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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나의 앞 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 (시 31: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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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앞 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 (시 31:13-16)


(시 31:13)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었으므로 사방이 두려움으로 감싸였나이다 그들이 나를 치려고 함께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 
(시 31:14)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시 31:15)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시 31:16)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사랑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우리는 2011년도 첫 주일을 맞았습니다. 벌써 하루가 지났습니다. 어떤 글에서 오늘에 대하여 설명하는 글을 읽었습니다. 
오늘이란 어제 죽음의 문턱에서 “하루만 더 살 수 없겠느냐?” 고 안타깝게 부르짖으며 세상을 떠난 이들이 그렇게 애원하며 사모하였던 그 “내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나에게 오늘이 있음에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새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잊어버리고 싶고 묻어버리고 싶은 과거와, 기억하고 싶지 않은 마음의 상처들을 하나로 묶어 흘러가는 시간의 강물에 뛰어 보내고 새로운 맘 가다듬어 꿈과 희망을 심고 싶어서 아마도 해가 바뀔 때 마다 “새해”라고 이름하는가 봅니다. 그러나 새해라고 이름하여 새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살 더 먹는 나이와 달력의 년도가 2011년으로 바뀌었을 뿐 하늘도 땅도 흐르는 시간도,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마음이 어떠냐에 따라서 새해가 될 수도 있고 여전히 묶은 과거에 매여 있는 사람이 될 수 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새해가 되면 무엇인가 달라지리라는 기대를 갖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새해가 되었어도 마음이 달라지지 않으면 아무 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복 주시는 사람은 마음부터 바뀝니다.
새로운 마음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그 사람의 인격의 모습이며 신앙의 틀이기 때문에 굳고 완고한 마음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담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복받을 자들에게는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라고 했습니다. (겔11:19-20)

그렇습니다.
마음의 변화는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새해를 맞으려면 마음에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 를 받으라는 롬12:2절의 말씀처럼 변화 받은 마음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감격하게 할 수 있는 삶이 나오고 그러한 마음에 하나님은 은혜를 더하시고 복 주시는 것입니다. 

금년에는 예수님을 감격하게 할 수 있는 신앙생활을 해봅시다. 
우리의 신앙 수준을 한 단계 올려보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주이며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슬프게 하거나 근심시켜드리는 수준이 아닌 감격시켜 드리는 수준이 되게 말입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작가 빅토르 위고가 소설 한편을 써서 출판사에 보냈습니다. 읽어보고 출판을 해달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출판사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다. 위고는 궁금하여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 안에는 물음표(?) 한 자만 덩그러니 썼습니다. “내 작품이 어떠냐” 라는 의미였습니다.
며칠 후 출판사로부터 답장이 왔습니다. 그런데 답장에는 아무 말도 없이 느낌표(!) 한자만 쓰여 있었습니다. 의미는 “놀랍다” “잘 팔린다” 였습니다. 한 마디로 끝내준다는 감탄의 표현이었습니다. 그 작품이 바로 “레미제라블”입니다. 

누가 주님으로부터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온 이스라엘 중에서 이 만한 믿음을 본적이 없다” 감탄에 마지않았습니다. 금년에는 우리들의 믿음이 하나님을 감탄시켜드릴 정도의 수준이 되면 어떨까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을 감격드릴 만한 신앙이란 무엇인지 찾아보고 함께 은혜를 나누게 되기를 바람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원수들이 자신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의논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오해한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비방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으오며 사방에 두려움이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치려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오해하고 자신을 죽이려고 모의한다는 소리를 들을 때에 그리고 자신의 말이 그들에게 설명으로 먹혀 들어가지 아니할 때에 얼마나 가슴이 답답하고 원통하겠습니까? 다윗에게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슬픔과 외로움이 겹쳐 왔습니다.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고통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방에 두려움이 있나이다.” 라고 소리 치고 있습니다. 

사방에 있는 두려움
도대체 다윗이 느꼈을 사방의 두려움이란 어떤 것이었을까요? 
저의 어렸을 때 살던 고향집에서 약 5 km 나가면 바닷가 있습니다. 지금은 현대 간척 사업으로 논이 되어 버리고 말았지만 그 때는 광활한 개펄이었습니다. 1년이 몇 차례식 어른들은 물때를 맞추어 게를 잡으러 나갑니다. 
하루 종일 물이 들어올 때까지 개펄에서 게를 잡습니다. 어린 우리들이야 무슨 게를 잡겠습니까?? 그저 개펄을 뛰어 다니며 신나게 노는 거지요.
그런데 물이 들어올 저녁때가 되면 어른들은 슬슬 돌아갈 채비를 차리지만 어떤 때는 좀 늦을 때도 있습니다. 
개펄은 천천히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바닷물은 서서히 밀려들어오고 갈매기는 날아다니며 제멋대로 울어대고 .... 어른들은 이미 저 만치서 돌아갈 생각도 안하고 있고 그 때 저는 어린 나이에 무서움을 느꼈습니다. 사방에서 무시무시한 바다 귀신이 나올 것 만 같았습니다. 

