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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롬 8:3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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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Golden Gate Bridge)를 건설할 때의 일이다. 처음 1년 동안에 23명이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었다. 그래서 건설회사는 안전을 위해서 거대한 망을 만들어서 깔았다. 그 후에는 일하다가 실수로 아래로 떨어져도 죽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이 안전망은 뜻하지 않은 효과를 가져왔다. 공사 진행이 20%나 빨라진 것이다. 그 이유는 떨어져도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인부들의 동작이 빨라지고 작업능률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사람을 압박해서 작업효율을 감소시켰지만, 안전에 대한 확신이 생기자 맘 놓고 일할 수 있었다.

이처럼 사람은 확신이 있으면 자신 있게 살 수 있지만 확신이 없고 두려움과 불안에 빠지면 모든 것이 흔들리고 어떤 것도 자신 있게 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기 위해서는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살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우리가 누구를 믿고 무엇을 믿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여전히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가 안전하다고 믿고 의지했다가 실패하고 실망한 경험이 많기 때문이다. 안전하다고 믿었던 장비가 전혀 우리를 지켜주지 못하기도 한다.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 몸을 받아줄 안전망도 사람이 만든 것이라 떨어지는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뚫어지거나 찢어질 수도 있다. 또 우리가 철석같이 믿었던 사람에게서 배신을 당하고 실망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무조건 확신을 가지면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을만한 존재를 믿는 것이 중요하다.  

로마서는 1-11장까지는 교리편이고 12-16장까지는 생활편이다. 즉 무엇을 믿느냐 하는 것을 말씀하고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기록했다. 그런데 9, 10, 11장은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교리는 8장까지로 끝이 난다. 그래서 오늘 말씀이 이 교리편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38 내가 확신하노니”라고 말한다.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확실하게 믿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무엇을 확신한다고 했는가? 세상의 그 누구도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다는 것이다. “31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그가 이런 확신을 가지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는 이런 분명한 확신이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러 다니면서 수많은 핍박과 고난을 받았지만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복음을 전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한다.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이것은 8장 전체를 받는다. 1,2절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다고 선언했다. 15절에서 우리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아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1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자녀인 우리에게 장차 주실 영광이 있다고 했고 28절에서는 이를 위해서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해주신다고 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또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셔서 하늘의 영광에 이르게 하신다는데 무슨 더 할 말이 있느냐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반드시 천국의 영광에 이르게 하실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혹 어떤 세력이 또는 어떤 일들이 우리의 구원을 가로막고 하나님과 나 사이를 끊으려고 하더라도 전혀 걱정할 것이 없다고 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31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이란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이란 뜻이다. ‘대적한다’는 것은 ‘맞서 싸운다’는 뜻이다. 세상의 아무리 강한 세력이 우리와 맞서 싸우려 한다 해도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기 때문에 아무 걱정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 사도 바울의 확신이 바로 나의 확신이어야 한다. 사도 바울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을 믿어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사람은 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예수를 믿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 똑같은 약속을 주셨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확신인지 살펴보자.

첫째, 우리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선물로 주신다는 확신이다.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이것은 먹고 사는 문제를 말한다. 즉 우리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공급해 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모든 것’은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외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다. 나를 구원하기 위해 아들의 생명을 버리신 것이다. 이것은 가장 큰 사랑이다. 모든 것을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이다. 요한복음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그런데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외아들의 생명을 버리셨다. 로마서 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사람이 생명을 건다는 것은 모든 것을 다 내어놓는 것과 같다. 생명을 내어놓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주는 것과 같다. 가장 소중한 것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들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다는 것이다. 아들의 생명을 주실 정도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무엇을 안 하시겠는가? 나에게 무엇을 안 주시겠는가?

