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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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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 3절-8절: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난리가 왜 나느냐? 의사단일이 안 되니까 난리가 난다. 뜻이 안 맞으면 난리가 난다. 세상은 자기 좋도록 해주면 난리는 안 난다. 그런데 세상이 그런가? 마귀가 역사하는 세상이라서 그렇지를 못하다.


교회 안에 주님으로 의사통일로 단일이 안 돼 있으면 그 자체가 어떤 상황이 돌발하면 난리가 나게 돼 있다. 교회든 가정이던 개인의 마음속이던 주님과 의사단일이 안 돼 있으면 여기는 반드시 난리가 나게 돼 있다. 자기 마음도 흔들리고 그렇게 되게 돼 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들어가 있으면 마음이 평안하다.


‘난리 소문을 들을 때에.’ 그러니까 여기저기서 싸우는 소리, 서로가 불평불만 그런 소문을 들을 때 그런 소리를 듣는 자기 입장에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을 붙잡고 있어야 한다. 그 소문을 들을 때에 여기 기웃 저기 기웃 그게 아니라 자기가 움직이지 않는 진리의 말씀을 붙잡고 자기 마음을 거기에 정착시켜야 한다. 그래야 분별도 되고 지혜도 생기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가져야 할 처신이 나오게 된다. 누구 소리를 듣고 ‘이쪽이 좋네, 저쪽이 좋네’ 하게 되면 그게 무리가 돼서 싸움이 붙게 된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안심하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아니라 앞으로 올 재난을 미리 판단하고 준비를 하라는 말씀이다. 예를 들면 큰 비가 온다고 뉴스가 나오면 모두가 피해를 입지 않으려고 비설거지를 하듯이. 농사를 짓는 사람은 뉴스를 들으면서 큰 비에 대비를 한다. 못하면 상당한 피해를 입는다.


그 다음에 보면 ‘민족이 민족을.’ 왜 민족끼리 대적하여 일어나느냐? 그 앞에 보면 ‘미혹을 받지 않도록 사람의 미혹을 주의하라’고 했다. 비진리를 들으면 사람의 마음이, 자기의 신앙이 진리에 적중성으로 정착이 안 된다. 이런 사람은 세상에 관한 것으로 들어있으니 그건 비진리다.


이 비진리는 항상 물질 소원 목적에, 일 크게 하는 것에, 자기가 부자 되는 것에 정신이 들어있다. 이건 진리의 정신이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에 대한, 생활에 필요한 것에 대한 욕심을 갖는 건 신앙이 아니다. 성경에서는 그런 걸 신앙이라고 하지 않는다. 세상적이며 옛사람 부패성적이며 마귀적인 정신 즉,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을 구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는다.


신앙의 원리원칙 적중성을 바로 알면 금방 구별 구분 분리가 된다. 아무리 교회가 많아도 교훈성에서 ‘아, 이건 신앙이 아닌 가르침이다’ 하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신앙이라는 것은 자기를 만드신 원인 동기 목적성에 적중성으로 들어간 정신 사상을 갖는 게 신앙이다. 안 그러면 미신성으로 들어간다. 이것도 종교적 용어를 붙인다면 자기 스스로에게서 나온 신앙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주님을 많이 알수록, 이치를 많이 알수록 하나님의 뜻에 적중성의 신앙을 가질 수가 있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돌아가는 이치, 그 결과는 원인이 어디서 나왔느냐? 마음이 돌아가는 게 뭘 붙잡고 사느냐?’ 하는 이걸 신앙 면에서 구별하는 것이다.


기도하면서 물질적으로 일어난 그거는 신앙이 아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도 자기 힘을 가지고 노력에 따라 많이 가지기도 하고 적게 가지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 믿으면서 물질을 많이 가졌기 때문에 신앙이 좋다는 기준을 가지면 안 된다. 신앙이 하나도 없는 사람도 부지런한 사람도 많다. 신앙을 가져도 영적 면에는 부지런한데 육적 면에는 남이 볼 때 게으르게 보이는 사람도 있다. 육신적으로 게으르고 부지런하다는 것은 육신이 사는 면에 국한되는 거다.


