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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마음을 새롭게 (롬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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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새롭게 (롬 12:2)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면서 성도의 행실이 바르게 드러나게 하는 원리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합니다.
먼저 “너희는”이라는 말부터 생각해보지요. 이 구절이 일차적으로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가르치고 있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성도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이 구절뿐만 아니라 성경은 불신자들이 아닌 성도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성도가 아니면 결코 성경 말씀대로 살 수가 없지요.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도 성경의 가르침대로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펠라기우스주의입니다. 불신자에게는 기독교 윤리의 실천보다 먼저 거듭남이 필요하지요. 사도는 성도에게 먼저 부정문으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이 세대”라는 말은 시간적인 지금의 시대를 의미하기보다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는 세력을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무관한 세계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총칭하지요. 하나님의 나라 밖에 있어서 사고방식이나 삶의 방식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고 근본적으로는 마귀의 지배하에 있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들의 가치관이나 인생관은 성경 말씀과는 무관합니다. 하나님과 무관한 사람들이 오랫동안 경험하고 축척한 나름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지요.

그런 세대에 대해 성경의 가르침은 “본받지 말고”입니다. 이 말씀은 단지 세속적인 드라마나 영화를 보지 않고 술 마시지 않는 정도로 좁게 생각할 말씀이 아닙니다. 본받는 다는 것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작용합니다. 세상의 사고방식이나 삶의 방식을 부러워하여 따라가거나, 그 방식에 따르지 않으면 뒤처질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세상 풍조에 휩쓸리지요. 이처럼 ‘나도 한 번 저렇게 살아보고 싶다’, ‘저들을 따라해야겠다’라는 태도를 취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성도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이 통제되어야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때 무리를 보고 민망히 여기신 적이 있습니다.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을 보셨기 때문입니다(마 9:36).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의 삶은 부러워하고 갈망할 삶이 전혀 아닙니다. 사실은 불쌍히 여겨야 할 삶이지요. 목자의 인도를 받지 않는다면 아무리 화려해보이고 멋있게 보일지라도 실상은 사탄의 난폭한 지배 아래서 고생하며 유리하는 삶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을 향해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만큼 거듭난 성도조차도 세상의 유행하는 시대정신과 풍조에 휩쓸리기 쉽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본받지 말라는 말씀이 ‘세상을 등지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교회사를 보면 때로 세상에 물들지 않고자 하는 과도한 열망 때문에 극단적으로 나아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행여나 세상을 본받을까봐 두려워서 원천적으로 세상과 단절하고 금욕적인 수도생활을 했지요. 동기가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방법이 극단적이었지요. 성도는 각자 세상이라는 삶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증시해야 하는 사람이지, 세상으로부터 도피해야 할 사람들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금욕적인 요소가 있지만 금욕주의는 아닙니다. 금욕주의도 세상 방식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도록 기도하지 않으셨고, 다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존재임을 밝혀주셨습니다(요 17:14-16). 성도는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의 풍조를 본받지 않으므로 자연스럽게 세상과 구별됩니다. 세상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써 이 땅에서 이미 천국 백성으로 사는 것이지요. 성경대로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별되는 것입니다.

너무 성경대로 고지식하게 살려다보면 갈릴레오의 지동설을 비판했던 중세 교회처럼 될 수 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맹신으로 말미암아 오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맹신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는 일은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당시 중세 교회의 맹신은 너무 성경대로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임을 분명히 지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성경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섞여서 만들어졌습니다. 성경에만 권위를 두지 않고 전통에 최종 권위를 부여했기 때문에 갈릴레오 사건 외에도 이상한 맹신의 오류들에 빠졌습니다.

