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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터진 웅덩이를 파지 맙시다 (렘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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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진 웅덩이를 파지 맙시다 (렘 2:13)
 
 
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제 기억으로는 금번에 내린 눈이 가장 많은 폭설인 듯싶습니다. 그래서 며칠 동안 온 세상이 순백의 세계로 변했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 부른 동요 가운데 이런 노래가 있었습니다. ♪꽃가지에 내리는 가는 비 소리 가만히 기울이고 들어보세요. 너희들도 이 꽃처럼 맘이 고와라. 너희들도 이 꽃처럼 맘이 고와라. 냇가에서 종종종 우는 새 소리 가만히 기울이고 들어보세요. 너희들도 이 물처럼 맘이 맑아라. 너희들도 이 물처럼 맘이 맑아라.♪ 마치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듯한 아름다운 동요입니다. 온 세상이 순백의 세계로 변한 모습 속에서, 우리는 또 다른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온 세상을 뒤덮는 함박눈 소리 가만히 기울이고 들어보세요. 너희들도 이 눈처럼 맘이 깨끗 하라. 너희들도 이 눈처럼 영혼이 순결하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우리는 또 다시 희망의 새 해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두 날개 사역을 통한 교회 부흥과 성장에 대한 소망이 불타고 있지만, 성도 여러분들에게는 그보다 새 해에도 복 받는 데 가장 관심이 많을 듯싶어서, 새 해 첫 주일 복 받는 비결에 관한 말씀을 나누면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시 128:1-2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옛날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하지 않고 놀고먹는 것을 상팔자라 생각하고, 그러한 사람을 복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불로소득이나 일하지 않고 놀고먹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도 아니고, 따라서 그러한 생활은 결코 복된 삶이 아닌, 부끄럽고 죄스러운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 “네가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는 말씀은 1)우리가 할 일을 갖게 될 것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실업자, 혹은 실직자의 생활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는, 겪어 본 사람만이 알 것입니다. 2)우리들의 모든 수고가 하나도 헛되지 않고 아름다운 열매와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러한 은혜와 축복을 사모하면서 ‘터진 웅덩이를 파지 맙시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예레미야는 주전 628년경 남 왕국 유다에서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 때 당시 선지자는 돌에 맞아 죽기도 하고 톱으로 켜 죽임을 당하기도 하는, 박해가 몹시 심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여호와여 사람마다 나를 조롱하나이다.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되나이다.”고 하면서 탄식하기도 했습니다. 선지자의 바른 말을 듣기는커녕 욕설과 저주를 일삼고, 심지어 잡아 죽이려고까지 하는 형편이어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그만 두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있다가 멸망하게 될 불쌍한 동족을 바라보면, 그는 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라 하여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서 견딜 수 없나이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에 이러한 마음이 없다면, 결코 영혼을 구원하지 못할 것입니다. 

참 하나님 대신 사신 우상을 섬기며, 죄를 물마시듯 하고, 그래서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고야 말 이웃을 대할 때, 중심이 불붙는 것 같은 마음,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해서 견디지 못하는 마음, 예레미야와 같은 심정이 없이는, 결코 한 생명도 구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편안히 살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하고, 예루살렘의 이 거리 저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예레미야가 중심에 불붙는 듯한 마음,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13절에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범한 죄는

1. 생수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을 버린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430년이라는 길고도 오랜 세월 동안 애굽의 종살이에서,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인 가나안 복지로 향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게 해주시고,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목이 마르면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해주시고, 굶주릴 때에는 만나와 메추라기 내려 배불리 먹여 주셨습니다. 여러 차례의 전쟁에서 이기게도 해주시고, 마침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편안히 살게 해주셨습니다. 그랬더니 이제 살만큼 되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수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을 버렸다고 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우물이란 몹시 귀한 것이고, 그 때문에 우물은 저들의 재산 목록 제1호에 해당되는 보물과도 같습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아무 데나 샘을 파도 물이 잘 나오지만, 이스라엘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강우량이 적은 중동 지방에서 우물은 생명의 젖줄과 같은 귀한 재산이었습니다. 