아마 다윗이 고백한 사방에서의 두려움이란 어린 제가 느꼈던 것보다 훨씬 더 절망적인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방에서의 두려움은 단지 다윗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오늘은 사는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질병의 두려움, 실패의 두려움, 어떤 이는 늙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생에 매여 종노릇한다고 히2:15절에 말씀하였습니다. 
우리 일생은 주님을 위해서 존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생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일생을 위한 인생을 삽니다. 단지 한 번 사는 일생을 위한 인생을 사는 것은 대단한 서글픔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일생을 위해 인생을 사는 자가 되지 말고 영생을 위해 일생을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방에 있는 두려움 앞에서도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 다윗의 믿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러하여도의 믿음입니다. 아무리 사방에 두려움이 있다고 해도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겠다는 믿음입니다. 다윗이 고백한 믿음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주는 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신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사방의 두려움 앞에서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라는 자신감 즉 믿음에서입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바로 자신의 앞날은 주님 손에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14-16절을 다시 한 번 읽보겠습니다. 
(시 31:14)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시 31:15)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이러한 신앙은 기도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방으로 두려움이 임하여도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서남북으로 막혀도 하늘은 열려 있습니다. 신앙인은 사방으로 막혀도 하나님과는 통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과도 안 통할 때 그 때가 절망할 때입니다. 

로마에 있는 시스틴 성당에 가면 미켈란젤로의 거대한 천정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 그림에 보면 두 인물이 나오는 데 한 남자가 옷을 입지 않은 채 피곤하고 지친 모습으로 비스듬히 누워 있고 그의 손은 하늘을 향해 도움을 요청하듯 무기력하게 들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분명 허약하고 상처 입은 불행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건너편 천정에는 다른 사람의 그림이 있는데 힌 턱수염과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힘센 팔을 건너편에 있는 누워 있는 사람을 향해 뻗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화가는 인간에게 힘을 건네주려는 하나님과 그 힘을 받으려고 애쓰며 무기력하게 팔을 뻗치는 인간의 모습을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그림 속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힘을 아직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손과 인간의 손 사이에 간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손과 인간의 손 사이에 격차가 존재하고 사람의 손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지 않을 때 인간에게는 언제나 피곤함과 상처가 임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연결, 그것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 자신들을 위하여 필요한 것입니다.

다윗은 간절하게 자신의 시대와 하나님과의 연결을 원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
자신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말한 나의 앞날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개인의 시작과 종말 그리고 내세의 모든 것을 다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역사는 언제나 하나님을 떠나는 길이었습니다. 최초 인간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떠나간 이후로 자연적 조건 속에서 사는 인생들은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려고 애썼습니다. 이사야 53:6절에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거늘” 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각자 제 길로 갔던 단절의 역사를 극복하고 하나님과 교통되는 나의 시대를 만들어야 합니다. 
전1:4절에 보면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인 땅이 영원히 존재한다면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은 얼마나 영원하신 존재이겠습니까?

이제 사방에 두려움이 존재하는 나의 시대를 살면서 하나님과의 단절을 극복하고 영원하신 하나님과 교통하고 그의 능력의 손에 붙들려서 살아가는 믿음을 회복하여 축복의 한 해를 맞게 되기를 바랍니다.

영국 에딘바라 대학의 유명한 의학교수 심프슨 박사는 수술할 때 쓰는 마취약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어느 날 기자가 “선생님이 발견한 것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발견은 무엇입니까?” 하고 질문할 때에 그는 서슴치 않고 대답하기를 “내가 발견한 것 중에서 제일 가는 것은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과 죄인의 구주는 예수밖에 없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의 구주되신 예수님께 우리의 구원과 복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과 관계회복에 나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그 힘있는 권능의 손에 나의 연약한 손이 닿아 그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앞날이 우리의 손에 있지 않습니다. 주의 손에 있습니다 .<시32:15> 각기 제길로 걸어가던 단절의 길을 버리고 주님께로 돌아와 그 손을 잡음으로 주의 능력을 힘입어 복된 삶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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