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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온유한 사람 (마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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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사람 (마 5:5)


아마도 고 김대중 전대통령만큼이나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던 사람도 없을 것 같습니다. 
이분은 죽을 고비를 다섯 번이나 넘겼고, 6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고, 10년이나 연금을 당했고, 또한 해외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을 했습니다. 그래서 강열한 투사라는 이미지를 가지게 됐습니다. 게다가 이념적 성향이 진보적이기 때문에 군사독재시절부터 빨갱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져있었습니다. 이런 경직된 이미지 때문에 대통령 선거에서 세 번이나 낙선의 쓴 잔을 마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97년 대선을 앞두고 철저하게 이미지 변신을 시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롭게 들고 나온 이미지가 소위 “알부남”입니다. “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라는 이미지입니다. 당시 거물 정치인으로는 파격적으로 TV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습니다. MBC의 인기 프로그램 “이경규가 간다”라는 코너에 나와서 코미디언과 웃고 떠드는 그야말로 인간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인기가요 DJ DOC의 “DOC와 춤을”이라는 노래를 개사해서 “DJ와 함께 춤을”이라는 노래를 만들고, 김대중 후보가 이 노래에 맞춰 어정쩡한 모습으로 춤을 추었습니다. 또한 당시 정치인으로는 처음 화장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이미지 변신은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이런 ‘알부남 전략’에 힘입어 드디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은 힘 있는 지도자, 능력 있는 지도자 보다 부드러운 지도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해 준 하나의 정치사적 사건이 되었습니다.

노자는 “유약승강강”(柔弱勝剛强)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굳세고 강한 것을 이긴다”는 말입니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어떻게 굳세고 강한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말일까요? 노자는 부드럽고 약한 것은 다만 표현 형식에 불과하고, 그 이면에 숨은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실제로 졸졸 흐르는 냇물이 모난 돌을 깎아냅니다. 그리고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어버립니다.

그렇습니다. 부드러움이 힘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강한 것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미 예수님께서 이 부드러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부드러운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부드러운 사람이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부드러운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난 뒤 사람이 부드러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저 이미지만 변할 것이 아니고, 실제로 그 존재 자체가 부드러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온유함이란?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드러움이란 무엇일까요? 우리 그리스도인이 추구해 가야할 부드러움이란 무엇일까요?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온유함”이라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우리말로 온유(溫柔)는 온화(溫和)하고 유순(柔順)하다는 뜻입니다. 쉽게 풀어보면 그 성품이 따뜻하고 부드럽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온유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의 성품이 따뜻하고 부드럽다고 느낄 때, 온유하다고 말하게 됩니다. 자기 스스로 나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람이라고 말한다고 온유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온유하다는 성품은 전적으로 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붙여준 성품의 특징인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온유한 성품은 어떤 것일까요? 사람들이 따듯하고 부드럽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첫째, 겸손입니다. 성경을 보면 겸손과 온유가 비슷한 뜻으로 함께 사용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 11:29를 보면 예수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엡 4:2를 보면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겸손한 사람이 온유하고, 온유한 사람이 겸손하다는 뜻입니다.

사실 자기를 낮추어야 다른 사람들을 따뜻하고 부드럽게 대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높이고 남을 깔보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게 됩니다. 결코 따뜻하고 부드럽게 대할 수 없습니다.

둘째, 인내입니다. 민 12:3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당시 모세만큼 온유한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셨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그 앞 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모세의 형과 누이가 모세를 찾아와서 항의했다는 말입니다. 모세를 공격했고 인격적으로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이런 공격과 인격 모독 행위를 잘 참았습니다. 맞대응하거나 화를 내거나 다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모세의 모습을 보시고 온유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실 성질을 부리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은 따뜻하고 부드러울 수 없습니다. 잘 참고 견디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따뜻하고 부드럽게 대할 수 있습니다.

셋째, 관용입니다. 요 2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을 다시 만나시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고 있던 베드로와 몇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저들을 그야말로 부드럽고 따뜻하게 대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마음속에 무거운 짐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다 아시고 계셔서 혼이 나도 크게 혼이 나야할 상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끝내 그 이야기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따뜻하고 부드럽게 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너그럽게 베드로의 허물을 용서해 주셨던 것입니다.

사실 상대방의 허물과 잘못을 관용할 수 없는 사람은 따뜻하고 부드러울 수 없습니다. 상대방에 대해 너그러울 때 따뜻하고 부드러울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들 앞에서 자기를 낮출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무례한 행동이나 비판까지도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다른 사람의 허물과 잘못도 너그럽게 관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온유하게 되려면?

