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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를 알자 (요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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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알자 (요 12:1-8)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태초부터 계셨고,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던, 말씀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다.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는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죄 많은 인간들을 대신하여, 죽으시려고 인간이 되셨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심이, 가장 큰 은혜다. 그래서 (요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하였다. 
은혜는 히브리어로 헤세드(  ) 또는 헨(  )이라 한다. 아랫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푼다는 말이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자격도 없고, 능력도 없는 자에게, 호의와 친절을 베풀어주심을 은혜라 한다. 우리말로 번역할 때, 은총, 자비, 인자, 인애, 등으로 표현했다. 

헬라어로는 카리스(    )라 한다. 기쁨, 호의, 선물을 뜻한다. 아무 공로 없이 자에게, 거저 주는 하나님의 선물을 말한다. 예수님의 주변을 살펴보면, 온전한 사람들이 없었다. 죄인들인, 세리, 창녀, 병자들인, 소경, 저는 사람, 중풍병자, 또 문제 많은 귀신들린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에 항상 들끓었다. 

낙망하며 고통가운데 있는 자들을, 건져내기 위해 오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은혜를 베풀러 오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에서 상처받고 쓰러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되어야 한다. 문제만 일으키는 사람들, 죄만 짓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면, 치유 받고 변화된다. 

하나님의 은혜는 교회 밖에서, 전혀 발견할 수 없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해야, 변화될 수 있다. 얼굴이 변하고, 삶이 변한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우리에게 친근감을 주고, 감동을 주는 인물이 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마리아다. 

마리아는 돈 많은 사람도 아니다. 오히려 매우 낮은 계층의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부모님이 있는, 따뜻한 가정 출신이 아니었다.,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3남매만 모여 사는, 가난한 결손 가정 출신이었다. 이런 환경 때문인지 모르지만, 오빠 나사로가 젊은 나이에 병이 들어 죽었다. 

이런 위기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오빠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은혜를 입게 되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면, 아무리 큰 시험과 환난이 있다 하더라도, 희망과 부활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1. 마리아의 헌신(1-2上)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예수님이 마리아의 집에 오신 이유는, 예수님이 마리아의 집에 은혜를 베푸신 것에 대하여, 감사 드리기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그런데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나드 향유(인도에서 수입한 아주 귀한 향유로, 샤넬 넘버5보다 몇 배, 몇 십 배 더 비싸다.) 당시 가장 귀한 손님이 오면, 머리에 이 향유를 살짝 발라주는 것이, 최고의 예의였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주저 없이 망설임 없이, 다 쏟아 부었다. 

너무나도 충격적이고, 아름다운 사건이기에, 오늘날까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장면을, 교회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헌신의 장면이라고 말한다. 사실상 마리아의 행동은 파격적이고, 충격적이었다. 

유대 여인들은 결혼을 위해서, 혼숫감으로 향유를 예비한다. 그런데 그 혼숫감으로 준비했던 나드 향유를, 예수님께 콸콸 쏟아 부었다. 그 가격이 (5) 300데나리온이라 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다. 하루 일당으로 10만원으로 계산하면, 3천만 원짜리 향유다. 이것은 다 쏟아 부었다. 

유대 여인들은, 머리털을 대단히 소중하게 여겼다. (고전11:15上)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라고 했다. 그런데 그 영광스러운 머리털로, 인간의 가장 하찮은 자리에 있는 발, 노예만이 만지고, 씻어주는 그런 발을 씻는, 헌신된 모습을 보였다. 

(시23:5)에서 다윗이 노래하기를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하였다. 나를 위한 잔치가 열리고, 나를 초대한 주인이 나의 머리에 기름을 발랐다는 말은, 나를 최고로 높여주었다는 기쁨에서 나온 표현이다 

그래서 향유를 붓는 장면은, 머리털로 발을 씻는 장면은,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요, 가장 헌신적인 장면이다. 그래서 많은 목사님들이, "우리도 마리아의 헌신을 본받자." 이렇게 계속해서 강조해왔다. 그런데 아무리 외치고, 몸부림을 쳐도, 교회들이 그렇게 변하지 않는다. 