여기서 ‘은사’란 은혜로 주시는 선물,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란 뜻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실 때도 아무런 조건 없이, 값없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도 아무런 조건 없이, 값없이 주신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확실히 믿어야 한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히 믿으라. 특별히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구하는 것을 반드시 주실 것이라는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딸답게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자신 있게 구해야 한다. 마태복음 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들을 받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달라고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이 있어도 구하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 야고보서 4:2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에스겔 36:37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요한복음 16:23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외아들 예수님의 생명을 주셨다. 가장 소중한 것을 주셨고 모든 것을 다 주셨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값없이 선물로 다 주실 것이다. 이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을 확실히 믿고 하나님께 나아가 구하라.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은혜로 살아가라.

둘째, 아무도 우리를 정죄하지 못한다는 확신이다.
“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이것은 의의 문제이다. 즉 내가 죄인이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죄를 짓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전에도 죄인이었고, 지금도 죄인이며 그리고 앞으로도 죄를 짓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보아도 나는 의인이 못되고 여전히 죄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죄인인 내가 감히 스스로 자신 있게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아무도 우리를 송사할 수 없고 정죄할 수 없다고 했다. 여기서 ‘송사’는 ‘고소, 고발’이란 뜻이다. ‘정죄’는 ‘유죄판결’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도 우리를 죄인이라고 고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어떤 사람도 우리들에 대해서 죄인이라고 유죄판결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왜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 값을 치러주셨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아무도 우리를 죄인이라고 정죄할 수 없다.

34절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그래서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셨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신다. 그러므로 누가 우리를 하나님께 고발하고 정죄해도 우리는 정죄를 받지 않는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자격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자격이 없고, 나는 못났으니 아버지나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그러기에 구원을 받아 예수를 믿고 지금 여기에 앉아 있다. 그러므로 조금 의를 행했다고 자랑하거나 조금 실수했다고 무서워하고 눈치보고 도망하고 그러지 말라. 이래도 저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신다. 이미 나를 구원하셨고 이미 나를 의롭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여전히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이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세가 되라. 믿음은 다른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나를 사랑하시므로 나도 나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를 정죄해서도 안 되고 또 정죄를 받아서도 안 된다. 정죄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나 자신의 양심의 정죄이다. 둘째는 율법의 정죄이다. 그리고 셋째는 마귀의 정죄이다. 이 세 가지가 나를 정죄할 때마다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 하셨는데”라고 대답하라. 하나님께서 내 편에 계시고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기도하시는데 누가 감히 나를 죄인이라고 정죄할 것인가? 누가 뭐래도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딸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다.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고 의롭다고 인정받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이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믿고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담대히 살라.

셋째, 우리로 모든 일에 넉넉히 이기게 해주신다는 확신이다.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이것은 우리의 미래에 닥칠 환난의 문제이다. 여기서 “이 모든 일”이란 35절의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을 가리킨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딸이지만 믿음을 가지고 인생길을 살아갈 때에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살게 된다. 인생이 어차피 고난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악하기 때문이고 내가 약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탄의 세력이, 죄악 된 세상이 우리가 믿음으로 살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우리가 죄와 불의를 멀리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많은 환난과 핍박과 공격을 받게 된다. 

그래서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다. 이 말씀은 시편 44:22의 인용이다. 이스라엘이 환난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을 의미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은 믿음 때문에 수많은 고난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큰 환난이 와도 그런 것들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런 것들 때문에 우리에게 약속된 하늘나라의 영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 어떤 환난이 와도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우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넘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하고 무한하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 사랑을 붙들고 반드시 승리한다.

어떻게 이길 수 있는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 때문이다.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셨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고, 그리고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이기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그 예수님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어떤 환난과 공격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에베소서 1: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신 그 능력을 주셔서 넉넉히 이기게 해주신다. 

요한복음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이미 우리를 위해 이겨놓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승리를 가져가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우리는 환난과 시험과 공격을 겨우 이기는 것이 아니라 넉넉히 이긴다. 찬송가 376장 3절 “불같은 시험 많으나 겁내지 맙시다 구주의 권능 크시기 이기고 남겠네.” 

