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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보내소서 (사 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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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내소서 (사 6:1-13)


작년 하반기에 연이어 터졌던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피격' 사건은 실로 천인공노할 북한군의 무력도발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건들로 인하여 딱 한 가지 고무적인 현상이 나타났는데, 바로 우리나라의 청년들이 해병대에 지원하는 비율이 급상승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뿐 아니라 육군을 비롯한 다른 군대에서도 지원하는 숫자가 늘게 되어 입대 예정자들의 소집영장 발부가 뒤로 밀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대한민국의 장래를 걱정하던 사람들로서는 절로 눈물이 핑 돌며 코끝이 찡하도록 감동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국가의 최고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라는 사람의 입에서 신성한 병역의무를 두고 '군대에서 썩는 것'이라는 망언까지 나왔던 좌파 정권 시절을 통과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 청년들의 가슴 속에 이런 순수한 애국심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같은 군복무라 해도 '억지로 끌려가듯이' 입대해서 '썩는 생활'을 어쩔 수 없이 지내는 것과 '기꺼이 자원하여' 입대해서 '국방의 의무를 보람 있게' 수행하는 것은 그야말로 천양지차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기독신자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직분을 받아 복음전파 사명을 수행할 때에도 역시 그처럼 '억지로'가 아니라 '기꺼이'라는 자세가 가장 중요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소명(召命)하신 본문의 유명한 사건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강제적인 동원' 대신에 '자발적인 지원'을 바라셨고, 이사야 역시 그런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기꺼이' 그 사명을 받아들이는 아주 멋진 장면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떤 성도가 이처럼 복음전파 사명을 맡기시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께 '나를 보내소서'라고 자발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소명인'이 될 수 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소명인은 우선 하나님을 거룩하신 절대주권자로 경외하는 '신앙인(信仰人)'이어야 합니다.

소명인은 그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을 부르시는 '주인'이 누구이신지부터 정확하게 알아야 하는데 이사야 선지자는 이 출발점을 바로 찾고 있었습니다.
본문 1절부터 4절에 "1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4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고 기록했습니다.

이사야는 우선 온 '천지만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웃시야 왕"은 솔로몬 왕 이후에 남조 유다 왕국을 다스린 왕들 중에서는 최고로 훌륭한 왕으로 평가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통치 하에 있을 때에 유다는 정치 경제 국방 모든 분야에 있어서 성장을 거듭했음을 역대하 26장이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점은 정말 모처럼 만나게 되었던 그런 훌륭한 왕이 죽게 됨으로써 유다 백성들이 실망과 슬픔에 빠져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바로 그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주" 여호와 하나님을 뵈옵게 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높이 들린 보좌'는 바로 세상의 그 어떤 왕도 앉을 수 없는 가장 높은 보좌이므로 거기에 앉으신 하나님은 두말할 필요 없는 최고의 통치자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주권적 속성'은 이어지는 묘사에서 계속 강조되고 있습니다.
"스랍"이란 하나님의 하늘 보좌 곁에 있는 영물을 가리키는데, 간단하게 말하자면 '특별한 천사'들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 스랍들이 하나님을 "모셔 섰는데"라고 한 것은 곧 그들의 직분이 하나님을 '섬기는 종'이었음을 나타냅니다.
또한 그 스랍들이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리고 다른 두 날개로는 발을 가리었다'고 한 것은 하나님을 엄청나게 두려워하는 자세로 섬기고 있음을 가리키며, '나머지 두 날개로는 날아다니고 있었다'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일을 즉시 수행하기 위하여 완전무결한 준비태세를 항상 갖추고 있음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 스랍들이 내는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했다"는 말씀은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양드리는 일에 온 정성과 힘을 다 쏟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스랍들에 관한 이런 일련의 묘사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세계로부터 섬김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지극히 높고 위대하신 주권자 되심을 극명하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이사야 선지자는 웃시야 아니라 세상의 그 어느 훌륭한 군주라 해도 비교조차 될 수 없는 최고의 절대주권자, 이 세상 역사에서 수많은 왕들이 등극했다가 물러나는 와중에서 오직 각 나라와 민족을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홀로 주장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늘의 통치자를 뵙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보았던 하나님은 또한 '거룩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스랍들이 하나님을 창화하면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세 번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이와 같은 '3회 반복'의 표현은 바로 '최상급'을 뜻하는 것으로서, 곧 '최고로, 지극히 거룩하다'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스랍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은 사실 여러 가지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이토록 강조한 이유는 두말할 것 없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대표적인 속성 중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 자체의 순수성'과 또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 죄와는 아무 상관도 없으심'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속성 중에서 사람의 본성과 극단적인 차이가 나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 '하나님의 완전무결하신 거룩성'인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바른 소명의식을 가지고 주님과 그 몸 된 교회와 그 지체 된 성도들을 섬기고자 한다면 제일 먼저 이런 하나님부터 똑바로 알고 시작해야만 합니다.