자기가 게으르거나 부지런한 데에 따라 어렵거나 부요하거나 그런 면이 오는 거다. 그 다음에 자기의 성격과 성질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성에서 영향력이 들어간다. 가난하고 부지런한 것은 주로 생활에 관계가 있고, 자기의 고치지 못한 성격 성질은 사람과의 관계성에 주로 돼 있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영적 면에서 진리이치로 바로 들어가 있으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바로 돼 있는 거다. 이렇게 되면 자기의 정신을 바로 보게 돼 있고, 따라서 또 자기의 활동을 바로 보게 된다. 이게 정확하게 들어간 신앙이다. 사람이 온전한 신앙이다.


그런데 아무리 옳은 것을 받아도 자기의 성격 성질에 의해 인간과 차단이 된 사람도 있고, 또 신앙은 무난하게 보이는데 사람이 성격이 게을러서 못 사는 사람도 있다. 못 살고 잘 살고 하는 그 자체를 기준으로 하고 신앙을 따지면 그 기준이 틀렸다. 안 믿는 사람에게도 그렇게 붙이면 안 된다. 그러나 창조의 목적관에서 바로 깨달으면 믿는 사람도 안 믿는 사람도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불문하고 여기에는 전부 다 구별 분별이 들어가는 거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진리이치의 말씀에서 자기가 어느 쪽에 모자람 있는 건지 그런 걸 잘 생각을 해야지 무조건 교회 다니고 주일 지키고 그렇게만 생각하면 안 된다.


왜 민족끼리 대적하여 일어나느냐? 왜 교회끼리 대적하여 일어나느냐? 교회는 교회끼리 미혹자들로 인해서 일어난다. 같은 민족끼리도 안에서 일어나고. 세상에서 이게 다 보인다. 이치 하나 바로 가지면 눈으로 보이고 귀로 듣는 것은 그냥 분별이 들어가는 거다.


한 나라 안에 다른 민족이 다른 사상을 가지고 살고 있으면 거기에 또 폭동과 분쟁 일어나게 돼 있다. 그래서 제일 쉽게 이치적으로 예를 들자면 자기 속에 감기기운이 들어오면 자기 몸은 진통으로 들어가는 법이다. 이치는 그와 똑같다.


세상은 민주주의 다수결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세상 민주주의 사고방식으로는 교회는 안 된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들을 보니까 전쟁이 일어나면 왕들이 앞서 가서 쳐 이기는 것을 보고 ‘우리에게도 왕을 세워주십시오’ 라고 했다.


그런데 원리 원칙적으로 교회는 인간 왕이 필요가 없다. 영적 이스라엘에게는 인간 왕이 필요가 없다. 그런데 계시적으로 보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를 자기의 왕을 삼고 있으면 그건 자기 자체화 되는 거니까 이기고 나갈 수 있는 거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자체화가 아니고 누구의 인도 지도를 받을 자를 세워달라고 했다.


영적 이스라엘은 참 자기를 바로 인도하고 자기를 영능의 능력자로 세울 분은 주님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왕을 세우려고 안 했다. 그럼에도 워낙 세워달라고 하니 세운 것이다. 세우면 왕에게 공출을 바치고 시키는 대로 해야 된다고 해도 ‘그래도 좋습니다’ 해서 왕을 세운 거다. 그러니 왕을 잘못 세워놓으면 얼마나 힘이 드느냐?


교회에서 이치가 이렇게 하던 저렇게 하던 주님이 허락한 것은 우리의 구원도리를 깨닫게 하는 선한 뜻이다. 그래서 어느 교회든 목사를 바로 세우지 못하면 고통이다. 세상에게 정복당한다. 세상에게 먹힌다. 그러면 세상의 노예가 된다. 이렇게 되면 교회의 모든 노력 봉사 투자성 시간성 활동성은 전부 이방세상이 좋아하는 쪽으로 쓰이게 된다. 이게 사망운동이라고 하는 거다.