어떤 환난과 고난이 와도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 어떤 일이 있어도, 어떤 존재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방해할 수 없고 막을 수 없고 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주를 향한 나의 사랑도 절대로 변해서는 안 된다. 환난과 고난이 있다고 해서 변한다면 진정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환난과 핍박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주를 사랑하는 것이 변해서도 안 되고 변할 수도 없다. 고난이 오고 환난과 핍박이 올 때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줄이 튼튼함을 기억하고 그 사랑의 줄을 붙잡으라. 그러면 반드시 이긴다. 

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중요한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놀랍고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이다. “39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즉 “내가 확신하노니”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넉넉히 이긴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아무도 나를 이길 수 없다. 아들을 아끼지 않고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나를 붙드시기 때문이다. 항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어서 넉넉히 이기며 살라.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미국과 캐나다 양쪽에 외줄을 걸어 놓고 줄타기 곡예를 하는 블론딘이란 유명한 곡예사가 있었다. 그가 막대기 하나를 들고 거센 물살과 폭포가 휘몰아치는 나이아가라 위를 가로질러 외줄을 타고 캐나다 쪽에 도착하자 사람들은 우렁찬 박수를 보냈다. 도착한 그는 박수를 치던 사람들에게 한마디 질문을 했다. “여러분, 제가 이 막대기를 들고 또 다시 미국 쪽으로 갈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예 믿습니다”라고 소리쳤다. 그때 그는 다시 그 앞에 앉은 꼬마들에게도 “여러분들도 내가 이 막대기를 들고 미국 쪽으로 건너갈 수 있다고 믿습니까?”라고 물었다. 역시 꼬마들도 그렇다고 소리쳤습니다.

그 때 그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제가 이 앞에 있는 소년들 중 한 소년을 등에 업고 건너갈 수 있다고 믿습니까?” 사람들의 대답 소리가 아까보다는 작았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들과 꼬마들이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맨 앞줄에서 소리치던 꼬마에게 “얘야, 네 등에 업혀라”고 말했다. 그러나 크게 믿는다고 소리쳤던 꼬마는 업히기를 주저했다. 그래서 또 다른 꼬마에게 물으려 할 때, 느닷없이 어떤 꼬마 하나가 “아저씨, 저는 아저씨를 믿어요. 제가 업힐게요”하며 앞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그는 그 꼬마를 등에 업고 안전벨트로 잘 묶은 다음 막대기를 들고 미국 쪽으로 줄을 타고 건너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꼬마를 업고 줄타기를 성공했다. 많은 사람들과 아이들이 믿는다고 소리치긴 했어도 막상 자기의 생명을 맡길 만큼 그를 믿어준 사람은 어린 꼬마 하나밖에 없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확실히 믿는가?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다 맡길 만큼 확실히 믿는가? 혹 말로는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무슨 일이 닥치면 맡기지 못하는 믿음은 아닌가? 

추운 겨울에 아이들이 강둑에 모여서 연을 날리고 있었다. 어떤 어른이 지나가다 보니까 눈먼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함께 열심히 연을 날리고 있었다. 신기하기도 하고 또 놀려주고 싶은 생각도 나서 가까이 가서 물었다. “얘, 너는 눈도 보이지 않는데 네 연이 하늘에 제대로 떠있는지 땅에 떨어졌는지 어떻게 아느냐?” 그랬더니 이 눈먼 아이가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연은 눈에 안보이지만요 이 연줄이 이렇게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지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그 어떤 것으로도 끊을 수 없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한 번 택하신 사람은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신다. 비록 지금 하나님은 내 눈에 안보이고 내일은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사랑의 줄이 나를 당기고 있음을 확인하고 믿고 나아가라. 
세상은 그리고 사탄은 우리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하고 환난과 고난으로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게 하려고 수시로 공격한다. 그럴 때에 분명하게 고백하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아들을 아끼지 않고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주신다. 죄인인 나를 언제나 의롭다고 하신다. 고난과 핍박을 넉넉히 이기게 해주신다. 이 하나님의 사랑의 삼겹줄은 갈수록 점점 강해지고 하나님의 사랑은 점점 더 깊어지는 것이다. 이 끊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의 삼겹줄을 든든히 붙들고 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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