마리아와 같이 헌신하는 사람이, 100명에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마리아가 이렇게 헌신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많은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평소 베다니에 자주 오시던,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해 들었다. 깊은 은혜를 받았다. 오라비가 죽음에서 구원받았다. 

이 모든 은혜의 과정을 거치며, 마침내 예수님에게, 가장 사랑 받는 사람이 되었다. 즉 은혜 위에 은혜, 차고 넘치는 은혜를 받았다. 그래서 300데나리온의 향유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엄청나게 비싼 것으로 보였지만, 마리아는 은혜를 충만히 받았기에, 그 300데나리온이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아깝고, 정신이 나간 행동이지만, 마리아가 볼 때는 기쁨이었다. 은혜를 맛본 사람이기 때문이다. 은혜를 맛보지 못한 사람들은, 모든 것이 지나치다 생각한다. 그래서 지나치다 생각한다. 은혜를 모르면, 모든 것이 다 아까워 보이고, 지나치게 보이고,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 은혜를 받으면, 섬기는 봉사, 바치는 시간, 드리는 예물이 하나도 아까울 것이 없다. 기쁨 가운데 헌신의 자리로 나아간다. 성경과 교회사를 보면,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았던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먼저 은혜를 충만히 받은 사람이다. 은혜를 받은 사람이 헌신한다. 

은혜를 받지 않고 일을 하면, 그것만큼 어색한 일이 없다. 헌신을 하면 어쩐지, 어색하게 보이는 사람이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주 마지못해서 헌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볼 때, 불안하다. 

은혜를 받지 않고 헌금을 하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헌금할 수밖에 없다. 사람을 속이게 된다. 풍성할 수 없다. 인색하게 된다. 자기가 가진 향유를 절대로 다 부을 수가 없다. 왜 사람들이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못하는가? 아까워서 못 드린다.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으면, 드리는 것이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된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문제는, 헌신의 문제가 아니다. 은혜 받는 것이 문제다. 많이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마리아와 같이 더욱더 헌신하게 된다. 은혜 받으면,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다. 

향유가 필요한 곳은 어디인가? 가장 낮고 천하고, 가장 더럽고, 가장 냄새난 곳이다. 주일예배가 다 끝나면, 교회구석구석에 쓰레기가 있고, 쓰레기통이 넘쳐난다. 쓰레기통을 비우는 사람, 쓰레기를 줍는 사람, 바로 향유를 붓는 사람이다. 가장 더럽고, 가장 냄새난 곳, 거기에 향유를 부어야 한다. 

2. 그러나 가룟 유다는(4) 

"(그러나)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우리말 성경에는 빠져있다. '그러나'라는 단어로 시작하고 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물품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가룟 유다는 2가지로 소개된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하나로, 예수님을 잡아 줄 사람이었다. 그만큼 은혜를 모르는 인물이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을 저버렸다.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으니, 가룟 유다는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유다는 왜 값비싼 것을 허비하느냐? 가난한 자에게 주면, 얼마나 좋으냐고 비난을 하였다. 은혜가 있는 곳에는 비판이 있다. 

가룟 유다의 말은, 그럴듯하게 들린다. 가난한 자들을, 많이 생각하는 듯하다. 그래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의하면, 다른 제자들이 처음에는, 가룟 유다의 속셈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 때, 다른 제자들도 똑같이, 가룟 유다의 말에 동조했다. 

본문을 기록한 사도 요한도, 그 당시로서는 가룟 유다의 속셈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도 가룟 유다의 말에 동조했다. 시기하는 말에 동조하지 마시기 바란다. 나중에 사도 요한은, 성령 하나님의 감동하심에 따라서, 가룟 유다가 그와 같이 말한, 진짜 동기를 알게 되었다.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갸룟 유다는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었다(요6:70). 성경의 위대한 인물은, 은혜를 아는 사람이다. 은혜를 모르면, 불평이 나오고, 은혜를 모르면, 짐승과 같다. 결국에는 버림받는다. 