미혹을 받아서 같은 종교끼리 모이기도 하고, 한 동족이라도 각자 믿는 종교끼리 또 모아서 분쟁이고. 그러니까 진정한 의미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교훈의 단일이 아니면 세상에는 평화는 없다. 인간의 표현적으로 아닌 말로 하나님의 독권 독재를 한다면 온 세상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하는 것보다 훨씬 잘 살고 훨씬 행복하고 영능의 실력이 올라간다. 그러나 세상은 정치적으로 독재 독권이 있으면 안 된다. 이건 성질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기독교 안에서도 각 교단끼리 분쟁이고, 서로 모여 단합대회를 하고, 원수로 삼고, 마찰 대립 충돌이고, 세상도 관료와 백성들도 충돌이다. 없는 곳이 없다. 누구든지 나와서 다 한 마디씩 하지만 누구든지 나와서 대통령을 하면 다 똑같다. 다 자기 말대로 되는 거냐? 세상은 그런 곳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세상역사 진행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파도처럼 밀려오는 그 역사 진행 속에서 진리이치의 바른 깨달음을 가지고 이럴 땐 이렇게 이기고, 저럴 땐 저렇게 이기고 해야 한다. 파도가 쑥 올라갔다가 쑥 내려가면 그 파도를 지혜롭게 타야 한다. 파도가 올 때 어쨌든 앞으로 나가야 하니까 파도가 올라가면 오르는 쪽으로 타야 하고, 내려가면 내려가는 쪽으로 타야 한다.


파도를 타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앞으로는 안 나가고 그 파도에 밀려서 그 파도가 모래동산에 죄다 올려놓는다. 쥐 죽은 거, 지푸라기, 소나무 죽은 거, 뼛조각, 스티로폼, 비닐, 죽은 고기 등 다 바닷가에 올려놓는다. 죽은 것은 물결에 밀리는 거고, 산 것은 파도를 타게 된다. 타야 자기 힘이 길러지고 그 파도에 안 죽는 거다. 큰 고기일수록 물 깊은 데 있는 거다. 작은 고기는 깊은 물이 아닌 얕은 데서 사는 거다.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분쟁 난리, 그 다음에 민족, 그 다음에 나라로 자꾸 확대가 된다. 땅 욕심, 식량 욕심, 기름 욕심. 무엇으로 탐을 냈던 간에 뺏으려고 싸우고 안 뺏기려고 싸우고, 또 ‘어떻게 하면 쉽게 많이 죽이나’ 이러고 있다. 상대를 노리고 스파이 보내서 정보를 캐내고, 기술을 훔쳐서 사고팔고.


교회 안에서도 거짓과 이단자들의 스파이가 있어서 불평하는 자들을 포섭을 하고, 그런 자들과 같이 맞장구를 치고. 어찌하든 미혹하려는 사단 마귀의 수법이 다양하다. 그러니까 곳곳에 지진이 일어나게 되는 거다. 땅 지진만 생각 말고 사람 지진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지진이 일어나면 땅이 흔들린다. 땅 위에 기초하고 서 있는 것은 다 흔들린다. 크고 작은 건물들은 다 넘어지게 돼 있고, 높을수록 무너짐이 심하고, 옆으로 등치가 큰 것일수록 쪼개짐이 심하다. 지진이 일어나면 그렇다. 이걸 영의 눈으로 사람의 마음을 보면 이치는 똑같다. 세상만사 돌아가는 것은 이치로 돌아가는 거지 감정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다. 일 년 열두 달 사시사철이 감정으로 돌아가느냐? 감정이 아닌 법칙으로 돌아가는 거다.


지진이 나서 땅이 갈라져 내려앉으면 그곳에 있는 것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땅속으로 깊이 묻히게 된다. 솟아오르고 무너지고 불나고 갈라지고 가라앉고 한다. 사람이 죽는다. 이렇게 되면 식구도 이웃도 돌볼 사이가 없다. 마치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폐허가 된다.