세상을 본받지 않으려는 태도와 관련하여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 18:11)고 했지요. 타인과의 비교 속에서 ‘나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뽐냈습니다. 저는 한 때 ‘주여 저는 저 바리새인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바리새인과 똑같은 사고방식이었습니다. 비교우위에서 자랑하는 일은 교묘하게 감추어진 세상의 방식이었지요. ‘나는 달라’라며 신앙을 뽐내는 것은 교묘하게 이 세대를 본받은 것이기에 더욱 해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세상과 구별되어야 할까요?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고 했습니다. “변화를 받아”라는 단어는 예수님께서 “변형”되셨을 때 쓰였던 단어와 같은데(마 17:2) 애벌레가 나비처럼 변하는 근본적인 변화를 뜻합니다. 문법적으로는 현재 수동태 명령형인데 스스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힘에 의해 변화되어지는 것을 뜻하며, 이미 변화된 성도에게 명령하는 말씀이므로, 이미 변화된 성도도 그 변화가 완성되기까지 계속해서 변화되어가야 함을 의미하지요. 이러한 근본적 변화는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모든 것을 성령님께 맡겨두고 기다리라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행동을 새롭게 함으로’가 아님에 주목하십시오. 행동에 초점을 둔 신앙생활은 철저하게 실천할지라도 바리새인처럼 됩니다. 바리새인들이 구체적인 실천목록을 철저히 실천했지만 예수님께 외식자로 책망을 많이 들었습니다. 성경이 성도에게 요구하는 것은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일입니다. 행동의 변화에 초점을 두지 않고 내적인 변화에 초점을 둡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 기독교적 삶의 핵심입니다. 성품이 변하면 행동은 자연스럽게 열매로 맺힙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구체적인 실천목록보다 마음이 새롭게 되는 일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예배에 지각하지 않겠다’ 혹은 ‘1시간씩 성경을 읽겠다’는 구체적인 행동지침은 좋은 결심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다 지켰어도 예배 시간에 멍하게 앉아 있거나 성경을 읽고 있다는 것을 자랑삼는다면 해롭겠지요. 반면에 마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상태로 새롭게 되면 자연스럽게 말씀과 기도를 가까이할 수밖에 없고, 지각 하지 않는 정도를 넘어서 참 예배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허물 많은 죄인이요 무익한 종임을 깨달아 알기에 자랑하지 않고 모든 것을 은혜로 여기겠지요. 세상은 드러나는 외적인 것에 초점을 두지만 성경은 마음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는데 초점이 있습니다.

성도는 세상을 본받는 쪽이 아니라 마음을 새롭게 하는 쪽으로 에너지를 쏟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을까요?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라고 말했습니다. 먼저는 새로운 마음을 위해 기도해야 하겠지요. 또한 시편 기자는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시 119:9)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따르는 순종이 언급됩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너희는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겔 18:31)라고 하여 죄악을 버리는 회개를 언급합니다. 사실 성경은 마음을 새롭게 하는 특별한 비법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도라는 누구나 알 수 있는 기본적인 것들이지요.

세상은 조직에서 인정을 받거나 사랑을 받아야만 힘을 얻고 움직입니다.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서 힘을 다해 일을 벌여 뭔가 업적을 만들어 내려하지요. 하지만 성도는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해도 멸시와 천대 속에서도 움직여야 할 사람입니다. 성도는 자칫 세상적인 방식을 따라 마르다처럼 분주하게 일하다가 불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에게는 많을 일을 하는 것보다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새겨듣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눅 10:39-42). 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회개하고, 말씀을 따라 삼가고, 말씀대로 살기 위해 기도하는 일들이 중요합니다. 비록 한 가지 일만 하더라도 깨달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행동을 할 때 은혜 속에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말씀은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야 할 목적으로 해석 할 수도 있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은 결과로 해석할 수도 있는 문장입니다. 목적으로 해석하면 기독교인의 행동 목표는 자기수양이나 자기완성에 있지 않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일치시키는데 있음을 뜻하지요. 사실 이점에서 기독교 윤리는 일반윤리와 구별됩니다. 결과로 해석하면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 받는 삶을 살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된다, 즉, 그분의 뜻을 인정하게 된다는 의미가 됩니다. 두 가지 의미가 다 포함되어 있다고 봐야하겠지요.

오늘날의 시대 풍조는 진리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다만 느낌으로 팍팍 다가오는 것만을 즉흥적으로 즐기려하지요. 재미난 TV 프로그램과 컴퓨터 게임들이 진리에 대해 깊이 생각할 기회를 박탈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진지하게 진리를 숙고하지 않는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고 명령합니다.

어떤 시대풍조가 성도를 위협하고 있는지 무엇이 바른 성도의 삶인지 생각하면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고 하나님의 뜻에 일치된 삶으로 나아가는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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