교회생활을 하면서 자기 자신부터 높이려 하게 되면 자연히 하나님을 높이고 섬기기는커녕 오히려 뒷전으로 밀어내는 신성모독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감히 사람과 같은 수준에 두고 대하는 교인 역시 오십보백보이며, 그런 식으로 출발하는 것은 '소명인'은커녕 아직 '신앙인'조차 못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만이 모든 존재세계의 최고 주권자이시며 지극히 높임을 받으셔야 마땅한 분인 줄로 알고 모셔야만 합니다.
온갖 하늘의 영물들과 마찬가지로 이 땅의 모든 피조물들과 또한 그 피조물 중에 하나에 불과한 우리 사람까지도 이런 하나님 앞에서는 감히 고개조차 들 수 없는 경외의 자세로 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죄인인 사람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이심 역시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와 같은 '100퍼센트 무흠하신 완전순결성'은 사람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인식하게 될 때에 즉각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극단적인 차이점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지극히 거룩하신 절대주권자'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줄을 깨닫는다면 어떻게 감히 '노'(no)라고 대답하거나 잠시 머뭇거리기라도 할 수 있겠습니까?
살아 계신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는 '신앙인'이라면 결코 그럴 수 없으며 오직 즉각적인 절대복종으로 순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물 가운데서 사람만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지음 받은 목적 자체가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를 지으신 '거룩하시고 지고하신' 창조주께서 우리를 쓰시겠다고 부르실 때에 즉시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응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소명인은 또한 자신의 죄를 용서함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구원인(救援人)'이어야 합니다.

즉 소명인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순종할 수밖에 없는 '동기'를 바로 이것이 부여해 줍니다. 
5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5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6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8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했습니다.

'유한하고 불완전하며 죽음을 피할 길 없는 인간'이 '무한하시며 완전무결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절로 자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무력감과 수치와 절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여기서 자신이 "부정한 사람"임을 절실히 자각하게 된 이유 역시 지금 그의 앞에 나타나신 하나님과 자기를 비교해 볼 때에 그 차이가 너무나도 극단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처럼 더러운 죄인에 불과한 사람이 그처럼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된 것을 본 이사야는 그래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두려움에 가득 찬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이사야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그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심각한 문제, 즉 원래는 도저히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부정한 사람'이라는 이 차이가 먼저 어떤 식으로든지 해결되어야만 했던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곧 이어지는 6절 이하에서 바로 그 '문제 해결'이 즉시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스랍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즉 지금 불꽃이 "핀 숯"을 가지고 이사야 선지자에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이사야의 "입에 대면서" 그의 "악이 제하여졌고" 그의 "죄가 사하여졌다"고 선언해 주었습니다. 즉 조금 전까지 이사야로 하여금 그처럼 벌벌 떨게 만들었던 그의 '부정함'을 순식간에 깨끗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사야 쪽에서 먼저 행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가 자기 부정함을 씻어 달라고 하나님께 요청을 한 것도 아니었으며 하나님께 어떤 조건을 내걸고 맹세를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사야가 한 것이라고는 오직 하나님을 만나 뵙게 된 순간 그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심과 거룩하심 앞에 압도당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부정함을 더욱 절실히 인식하게 됨으로써 그저 '화로다 나여'라고 두려워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순간 전적으로 먼저 손을 내밀어 주시면서 이사야를 정하게 해 주셨습니다.