또 바다에서 지진이 크게 나면 육지로 해일이 덮친다. 배도 깨지고 사람도 순식간에 죽는다.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사람들의 움직임이 크게 일어나면 즉, 전쟁 등이 일어나면 육지로 해일이 덮치듯이 배고 뭐고 다 깨진다. 유형교회고 뭐고 다 깨진다.


영적으로 말을 하자면 미혹의 영을 가지고 가르친 사단 마귀의 역사로 말미암아 모든 교회들이 하나님의 의사단일로 온전한 인격과 성품이 안 되고 세상 이방 불신세상이 원하는 신앙정신이 되니, 사실 이건 신앙도 아니다. 그렇게 되니 전 세계적으로 하나님 앞에 지진이 일어난 상태의 모습이 되는 거다.


눈으로 보여지는 거, 갈대나 나무 등은 바람이 세게 불면 한 쪽으로 싹 넘어진다. 교회 안에 물질바람 전쟁바람 유행바람을 타는지 안 타는 지는 사람의 그 정신상태가 어느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지를 보면 안다. 그게 바람을 타는 거다. 못 속인다. 예수 믿는 것도 어떤 정신 사상이냐? 신비주의냐, 구국주의냐? 이게 다 바람을 탄 거다.


오늘날 교회의 신앙이라는 게 세상 육적, 옛사람 부패성적, 마귀적, 이질적 그런 신앙사상에 빠진 자는 지진으로 땅속에 깊이 빠져서 올라오지 못하는 것과 같다. 손을 잡고 올리면 쉽게 올라올 것 같은데 옆에 뭘 붙들고 있는 건지, 딴 것이 그 사람을 붙들고 있는 건지 영 안 올라오려고 한다. 그런 상태다.


정신적 혼란에 빠져있는 거. 정신적 혼란은 도무지 구별을 못하는 거. 이때까지 구별이 안 되는 곳에서 믿었는데 그런데 언제 어느 때고 어느 교회에서 첫 시간이라도 한 마디 말씀을 들어도 구별이 딱 되면 그걸 붙들어야 한다. 구별되는 그 시간이 성령님의 역사다. 자기에게 성령님의 역사가 왔다는 증거다. 그 때 바로 깨닫는 쪽으로 들어가면 자기의 수준이 엄청나게 높아지는 건데 그걸 모르고 있다.


그러니까 구별을 못하는 상태는 지진이 일어나서 사람이 어지러운 것과 같다. 사람이 어지러우면 바로 갈 수가 없다. 바로 가려고 하는데도 흔들흔들 하다가 한 쪽으로 처박히게 된다.


미혹을 받아서 무리지어 이리 저리 움직이는 상태는 전부는 지진이다. 그런 지진에 빠진 자는 올라오지 못한다. 그런 상태에서 바로 서려고 한다면 그 이치가 움직이지 않는 걸 붙잡아야 하는 건데 물질세상에 움직이지 않는 게 어디 있느냐? 하늘에 속한 것은 움직이지를 않는다. 하늘에 속한 거, 진리를 붙잡아야 자기가 정신적 신앙상태가 움직이지를 않게 된다. 안 그러면 움직이게 돼 있다. 소문으로 막 덩어리로 패거리로 움직일 때 막 쏠리게 돼 있다.


‘기근이 있으리니.’ 기근은 배가 고픈 거다. 아무리 먹을 걸 찾아도 먹을 게 없는 것. 왜 기근이 일어나느냐? 성도의 먹을 양식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인데, 예수님의 구원의 말씀인데 그런데 미혹의 영을 가진 교회 인도자들이 날뛰어서 의사적으로 하나님과 마찰과 대립이 일어나게 했으니 성도가 먹을 양식이 없는 거다.