어릴 때의 기억을 되살려 보면 동네에서나 개인 집에서나 삶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 바로 우물이었습니다. 우물은 동네 한가운데도, 집안의 마당에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어느 때라도 목이 마르면 두레박을 첨벙! 물에 내려뜨려서 시원한 물을 퍼 올려 가지고 벌컥 벌컥 들이키게 되면, 그 맛이야말로 저 가슴 밑바닥까지 시원하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제주도의 화산 석과 같이 구멍이 숭숭 뚫린 돌들로 구성되어 있는 팔레스틴의 땅에는 물이 잘 고이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물을 얻으려면 샘을 깊이 파야 했습니다. 따라서 우물을 파는 것은 무척 힘들고 어려운 작업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한번 파 놓은 우물은 생명처럼 귀히 여기고, 대대로 물려주는 그들의 가장 귀중한 재산이었습니다. 우물이 있어야 양도 치고, 소도 먹이고, 사람도 살게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물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존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저들의 육신 생활이 부요해지는 근원과도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물이 귀한 나라에서 생수가 콸콸 넘쳐흐르는 우물을 버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정신이 나간 온전치 못한 사람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마치 생수의 근원과 같은 하나님을 버리는 죄악을 범했다고 했습니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은 스스로 웅덩이를 팠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웅덩이를 팠다는 것은, 저들이 우상을 만들고 섬긴 죄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생수가 철철 넘쳐흐르는 하나님을 떠나서, 어리석게도 다른 곳에 웅덩이를 팠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피땀을 흘리며 팠던 웅덩이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 웅덩이는 아무리 파고 또 파도 물이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조차 담아 놓을 수 없는 터진 웅덩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생수의 근원과 같은 만복의 근원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금 살만 해지니까, 만복의 근원 되시는 생수와 같은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대신 복을 받고 잘 살아 보겠다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은망덕한 행위가 이방인만도 못하다고 책망하셨습니다. 

“너희는 깃딤 섬들에 건너가 보며, 게달에도 사람을 보내어 이 같은 일의 유무를 자세히 살펴보라. 어느 나라가 그 신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깃딤이나 게달에 사는 사람들이란 미개한 흑인들을 말합니다. 그 미개한 흑인들도 본래 자기들이 섬기던 신을 버리지 않는데, 소위 선민이라는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하나님을 버렸다는 통렬한 책망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난 이유는, 배가 부른 까닭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먹고 살만하게 되니까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일찍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당부하기를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고 경고하였는데, 그러한 경고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대신 우상을 섬기는 패역한 죄를 범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축복을 하나님 공경하는데 쓰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 은혜를 짓밟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축복을 하나님 공경하는데 쓰지 않고, 육체의 소욕을 채우는 일에 쓸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각각 지나 온 날들을 더듬어 보십시다.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많이 받고 살아왔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오늘의 우리는 도저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렵고 다급할 때는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열심히 기도 생활을 하다가도, 조금 편안해지면 한숨 돌릴 만해지면, 하나님을 멀리하고, 교회를 멀리하고, 기도 생활도 하지 않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에는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노라고 다짐을 했다가도, 살만하여 별 걱정이 없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에게는 갖고 있는 육신의 병이 큰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것이 가장 큰 병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생수의 근원되는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잘 살아보겠다고 터진 웅덩이를 파는 것 같은 우상 숭배로 기울어진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너 하늘아 이 일을 인하여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배은망덕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러므로 내가 여전히 너희와 다투고, 너희 후손과도 다투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한국에서 외과 의사를 하던 사람이 산부인과 의사인 부인과 함께 미국의 L. A로 이민을 갔습니다. 처음에 이민을 가서 어려울 때는, 열심히 교회도 나오고 주일도 잘 지켰습니다. 부부가 의사인지라 수년 동안에 많은 돈을 모아서, 미국 사람들도 부러워할 만한 큰집을 사고 고급 자동차도 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부가 이렇게 잘 살게 된 후로부터 교회를 나오지 않습니다. 목사님이 그래서야 되겠느냐고 충고하면 “내가 전에는 왜 그렇게 열심히 교회를 나갔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만큼 나가 주었으면 되지 않아요. 이제 저희 집에 다시 심방을 오지 마세요.”라고 쏘아붙였습니다. 

