 땅을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주겠노라. 네 후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 동서남북으로 사방 흩어져 살 것이며 세상의 모든 민족이 너와 네 후손을 통해 복을 받을 것이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지렁이 같은 야곱’이지만 그를 사랑하셔서 아브라함의 축복 계승자로 선택하셨다는 것, 그리고 그 선택하신 목적을 다 이루기까지 항상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을 다 이루기까지 항상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께서 야곱을 선택하신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를 ‘이스라엘’, 다시 말해 ‘승리자’로 만드셨습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 동안 그야말로 눈 붙일 겨를도 없이 뼈 빠지게 일했습니다. 그런데 라반이 약속한 품삯을 이 핑계 저 핑계하면서 한 푼도 주지 않고 내보내려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라반을 책망하셔서 지난 20년 품삯을 한 푼도 잃지 않고 몽땅 받아내게 하셨습니다.(창31:40-42)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요단강을 건넜던 야곱이 거부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창32:10)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야곱에게 반드시 해결하고 이겨내야만 하는 큰 장애물 하나가 있었습니다. 20년 전, 형 에서를 속이고 맺힌 형의 원한(怨恨)이었습니다. 형 에서는 야곱에게 속아 장자권을 잃게 되자 야곱을 죽여서 한을 풀고자 했습니다.(창27:41-42) 그 때 어머니 리브가가 “(창27:44-45)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얼마 동안 그곳에 거하라. 세월이 흘러 네 형이 네가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너를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면서 야곱을 외삼촌 집으로 피신시켰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 20년 동안 고향 어머니로부터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습니다. 리브가는 야곱을 떠나 보낸 후 야곱을 다시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때문에 야곱은 거부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반드시 풀어야만 하는 형 에서의 분노가 장애물로 남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나는 주께서 나에게 보여 주신 모든 자비와 신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내가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는데 지금은 두 떼를 이루었습니다. 

내가 주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나를 내 형 에서의 손에서 구해 주소서.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두렵습니다. 주께서는 내가 너에게 은혜를 베풀어 네 후손을 셀 수 없는 바다의 모래처럼 많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창32:9-12) 야곱은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안심이 되지 않아 절반의 재산을 앞세워 보내 네 차례에 걸쳐 화해를 시도합니다. 엄청난 선물로 형의 감정을 누그러지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야곱은 그 밤으로 모든 소유와 더불어 가족들 모두를 얍복 나루를 건너게 한 후 자기 홀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날이 새도록 천사와 씨름하며 울부짖어 간절하게 기도합니다.(호12:3-4) 

천사는 야곱을 이길 수 없는 것을 알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자 그 뼈가 위골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천사를 놓지 않고 ‘당신이 나에게 축복하지 않으면 내가 당신을 놓아주지 않겠습니다.’ 며 붙들고 늘어지자 ‘네 이름이 무엇이냐?’ 고 묻습니다. ‘야곱’을 몰라서 이름을 물은 것이 아닙니다. 그 이름을 새 이름으로 바꾸어주기 위해서 물은 것입니다. 

야곱이 ‘야곱입니다.’ 고 하자 “네가 하나님과 겨루고 사람과 겨루어 이겼으므로 다시는 네 이름을 야곱이라 하지 않고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라.” 며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겨루고 사람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을 가진 새 이름, ‘이스라엘’로 부르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승리자’에게 주시는 새 이름입니다. ‘지렁이 같은 야곱’, ‘사기꾼 같은 야곱’, ‘남의 뒤꿈치나 붙잡는 야곱’이 이제는 승리자의 새 이름 ‘이스라엘’로 불리우게 된 것입니다. 

야곱은 승리자의 새 이름 ‘이스라엘’이 되어 형 에서를 만나게 됩니다. 에서는 먼발치에서 야곱을 알아보고 달려 나와 서로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눈물을 흘립니다. 야곱이 너무나 기뻐 선물을 드리자 “(창33:9-12)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며 사양합니다. 

그러자 야곱이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 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나의 소유도 족하오니 청컨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강권하자 받아들이고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떠나가자. 내가 네 길을 안내하리라.” 하나님께서 야곱을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시고 형 에서를 이기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선택하시고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 새 이름 ‘이스라엘’을 주시고 20년 한을 풀어주셨습니다. 홀로 극복할 수 없는 큰 장애물을 이겨내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혹은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께 속하였다 할 것이며 혹은 야곱의 이름으로 자칭할 것이며 혹은 자기가 여호와께 속하였음을 손으로 기록하고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칭호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야곱 당시로부터 약 

1300년 후에 기록된 예언이기 때문에, 오늘 예수 그리스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선택받은 성도 여러분을 ‘야곱의 이름으로 부를 것이며’, 다시 말해 ‘제 2의 야곱’으로 부르시며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 새 이름 ‘이스라엘’로 기록하여 부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아브라함의 축복을 계승하는 ‘이스라엘’로 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예수 믿음으로 ‘야곱의 이름으로 호칭되어’ 하나님 나라에 새 이름 ‘이스라엘’로 기록되시고 모든 일에 승리하시는 행복한 ‘여수룬’이 되시기 바랍니다. 