마지막 교회들이 미혹의 영에 감염 받은 자들이 하나같이 무리를 만들고, 조직화 시키고, 서로 분쟁하고,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모두 지진을 만났다. 이건 기근이다. 지진을 만나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말하면 누가 농사를 짓고 하겠느냐? 그건 안 되는 거다. 교회도 그렇게 되면 목사도 성경연구를 못한다. 목사도 흔들리고 있으니 영의 양식을 마련을 못한다. 그러니까 모두가 흔들리게 되면 성도의 먹을 양심은 없는 거다. 심령마다 황폐가 된다.


미혹되었다 함은 영적으로 사람이 세상으로 넘어진 것이다. 또한 이건 영적으로 기근의 상태다. 사람이 세상으로 넘어져 있으면 진리생명의 말씀을 못 먹는다. 안 들어간다. 왜? 세상정신을 잔뜩 먹어서이다. 미혹되었다 함은 자신이 그런 상태인 것도 모르고 몰려다닌다 그 말이다. 다시 말하면 교인이 세상적 육적 옛사람의 부패성적 마귀적인 비진리에 미혹을 받으면 심령 속에서 동요성이 일어나게 돼 있고, 그 동요성이 또 다른 사람에게 건너가서 지진의 상태가 오고, 기갈을 만나게 돼 있는 거다.


바닷가의 파도는 바람이 불면 일어난다. 일어난 그 파도가 가만있는 물결을 건드리니 또 파도가 일어난다. 그래서 큰 파도가 돼서 부서지는 거다.


재난의 시작을 어떻게 알아볼 것인가? 육적 가견적 재난은 신체적 육적으로 사람의 생명과 직결이 된다. 먹을 것이 없어서 안 죽고 살려고 발버둥치는 여러 가지 행동들이 나오게 되는데, 도둑질, 살인, 사기행각, 몸 파는 거, 이방 종교적인 유혹 등등이 나타난다.


영적인 재난은 성도의 영적 신앙생명과 직결이 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에 굶주려서 기갈이 되는데, 신앙으로 살려는 마음에 만족을 채우기 위해서 기도원이나 철야기도 금식기도 등 무슨 신비로운 체험을 느껴 그 갈망성을 해소하려고 한다. 워낙 먹을 물이 없으면 구정물이라도 막 먹는다. 그러면 병이 든다. 그러는 것과 같다.


자기는 어떤 사고방식의 신앙을 갖고 있느냐? 이걸 모르면, 진리의 만족을 갖는 신앙을 모른다면 그런 성도는 영적 면에서 재난을 만나기 상당히 쉽겠다고 하는 위험성이 있다. 자기의 신앙이라고 하는 정신적 태도가 분명하지 못하고 뚜렷하지 못하면 위험한 상태다.


우리가 들판에 보면 봄이 돼서 파란 입이 자란 것에 불을 지르면 안 타고 꺼진다. 그런데 그 밑에 마른 낙엽이 있으면 이 낙엽이 타면서 그 위에 생명이 있는 건 다 타서 죽는다. 겨울에는 다 말라서 자칫 잘못해서 거기에 불똥이 떨어지면 그냥 다 타버린다. 성도가, 예수 믿는 자기가 하나님의 생명력 있는 푸르른 신앙이 아니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고 생명의 은혜가 풍성하지 못하면 낙엽과 같아서 어떤 면에 불이 붙으면 휙 타버린다. 이게 다 자연으로 보는 이치다. 신앙이치를 어기면 안 된다. 일반이치도 모르는 사람이 산에서 담배를 피우다 산을 다 태우는 거다. 남의 재산에 피해주고 한다.


온 교회가 영적 재난을 모르고 있다면 이건 이미 영적 재난으로 들어간 것이다. 성도의 영적 재난은 진리가 없다. 진리가 희박하다. 그런데 눈으로 보이는 활동은 활발하다. 그걸 보고 성령 받았다고 하고, 산 것으로 본다. 그러나 아니다. 그건 죽은 거다. 성도가 신앙이 산 것은 생명의 말씀의 이치에서 그 정신이 살아있고, 세상을 이기고 있고, 자기를 이기고 있는 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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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구원의 의사를 좇아서 신앙을 해야만이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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