(행1:18)에 의하면,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판 후에, 그 길로 물러가서, 스스로 목을 매었다. 그 때 그의 목을 맨 끈이 풀렸든지, 아니면 목을 매었던 나뭇가지가 부러졌던지, 그의 몸은 곤두박질했다. 그 결과 그의 배가 터지고, 그의 배 밖으로 창자가 다 흘러 나왔다. 

그의 삶은,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오늘 본문에서, 가룟 유다는 마리아와 너무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했다.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가 소중히 여기던 향유를 깨뜨렸다. 그리고 아낌없이, 예수님께 부어드렸다. 

은혜를 알고 일을 하면 행복하다. 그러나 은혜를 알지 못하고 일하면, 고통일 뿐이다. 동물도 받은 은혜를 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힘들고 어려울 때 베풀어주었는데, 그 은혜를 알지 못하면, 얼마나 섭섭한가? 

세상을 보는 관점은, 이렇게 둘로 분류할 수 있다. 돈의 관점, 경제적 관점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사랑의 관점으로 볼 것이냐? 사랑의 관점에서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부은 것은, 결코 낭비가 아니다. 그보다 더한 것을 할 수도 있다. 사랑하면 아까운 것이 없다. 

사랑하면 아무리 주고, 또 주어도 더 주고싶다. 우리 부모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다. 우리도 우리 자녀들을 그렇게 사랑하고 있다. 우리 자녀의 학교나 학원에, 태워주고 태워오고, 맛있는 음식 사주고, 좋아하는 것을 해준다. 

그런데 자녀를 위해 사용한 시간과 돈을, 아깝다고 생각하는 부모는 없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사랑을 받았다.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사망에서 영생으로 옮겨졌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원한 복을 누리게 되었다. 이보다 더 큰사랑이 어디 있는가? 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주님께 감사하며 영광돌리는 삶을 살자! 

3. 예수님의 평가(7-8).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 때 제자들은 아무도, 가룟 유다의 속셈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서 모든 제자들이, 가룟 유다의 위선적인 말에 동조하면서, 마리아를 못마땅한 듯이 바라보며 질책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셨다.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먼저 "(너는) 그를 가만 두라."고 명령하셨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독설로부터, 가련한 마리아를 보호해주셨다.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놔두라는 말이다. 시기하는 말은 우리의 영혼을 묶어 놓는다. 이미 향유는 예수님에게 부어졌다. 따라서 더 이상 향유를, 간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풀어 설명하면, 이런 뜻이다. "너는 그를 가만 두어라. 그가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지금까지 간직하여 왔노라." 마리아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죽으러 올라가심을 마리아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마리아는, 더 이상 예수님에게 가까이 갈 수가 없게 된다. 마리아는 더 이상 자기가 예수님을 뵈올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 마지막 기회를, 마리아는 놓칠 수 없었다. 그래서 마리아는 자기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 곧 향유를 가져다가 예수님께 부어 드렸다. 
그리고 마리아는,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다. 똑같은 날, 똑같은 장소에서, 마리아의 생각과 가룟 유다의 생각은, 너무도 달랐다. 마리아는 오직 예수님만 생각하면서,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돈 때문에, 예수님을 팔아 넘길 생각을 하고 있었다.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는 예수님이 모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물론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을 무시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 예수님도 가난하게 사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지만, 예수님은 머리를 둘 곳도 없이 사셨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은, 우선 순위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다. 즉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묻고 계신다.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일이 먼저냐?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며,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우선적이냐? 가난한 자들은 항상 제자들과 함께 하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일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 엿새 후면,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셔야 했다. 그러니 어디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하겠는가? 물론 우리는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일이 중요하다. 우리는 늘 그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일은,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예수님을 높이며,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가룟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다. 끝내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회개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결국 가룟 유다는 저주받은 사람이 되어,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면, 좋을 뻔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반면 마리아는 축복의 사람이 되었다. 마리아는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랑과 감사의 향기로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다. 그리해서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칭찬을 받았다. 

(마26: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얼마나 멋있는 인생이 되었는가? 우리도 이러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란다. 

결론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시나요? 부모님의 은혜를 아시나요? 잊으면 동물보다 못한 인생이 된다. 은혜를 알고, 보답하는 마음으로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우리 가운데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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