얼마 후에 그 의사 부부는 아들이 스포츠카를 사 달라고 졸라서 아주 값비싼 자동차를 사주었습니다. 아들 형제가 그 새 자동차를 몰고 가다가 50m도 못 가서 큰 나무를 들이받아, 한 아들은 현장에서 즉사하고, 또 한 아들은 눈에 유리 조각이 많이 박혀서 그만 실명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그 의사 부부는 날마다 아들이 묻혀 있는 공동묘지에 가서 울고불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가슴을 치고 통곡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같이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대적하시면 누가 우리를 위하리요.” 

생수는 성경에서 성령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요 4:14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의 성령을 떠나서 살수 없습니다. 물고기와 어항을 생각해 봅시다. 금붕어가 어항을 떠나서 며칠이나 몇 시간이나 살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도들의 영혼은 늘 주님 안에서 성령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렘 31:12에 보면 이렇게 사는 성도의 심령을 물댄 동산과 같이 되게 해주시겠다고 했고, 시편 1:3에 보면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음과 같이, 그 행사가 다 형통할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물이 마르지 않는 동산은 각종 수목이 풍성함 같이,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에 늘 젖어 있는 영혼은, 생명이 풍성하고 축복이 풍성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영육 간에 모든 축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생수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우물을 팠다고 했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들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을 통해서 커다란 진리를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들이 생수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께만 속하여 있으면, 심령은 물댄 동산과 같고, 육신의 축복도 풍성히 받는 법인데, 이것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웅덩이를 파는 어리석은 일을 많이 합니다. 

어떤 성도는 스스로 잘 살아보겠다고 주일을 함부로 범합니다. 남들은 주일에 편안히 안식을 하는데, 죽자 하고 피땀을 흘리면서 주일에도 스스로 웅덩이를 팝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할 것은 그러한 웅덩이는 5년을 파고 10년을 파도, 결국은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라는 사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렘 17:11절에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주일을 범해 가면서 모은 물질은 불의한 재물이나 마찬가지이고, 그래서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을 같아서 언젠가는 그 재물이 떠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제가 시골에서 처음 목회를 하던 때의 일입니다. 두 분의 젊은 여자 성도가 한글을 깨우치지 못해서 한 달 가량 제가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그중 한 사람은 한글을 깨우쳤으나, 한 사람은 끝내 글을 배우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신앙은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끝내 한글을 깨우치지 못한 그 여성도가 ‘터진 웅덩이’라는 제 설교를 듣고, 주일에 목수 일을 가려는 그 남편에게 “00 아버지 또 터진 웅덩이 파러 갈라우?” 하면서 성수주일을 촉구했다는 것입니다. 옆 사람에게 서로 물어 보도록 하시겠습니다. “또 터진 웅덩이 파러 갈라우?” “천만에요, 왜 내가 미련하게 터진 웅덩이를 팝니까?” 