이사야 편에서는 자기 스스로를 정하게 만들 아무 능력도 공로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하나님 편에서 주도적으로 그런 놀라운 사죄의 은총을 '무조건적'으로 베풀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직후에 하나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방금 그처럼 고맙기 짝이 없는 사죄의 은총을 받아 감사 감격하고 있던 이사야는 즉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진실한 소명인이 되기 위해서는 바로 이 과정을 필수적으로 체험해야만 합니다.
호랑이를 실제로 만나 보지 못한 사람이 호랑이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는 그저 자기가 아는 것만 가지고 별의별 소리를 다 할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호랑이를 자기 눈앞에서 만나게 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그 앞에서 새파랗게 질려 부들부들 떠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진정 하나님을 자신의 인격을 통해 만나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에 관해서' 말할 때에는 "신은 이러이러해야 이치에 맞고 저러저러해야 사람이 믿고 의지할 만할 것이다."라고 온갖 잡다한 이론을 늘어놓게 됩니다.
하지만 살아 계신 하나님을 진짜로 만나게 된 사람은 그 '지극히 높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결정적인 약점 즉 자신은 그저 '진노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에 불과함을 즉시 깨닫게 되고 두려움에 벌벌 떨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놀랍고도 고마운 일은 우리가 그처럼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만 인정하고 자복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무 조건도 없이 즉시 우리의 그 '부정함을 완전히 씻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 '조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대속을 통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이미 다 충족시켜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입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라고 두려움에 찬 탄식이 터져 나오게 되는 바로 그 직후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라는 기가 막히는 사죄 선포가 즉시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죄 사함의 은혜를 분명히 체험하고 확신한 신자라면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죽어 마땅했던 죄인'을 살려 주신 주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낼꼬'라고 부르실 때에 당연히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라고 뜨거운 감사와 함께 기꺼이 헌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끝으로 소명인은 '남은 자' 마지막 한 사람까지 찾아 모으는 '교회인(敎會人)'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곧 부르심을 받고 나아가는 소명인에게 그 사명 수행에 대한 '소망'이 됩니다.
9절 이하 13절에 "9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11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12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13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막 소명을 받들고 나아가려는 이사야 선지자에게 미리 충고의 말씀을 주고 계셨습니다.
9절과 10절에 기록된 말씀은 하나님께서 일부러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그 눈이 감기게" 만드셔서 그들로 하여금 이사야를 통해 선포될 당신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게 만드시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이제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할 때에 백성들이 나타낼 일반적인 반응이 어떠할 것인지를 하나님께서 그에게 일러 주시면서, 나중에 실제로 그런 일이 생기게 될 때 이사야로 하여금 그 백성들의 불순종을 책망할 말까지 미리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 유다 백성들은 "내가 이 말씀을 듣고 내 죄 문제가 '고침을 받게' 되면 어떻게 하나?'라고 걱정하는 사람처럼 반응할 것 "이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가 소명을 받들고 나아갈 때에 백성들은 그 말씀을 경청하고 회개함으로써 자기네의 영혼과 육신이 살게 되는 일이 마치 결코 일어나서는 아니 될 무슨 큰 재앙이나 되는 것처럼 여기면서 아예 들으려고도 하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이런 예고를 듣게 된 이사야 선지자는 기가 찰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11절에서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즉 '하나님, 그처럼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현상이 언제까지 계속되겠습니까?'라고 여쭈어 보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11절 하반절부터 13절 상반절에서 더욱 기가 막힐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유다의 "성읍"과 "토지"는 "황폐"하게 되어 "거민"이 없으며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겨" 버리셔서 그 땅이 완전히 "폐한 곳"이 될 때까지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현상은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완전히 멸망당하게 될 때까지 변함없이 계속될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또 실제로 나중에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유다가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온 나라가 폐허가 되고 백성들은 먼 이국 땅으로 포로로 잡혀 간 후에 마지막 "십분의 일"밖에 남지 않게 되었지만, 그들 역시 완전히 "삼키운바" 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사야 선지자가 소명을 받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해야 할 필요가 도대체 무엇이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이유를 13절 하반절에서 마지막으로 들려주고 계십니다.
곧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사야 선지자가 자기 사명을 수행할 때에 끝까지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아주 중요한 사실이었습니다.
