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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 (시 51:8-10, 갈 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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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 (시 51:8-10, 갈 2:20-21)


아내라는 말은 참 아름다운 말입니다. 아내는 안에 있는 해라는 뜻이랍니다. 아내는 안에서 해처럼 빛이 나야 합니다. 아내는 안에서 해가 되지 못하면 밖에서도 안 됩니다. 아내가 안에서 해가 되지 못하면 집 안은 어두워지게 됩니다. 우리 집 안에 빛이 되는 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모래시계를 아시지요? 어디에 가면 많이 볼 수 있습니까? 우리나라에서는 사우나입니다. 원래 시간을 알리는 중요한 도구였는데 요즘은 더 좋은 시계가 많습니다. 모래시계가 시간을 가리키는 것은 그 안에 담긴 모래입니다. 시간을 알리는 소중한 역할을 하는 모래지만 모래가 시계 바깥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모래는 그냥 모래일 뿐입니다. 안에 무엇이 있는가가 중요하고 그리고 안에 있을 때가 중요합니다. 밖에 나오는 순간 아무 것도 아니며 가치 없는 것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경에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 “살리는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이라고 합니다.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이며 인격입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있습니까?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습니까?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까? 우리 안에 살리는 영이 있습니까?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습니까, 밖에 있습니까?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우리 안에 있지 않고 우리 밖으로 몰아내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요한복음 14:20에는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와 내가 완벽한 일치를 보이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와 내가 절묘하게 하나 된 말씀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브리다’에는 “인생의 매순간이 믿음의 행위라는 것. 그 순간순간을 뱀과 전갈로 채우거나 혹은 자신을 보호해주는 힘으로 채울 수 있음을 아는 것”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믿음은 그 힘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그 힘이란 그리스도이십니다. 힘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은 내 안에 그리스도로 채우는 것입니다. 기도는 내 안에서 하나님과 일체되는 것입니다. 나의 심장이 하나님의 심장과 같이 뛰며, 나의 호흡이 하나님의 호흡 안에 흡수되고, 하나님의 임재가 내 안에 스며들어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사실을 점점 더 깨닫게 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모든 삶은 내 안에 그리스도를 채우는 일입니다. 
  
주께서 내 안에 거하시지 않으면 나라는 존재는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존재 가치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실 때에 비로소 가능합니다. 예수님이 없는 삶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찬송에도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사람 되고”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셔야 사람다운 삶을 삽니다.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하여 새사람이 됩니다. 새해에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사람으로 새로운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바울은 감히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합니다. 바울의 죽음의 고백입니다. 죽을 수 있으면 삽니다.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있으면 삽니다.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있으면 십자가는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십자가가 자랑입니다. 십자가가 기쁨이어야 진짜 그리스도인입니다. 
  
십자가 못 박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십자가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거절, 부담함, 뜬소문, 빈정거림, 더한 고통, 오해, 굴욕, 치욕입니다. 십자가는 평판을 다 잃고 친구도 떠납니다. 심지어 십자가형으로 온 가족이 파문 당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십자가는 모든 것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이런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엄청난 자기희생이고 사건입니다.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힐 자신이 있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것은 머리로, 생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안락함을 가져다주는 편안한 도구가 아니라 어두운 무덤으로 이어지는 잔인한 처형도구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는 것은 죽은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산 사람이 없습니다. 십자가형인 십자가에 못 박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상존하는 위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든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든 십자가에 못 박힐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면 신앙생활이 간단할 텐데 그렇지 못해 자존심이 상합니다. 허영심과 교만 이 문제의 요인이 됩니다. 바울은 교만하고 자존심이 강한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가 십자가를 만나므로 말미암아 이전의 모든 삶과 세속적인 사랑에 대하여 부정하고 새로운 삶을 향해 전환하였습니다. 그의 삶에 360도의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바울서신에서 그는 십자가란 단어을 20번이나 쓰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14에서 그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 하니라”고 합니다. 내 마음 판에 십자가가 새겨져야 합니다. 깊이 새겨져야 합니다. 어떻게 십자가가 마음 판에 새겨질 수 있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경험하면 십자가가 새겨집니다. 
  
마태복음 16:24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조건을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이 둘은 서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면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면 십자가는 절대로 지지 못합니다.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란 말은 헬라어로 ‘쉬네스타우로마이’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영적으로 동참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주님과 영적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십자가는 참 길입니다. 
  
십자가는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은 이제까지 자기가 메고 있던 율법의 요구들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율법은 좋은 것이지만 율법이 자신을 죽게 만든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율법으로부터 죽고 십자가로 다시 산 것을 의미합니다. 율법과 문자에 얽매인 신앙을 십자가로 소멸해야 합니다.  
  
바울은 오늘의 말씀에서 역설적인 말을 합니다. “내가...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하고  “이제 내가...사는 것은”이라고 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라고 해놓고 “이제 내가 사는 것은”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살았다는 말입니까, 죽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지금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바울은 십자가 때문에 사는 것과 죽는 것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이 하나가 되고 죽음을 극복해야 이런 말이 가능합니다.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 되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 말을 우리가 “으깨져 형체가 없어”져야만 그리스도 형상이 우리 안에 이루어져 그리스도만이 우리 안에 계실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을 닮기 위해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크루시아누스’(crucianus)라는 라틴어 단어를 만들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이란 뜻의 ‘크루시아누스’는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짐으로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신다면 십자가에 못 박힐 것도 없습니다. 십자가를 짐으로 그리스도가 내 안 계심을 즐거워하기를 바랍니다. 