그러면 어떻게 온유하게 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성품이 따뜻하고 부드럽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답을 찾기 위해서는 온유라는 말의 의미를 보다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어 성경에는 ‘온유하다’라는 말이 헬라어 ‘프라우스’(praus)라는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헬라어에서 이 프라우스라는 말이 사용되는 실 예를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환자가 고열에 시달리고 있을 때 약을 먹고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왔을 때 프라우스라고 합니다. 사나운 맹수를 조련시켜서 말을 잘 듣게 됐을 때 프라우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온유하다는 이 프라우스라는 말을 사람의 성품에 사용할 때는 “힘이 잘 조절되어 그것이 성품에 나타나는 특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물 조련사 랄프 헬퍼라는 사람이 쓴 [잠바]라는 책이 있습니다. 자신과 잠바라는 사자가 18년 동안 함께 살면서 겪었던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이 책을 보면 도저히 믿기 힘든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랄프 헬퍼가 설립한 “아프리카 U.S.A"라는 동물보호소가 홍수로 우리가 유실되고 축사가 무너져 내렸습니다. 조련사들이 동물을 구하려고 물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물이 차오르는 우리 안에서 맹수들이 참을성 있게 조련사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련사가 우리 문을 열자 맹수들이 침착하게 헤엄쳐 물가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조련사가 기진맥진했는데 놀랍게도 그 맹수들이 헤엄치며 조련사를 물가로 인도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랄프 헬퍼의 애정조련법이 맹수를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과 맹수 사이의 신뢰를 쌓게 해서 사람이 사자를 구하고 또 사자가 사람을 구하는 일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온유는 사람이 본래부터 타고난 성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자같이 차갑고 거칠던 성품의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의 조련을 받아서 양처럼 따뜻하고 부드럽게 변화된 성품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여러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모세입니다. 원래 모세는 공명심과 혈기로 가득 찼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의가 강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동족을 괴롭히던 애굽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살인 후 할 수 없이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서 40년 동안을 양을 치며 연단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 때 그는 하나님의 조련을 받아 그의 성품은 온유하게 다듬어졌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온유하게 되는 구체적인 길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 조련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조련을 받을 때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령 충만한 것입니다. 바울은 갈 5:22-2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온유를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 존재 안에 임하셔서 먼저는 우리에게 예수 믿게 하시고 믿음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구원 받은 성도들의 존재 안에 내주하시면서 그 사람을 변화시키셔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만들어가십니다. 성령의 열매란 이렇게 성령이 내주하시면서 성도들을 변화시키셔서 일어난 성품의 특성을 말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온유입니다.

그렇습니다. 온유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새롭게 빚어지는 성품입니다. 우리 스스로 이루어갈 수 있는 성품이 아닙니다. 성령이 우리 심령 안에 거하실 때 우리 인격 안에 맺혀지는 성령의 열매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늘 성령충만을 유지하려고 힘을 써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 배우는 것입니다. 마 11:29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예수님께서 온유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의 온유를 배워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온유함의 결정적인 모델이십니다. 우리는 늘 그 모델을 본받으려고 해야 합니다. 
우선 예수님의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낮추시려 하시던 그분의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의 인내를 배워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시며 갖은 모욕과 비난을 받으시면서도 묵묵히 참으셨던 그분의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관용을 배워야 합니다. 철없는 제자들이 시행착오를 범하고 허물과 잘못을 저질러도 너그럽게 지켜보시고 관용을 베푸시며 때를 기다려주시던 그분의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온유하게 되면?

오늘 본문을 보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온유한 성품을 이루게 되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품이 온유한 것과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우선 온유한 사람이 정말 이 세상에서 많은 땅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뜻일까요? 이 세상에서는 힘이 세고 포악한 자들이 땅을 많이 얻는데 어떻게 온유한 자가 땅을 얻는다는 것일까요? 다음으로 팔복 말씀 중 첫 번째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천국을 얻는 사람과 땅을 얻는 사람이 다르다는 것일까요? 다시 말해서 심령이 가난하면 천국을 얻고, 온유하면 땅을 얻는다는 것일까요? 정말 이렇게 구분이 되는 것일까요?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말을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제자들과 무리들은 그 뜻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저들이 유대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땅은 하나님의 언약의 매개체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창 12:1) 그리고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도착했을 때,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 12:7) 이 후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땅은 하나님과 언약의 중심에 자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으로 내려간 후, 저들이 430년의 종살이를 끝내고 출애굽 했을 때 저들이 나아갔던 곳이 바로 이 약속의 땅 가나안입니다. 저들이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저들은 바로 그 약속을 믿고 가나안 땅을 향해 나아갔고, 결국 그 땅을 다시 차지하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다는 뜻을 말합니다.

결국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천국을 얻게 되고, 온유한 사람은 그 뿐 아니라 이 세상 살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체험하며 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온유한 사람이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될까요? 왜 온유한 사람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체험하게 될까요?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이루시는 것을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비유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붓으로 사용하셔서 그림을 그리시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림이 그려지려면 하나님의 손에 들려있는 붓이 부드러워져야 합니다. 붓이 강하고 뻣뻣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시고자 하시는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붓이 부드러우면 하나님께서 그리시고자 하시는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걸작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는 하나님께서 그리시고자 하시는 대로 반응하여 움직일 수 있는 부드러운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온유는 하나님께 반응하는 우리의 태도를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온유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가십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이 하나님의 약속 성취를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부드러워지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부드러워져야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도구가 되어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부드러워져야 우리 공동체를 하나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더욱 성령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소금에 절인 배추가 부드러워지듯 성령 안에 있는 심령들이 부드러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모델로 삼아 부지런히 배워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정말 부드러운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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