어떤 성도들은 아무리 귀가 닳도록 십일조의 원리를 가르쳐 주어도, 그것을 아껴 보겠다고 또 스스로 웅덩이를 팝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주일을 범하고 하나님의 것 십일조를 가로채었다가 그것이 모아진 일이 있었습니까? 아마 여러분 가운데 터진 웅덩이를 파 보신 분이 많이 있는 줄 압니다. 터진 웅덩이니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물처럼, 이런 일로 빠져 버리고 저런 일로 빠져 버리고, 결국 남은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복 받고 살기를 원하는 소원은 신자와 불신자를 막론하고, 또 우리 한국 사람만이 아니라, 온 세계 인류의 공통적인 욕망일 것입니다. 복을 마다하고 싫어할 사람이 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겠습니까? 이렇듯 모두가 복을 좋아하고 사모하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인데, 그런데 여기 반드시 기억해야 할 법칙이 있습니다. “축복은 귀한 것이지만, 그보다 더 귀한 것은 축복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내게 하나님 앞에서 복 받을 만한 생활이 없고, 내가 복 받을 만한 사람이 되지 못하고, 복을 구하는 사람은, 마치 ‘연목구어’ 곧 산에 가서 고기를 잡으려는 사람처럼,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이 시간 예레미야를 통해서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 모두 귀를 기울입시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오늘 우리 민족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와 평화를 마땅히 하나님 섬기는 일에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어리석게도 생수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터진 웅덩이를 파는 것 같은 우상 숭배하는 죄악을, 하루속히 청산해 버려야만 합니다. 국가건 개인이건 무슨 일을 하던지,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를 파는 것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농사를 지으려는 사람은 맨 먼저 논의 ‘물고’부터 막아야 합니다. 그리해야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이던지 저수지에서 흘러오는 물을 논에 저장할 수 있고, 물이 있는 논에라야 모내기를 할 수 있습니다. 물고가 터진 논이면 결코 벼농사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무식한 농부라도 농사를 지으려면 ‘물고’부터 막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혜로운 성도라면 조금 힘이 들어도 성수주일과 십일조 생활부터 먼저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터지지 않는 웅덩이를 파는 새 해 첫 주일에 꼭 명심하기 바랍니다. 

죤 프라이스는 ?미완성 비유?란 제목으로 이런 글을 썼습니다. <한 남자가 결혼했습니다. 신혼여행이 끝나자마자 어디론지 사라졌습니다. 몇 달 후 갑자기 나타난 남자를 보고, 신부는 몹시 화를 냈습니다. 남자가 말했습니다. “왜 화를 내오? 내가 분명히 결혼했고, 분명히 사랑한다고 말했고, 매주 수표를 보냈는데 더 무엇이 필요하오?” 아이가 입학을 했습니다. 입학식 다음날부터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가정을 방문한 선생님에게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우리 지미는 집에 있으나 학교에 가나 학자가 될 겁니다. 날마다 뒤뜰에서 자연 관찰을 하며 공부하고 있으니까요” 한 청년이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충성 서약을 마친 후 사라져 버렸습니다. 헌병에게 체포되었을 때, 청년은 말했습니다. “열다섯 살부터 총을 쏘아 왔다고요. 전쟁이 나면 나를 부르시죠. 당신들보다 나을 거니까?”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기로 했습니다.......> 글은 여기서 끝나고 있습니다. 

이 미완성 비유는 각자가 더 써 보라는 뜻에서 미완성으로 끝낸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뒤를 어떻게 써야 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기로 했습니다. 그 후로 그는 가뭄에 콩 나듯 교회에 출석하다가, 아예 세상으로 되돌아가고 가고 말았습니다.” 혹은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기로 했습니다. 그는 주일을 빼먹기를 식은 죽 먹듯이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 믿기를 시작했지만,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끝내 온전한 십일조 생활하지 못하고 터진 웅덩이만 팠습니다.” 이런 신자가 되겠습니까? 

여러분 모두 이러한 신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기로 했습니다. 생애 최대의 결단을 내린 후로부터 그는 하나님 중심하고, 성경 중심하고, 교회 중심한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하더니, 구원의 축복 이외에도 가정의 축복, 자녀의 축복, 건강의 축복, 교회의 축복, 물질의 축복까지 하나님께 풍성히 받아 누렸습니다.” 여러분, 꼭 이렇게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사랑하는 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터진 웅덩이를 파는 듯한 어리석은 성도가 한 분도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금년 한 해 동안 여러분의 모든 수고와 노력이 하나도 헛되지 않기를 바라고, 흘리는 땀방울마다 풍성한 축복의 열매로 결실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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