  
둘째, 내가 죽으면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바울은 이어서 말합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면 그리스도가 사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라는 말씀은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 내가 죽음으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는 내재의 경험은 그리스도와 나의 죽음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참 의미가 큽니다.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십자가는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없이 나 혼자 못 박힌 십자가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과 내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그리스도가 내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율법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죄가 죽고 의가 살고,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것입니다.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니 나는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6:5에는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죽으면 그리스도와 같은 모양으로 삽니다.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힐 수 있는 자만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십니다. 
  
‘귀신이 산다’는 영화가 있습디다. 귀신이 내 안에 사는 사람은 귀신이 시키는 대로 말합니다. 내 안에 귀신의 소리를 냅니다. 귀신의 생각대로 생각합니다. 내 자신을 통하여 귀신의 모습을 봅니다. 귀신 들린 자는 귀신의 소리만 냅니다. 귀신들린 자가 예수님을 만나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소리는 다 거짓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알지만 지식으로 아는 것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고 하여 하나님을 믿습니까? 그 아들을 믿습니까? 절대로 그렇게는 못합니다. 
  
“적은 내 안에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에게 점령당한 삶을 산다고 했습니다. 귀신같은 소리입니다. “내 안에 나로 채우자”라는 말도 합니다. 다 헛된 소리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로 채워야 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야 그리스도의 소리를 내고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신다면 그리스도가 시키는 대로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소리를 낼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그러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그 안에 있으니 그리스도의 소리를 내고 공회 앞에서도 당당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그 안에 있으니 그리스도 외에 어떤 것도 더 귀한 것이 없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았습니다. 요한은 그리스도가 그 안에 있으니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자고 했습니다. 

성자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가 그 안에 있으니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았고 성자라고 칭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그리스도가 그 안에 있으니 당시의 무시무시한 교권에 맞서 종교개혁을 성공시켰습니다. 최봉석목사님은 그리스도가 그 안에 있으니 일본 순경 앞에서도 굽히지 않고 ‘예수천당’을 외쳤습니다. 주기철목사님은 그리스도가 그 안에 있으니 어떤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이 외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그안에 계시므로 그리스도처럼 살았는지 모릅니다. 이 모든 분들이 다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그리스도의 대변인처럼 살았습니다. 
  
요즘 길을 지나가다 보면 홍보용으로 바람을 넣은 사람 모양의 풍선을 볼 수 있습니다. 펄럭이는 모습이 그리 예쁘지는 않아요. 그런데 한번은 지나가다 보니 바람이 빠져 있습니다. 바람이 들어있으면 펄럭이지만 바람이 빠지면 쭈그려져집니다. 바울에게서 그리스도를 빼면 바람 빠진 풍선에 불과합니다. 위에 열거한 모든 신앙의 위인들이 그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 빼면 아무 보잘 것 없는 범인에 불과합니다. 죄인의 한 사람일뿐입니다. 성경은 그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이지 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은 위인전이 아닙니다. 
  
우리 찬송가 가사에 “내 안에 주님 계시고 주 안에 나 있어 그 한량없는 기쁨과 참 안식 얻도다”라고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으면 한량없는 기쁨과 안식을 맛볼 수 있습니다. 비록 고난과 환난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면 고난도 환난도 극복하고 기쁨과 안식이 풍성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삶입니다.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삶은 완전한 새 삶입니다. 
  
요한복음 12:4에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합니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죽어야 열매를 맺습니다.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하고 그대로 있습니다. 죽음이 얼마나 고귀한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최근 세계적으로 이슬람의 확장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영국에서는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영국 백인이 급증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난 10년간 영국 백인이 두 배로 무슬림이 되어 10만 명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영국사회는 이런 이슬람의 성장 추세에 모두 놀라고 있습니다. 무슬림이 된 영국인 가운데 제일 많이 개종한 평균나이는 27세입니다. 개종자 가운데 여성 개종자가 3분지2 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전통적 성공회 국가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영국사회의 부도덕성과 소비지상주의에 싫증을 느끼고, 술과 마약, 성적문란, 무절제한 소비성향 등에 혐오감을 느낀 젊은이들이 영국사회 문화의 부정적인 측면의 해답을 이슬람에서 찾는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슬람이 해답일까요? 이슬람이 해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기독교가 스스로 깨끗하게 하는 자정능력을 상실했다고 보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한국기독교도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인터넷 안티기독교 사이트가 50개가 넘습니다. 이 속에는 온갖 비난과 욕설이 난무합니다. 이에 대하여 대처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교회가 자정능력을 상실했다는 데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데 세상은 교회가 빛이 되는 것을 기대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 소금이 되어 교회를 짜게 하고 부패하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스스로 깨끗해지기 위해서는 죽어야 합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경험을 해야 교회가 힘을 얻습니다. 
  
시편 51:10에는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내가 죽고 내 속에 그리스도가 살아야 정하게 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셔야 정함 마음을 가지고 정직한 영으로 새롭게 될 수 있습니다. 새해에 우리 모두에게 이런 영이 새롭게 되는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1606-1669)는 성경을 소재로 하여 예술의 깊은 세계를 화폭에 담았습니다. 그의 작품 가운데 ‘십자가에 못박힘’이란 명작이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는 그리스도와 군중의 냉소적인 태도를 그렸습니다. 이 그림을 보면 그리스도를 못 박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림의 가장자리에 어둠 속의 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렘브란트 자신을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죄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구원받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보답하는 방법은 내가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히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면 됩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내가 못 박히므로 그리스도와 내가 일체가 되는 경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 사셔서 정직한 영으로 새롭게 되는 놀라운 주님의 축복과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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