4.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한 여수룬”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겠습니다.

(사44:2-4)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풀 가운데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같이 할 것이라 

‘여수룬’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의로운 자가 된 이스라엘’이란 뜻을 가진 아름다운 시적(詩的)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기신 것은 혈통과 가문이 좋다거나 마음씨가 착하고 행동거지가 바르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앞에 자랑하고 의롭게 내세울만한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네 부모, 고향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이유와 목적지를 묻지 않고 무작정 떠난 것이었습니다. 

또한 낯설고 물설은 곳에 가서 나그네처럼 천막을 치고 살았지만, ‘이게 약속의 땅이냐?’며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불평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세상보다 더 좋은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다 늙어 환갑을 훨씬 넘긴 아내가 임신하리라는 망언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전혀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은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을 철저히 믿었습니다. 더 나아가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을 때, 죽은 자를 살리실 것을 믿고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같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게 인정하시고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한 아브라함을 기쁘게 여기시며 의롭다고 인정하신 것입니다. ‘여수룬’이란 바로 아브라함과 같이 순종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의롭게 된 성도에게 주어지는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의 죄악에 대한 심판을 녹슨 가마솥에 비유하여 에스겔에게 전하셨습니다.(겔24:3-14) 

녹슨 가마에 좋은 양고기 넓적다리와 어깨고기, 뼈들을 가득히 담고 물을 부어 가마솥의 뼈가 무르도록 삶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마솥의 녹이 없어지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제는 나무를 더 많이 하여 가마솥의 국물을 졸이고 뼈들이 모두 태워지기까지 뜨겁게 가마솥을 달궈 녹을 없애보라는 것입니다. 양고기와 뼈들이 무르기까지 가마솥을 달궈도, 가마솥을 벌겋게 달궈도 결코 녹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양고기의 넓적다리와 어깨고기, 그리고 뼈들은 이스라엘의 중상류층과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것이고, 가마솥의 녹은 예루살렘의 죄악을 뜻합니다. 그리고 양고기를 가마솥에 넣고 삶는 것은 하나님의 분노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분노가 뼈까지 다 태워 아주 역한 냄새가 진동하고 가마솥을 녹일 정도가 되더라도 녹이 없어지지 아니한다는 것은 그 지은 죄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마솥의 녹, 즉 예루살렘의 죄는 어떻게 없어질 수 있겠습니까? 그 중요한 답을 주시고 있습니다. 에스겔24:13을 보겠습니다.

(겔24:13) 내가 네게 향한 분노를 풀기 전에는 네 더러움이 다시 정하여지지 아니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은즉 그 일이 이룰지라. 

예루살렘의 죄가 없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분노가 풀어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자신의 죄를 없이하고자 노력할지라도, 그리고 아무리 지은 죄악에 대한 심판을 받는다 해도 그 죄를 없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옥에 떨어진 죄인들이 끊임없이 불타는 심판을 받는 이유는 그 심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죄가 없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분노가 풀어져야만 정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는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고서야 죄에 대한 분노가 그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예수를 믿고 마음에 받아들여야만 하나님의 분노가 풀어지고 죄 사함을 얻어 구원에 이르는 의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 믿고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여수룬’이 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2011년 한 해를 살아갈 때, 항상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의롭게 여기심을 받는 ‘여수룬’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아름답고 복된 이름, ‘여수룬’으로 부르시며 약속하셨습니다. 

(사44:3-4)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풀 가운데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같이 할 것이라

비록 메마른 땅과 같은 삶일지라도 생수의 강물이 흐르게 하여 푸른 초장과 옥토가 되게 하시고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풍성한 추수를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축복을 자손 대대로 내려 주실 것입니다. 

(사44:5) 혹은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께 속하였다 할 것이며 혹은 야곱의 이름으로 자칭할 것이며 혹은 자기가 여호와께 속하였음을 손으로 기록하고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칭호하리라

그 때에는 ‘나는 주의 것이다.’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야곱’의 이름을 써서 ‘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팔에다가 ‘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다.’ 라고 쓰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2011년 한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종 야곱’으로,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로, ‘하나님이 택한 여수룬’으로 사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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