비록 절대다수의 유다 백성들이 자기가 전파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끝내 '나무가 베임을 당하는' 멸망의 길로 가겠지만, 그 가운데서도 눈에 보일 듯 말 듯 한 '거룩한 씨'는 결코 죽지 않고 계속 살아 있을 것이었습니다.
비록 이사야 선지자의 눈에 당장 보이는 것은 조국 멸망이라는 어처구니없는 현실밖에 없을지라도, 그가 자신의 말씀 선포 사역을 끝까지 수행해 나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통하여 선민의 역사가 계속 이어질 '그루터기'가 보전되게 하실 것이었고, 바로 여기에 이사야 선지자의 사명 수행에 대한 소망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수행할 때에도 역시 대다수의 사람들은 다 거부반응만 보입니다.
전도지를 전해 주면 인상을 쓰고 귀찮아하면서 길바닥에 내버리고, 선교지에 교회를 세우면 자기네 전통 문화와 고유 종교를 파괴하려는 행위라고 생각하면서 온갖 위협과 박해를 가해 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두고 실망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원래 사람의 악한 본성은 복음의 말씀을 거부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전도해도 이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마지막 멸망의 자리 즉 지옥에 가게 되는 바로 그 순간까지도 절대로 회개하지 않을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계속 이 사명을 수행해야 하는 것은, 이처럼 멸망해 가는 세대 가운데 그래도 어느 한 구석에는 '거룩한 씨'와 '거룩한 그루터기'가 분명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인간 사회는 분명히 복음 앞에서 냉담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그 속의 어디엔가 '하나님의 택하신 남은 자'가 분명히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주님께서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며, 교회가 이 세계사 속에서 실제적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배경인 것입니다.
비록 지금 당장은 외롭고 힘들더라도 아직도 '14만4천인'의 숫자를 채울 '남은 자'들이 우리 이웃과 조국과 세계 구석구석에 반드시 남아 있다는 소망을 끝까지 지키면서 우리가 교회를 통하여 받은 이 고귀한 구령사명에 끝까지 충성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앞에는 정말 불쌍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세상의 왕들을 기대하며 그들의 정치와 정책과 공약에만 자기 온 인생에 대한 기대를 걸고 살아가는 자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일 뿐임을 알지 못하는 무지하고도 교만한 자들, 여전히 복음을 거부하고 회개하지 않는 가운데 오로지 지옥의 영벌 저주를 향하여 치닫고 있는 불쌍한 인생들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올해도 우리 경향교회를 통하여 여러 가지 '자원봉직'에 서약을 하고서 출발한 것입니다.
'자원봉직'이란 문자 그대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기쁘게 섬기는 직분'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어떤 이유에서든지 만약 '억지로,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고역'이라면 그야말로 '시간과 노력을 썩히는 헛수고'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교인 - 주인부터 제대로 알지 못하니 애당초 소명인이 될 길이 없습니다.
자기가 진노 받아 마땅한 죄인이었음을 깨달을 줄 모르는 교인 - 사죄 은총에 대한 감격적인 감사가 없으니 기쁨으로 섬길 마음도 생기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 가시는 '구속사 성취'에 대한 자각이 없는 교인 - 자기가 섬기는 일에 대한 큰 소망이 없으니 매사에 자신이 없고 힘이 빠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소명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절대주권자'를 진심으로 경외할 줄 아는 '신전인격자'는 필연적으로 구령 운동의 소명에 응답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죄 용서' 받았음을 확신하는 '구원인'은 나 같이 '죄인 중에 괴수' 된 자를 불러서 써 주신다는 자체만 생각해도 더더욱 감격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아직 '남아 있는 택자'들이 분명히 있음을 아는 성도는 '교회'를 중심으로 충성하는 모든 '선한 일'에 대하여 그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마지막 결승 테이프를 끊을 때까지 오직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내가 누구를 보낼꼬'라고 '자원하는 일꾼'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즉시 기꺼이 응답하며 나아가는 소명인이 됨으로써, '때가 이르매 반드시 거두게 될' 이 2011년에 주님께서 가장 귀중히 여기시는 '구령의 열매'를 큰 단들로 묶어 천국창고에 들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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