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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은 성공의 기회 (창 3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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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은 성공의 기회 (창 39:1-6)


새해 첫 주일을 맞이해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생업, 그리고 자녀 손들에게, 하시는 모든 일들 위에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먼저 축원합니다. 

인생은 고난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고난이 제외 된 것이 아닙니다.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는 예수님 말씀처럼 오히려 하나님을 믿음으로 인해서 당하는 고난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고난이 어떤 고난인가? 이 고난이 얼마나 크고 작은가? 혹은 중하고 중하지 않은가?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고난을 당하는 우리의 마음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어떤 시각을 가지고 이 고난을 보고 이 고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고난을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처리하는가? 혹은 신앙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처리하는가 아니면 불신앙의 방법으로 이것 때문에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서 처리하려고 하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늘 고난이 있습니다. 그런 고난을 어떤 시각으로 보고 그 고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자세로 고난을 대하고 처리하는가 그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이 그의 장래가 앞으로 어떻게 되고 성공이냐 실패냐 행복이냐 불행이냐를 결정지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는 본문을 보면 요셉이라고 하는 인물이 등장을 합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서 시기 질투 받았습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노예로 팔려가게 되고 거기서 노예생활 하다가 또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에 승리하게 되자마자 혹은 이 보디발의 아내의 질투로 말미암아 누명을 뒤집어쓰게 되고 감옥에 갇히게 되어집니다. 그러한 요셉의 일생을 보면 계속되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도 얼마나 지혜롭게 고난을 처리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고난당하면서 성공하는 사람이 있고, 고난당하면서 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난당해서 일어나는 사람이 있고, 고난 때문에 넘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난을 기회로 삼아서 성공의 기회로 크게 잘되는 분이 있고, 어떤 분은 고난이 멸망의 기회로 그것 때문에 넘어지는 분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분을 택하시기를 원하십니까? 금년 한 해 동안 여러분들이 이 모양 저 모양 여러 가지 고난이 겹쳐오겠지만 그러나 그 고난을 기회로 우리 모두 성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잘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요셉은 고난을 어떻게 대했으며 처리했는가? 중요한 일입니다 요셉은 고난 속에서 이 고난을 하나님께서 하신일로 받아드리고 순종했습니다. 고난이 어떤 형들이나, 인간들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고난을 일으키시고 고난 속에 섭리하시고 하나님 뜻을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믿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형들도 용서 할 수 있었고 또 고난 속에서도 조금도 불안해하거나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이 계속되고 나중에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감옥에 들어가서 그곳에서 죽게 되는 처참한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요셉은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불안하거나 또 자기의 일에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고난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고 이 고난 속에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숨어있다는 것을 요셉은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순종해야 되는 것은 어떤 성경구절 한 구절 한 구절을 놓고 금년도에는 십일조 해야지, 금년도에는 주일성수해야지 그것만 순종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환경 속에서도 순종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앞에 다가오는 여러 가지 환경들이 우리에게 좋은 것도 있고 유익한 것도 있지만 때로는 우리를 힘들게 하고 괴롭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환경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낙심하기 쉽습니다. 

내가 이처럼 하나님을 섬기려고 최선을 다하고 온 가정이 신앙생활하고 믿음으로 살려고 몸부림을 치는데 어째서 우리 가정에, 내 개인에게, 우리 자녀들에게 이런 일이 부딪쳐 오는가. 그것 때문에 번민하고 혹 낙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요셉은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도 순종했습니다. 그 고난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원망할 만합니까? 하나님 내가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께 특별히 범죄한 것이 무엇입니까? 경건한 하나님의 가정에서 태어났고 지금까지 경건하게 살려고 믿음으로 노력했는데 왜 나를 애굽에 노예로 팔리게 내버려 두셨습니까? 바르게 살려고, 깨끗하게 살려고,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쳤으면 상을 받고 잘되고 형통해야 하는데 어째서 누명까지 뒤집어쓰고 감옥까지 들어가야 됩니까?  요셉은 얼마든지 원망 할 수 있는데 조금도 원망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해 할 수 없는 상황 속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형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형들이 나중에 요셉 앞에 와서 무릎을 꿇었을 때에 ‘형님들이여 근심하지 마시고 한탄하지 마십시오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기위해서 나를 앞서 보냈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넓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은 큰 그릇이 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은 어떤 경우라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뒤로 물러나지 않습니다. 이런 내게 이루어진 못마땅한 환경이, 불이익당한 형편이,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고 하나님의 뜻이 여기에 숨겨져 있다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힘든 환경을 바라보고 낙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오히려 거기서 희망을 갖고 이런 환경 속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지, 이런 환경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시지, 이런 환경 속에서 나를 인도해 주시지, 이런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면 그 사람의 장래에 요셉 못지않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을 줄로 믿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에 가장 중심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크고 작은 일들 우리가 태속에서부터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께 서는 마지막 그 시간까지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여러분들을 이 땅위에 보내시고 여러분에 대한 아름다운 축복을 계획하고 계십니다. 아름다운 축복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때론 여러분들을 힘들게도 하시고 질병도 허락하시고 환난도 허락하시고 강한 고난의 역풍도 불게하십니다. 왜 그런 것들이 합해져서 여러분에게 유익되게 하고 잘되게 하고 하나님의 축복의 계획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주신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고 하나님의 섭리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려고 애를 쓸 때에 문제는 해결되어집니다. 장애물은 제거되어집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우연히 믿음의 조상이 되고 오늘날까지 기독교 2000년 이상 흐르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존경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 아들 이삭을 죽여서 제물로 바치는데 어디 쉬운 일입니까? 백세에 얻은 귀한 아들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 하늘의 별을 봐라 땅의 모래를 보라 네 자신이 앞으로 자손이 번성하고 한 나라를 이룩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분명하게 여러 번 나타나셔서 약속하시고 백세나 되어서 늦게 아기를 낳게 하시더니 이제는 다시 아들을 바쳐라! 속에서 분노 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놀리는가. 바다의 모래처럼 자손이 번성하고 하늘의 별처럼 자손이 번성한다고 하시더니 결국 바치라고 하면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하나님은 이래다 저래다 하는가 하나님도 그렇게 변화가 많은가 더군다나 아들을 그냥 바치는 것도 아니고 제물로 바치면 아들을 조각내서 죽이라고 하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잔인한 하나님 인가하는 온갖 생각이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내가 이런 하나님을 계속 믿어야 하는 것인가? 내가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가나안까지 왔는가, 온갖 생각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하신 그 명령을 따라서 아들을 데려고 모리아 산상에 가지 않습니까? 그리고 아들을 꽁꽁 묶어놓고 칼을 들어서 아들을 찌르려고 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이 얼마나 급했는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내가 이제야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로 알았다’ 하시고 그곳에 숲속의 양을 준비해 놓으셨다가 그것으로 제사를 드리게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환경이 때로는 이해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마음에 상처가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낙심하지 마십시오.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좌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그 속에 약속이 있고 그 속에 은혜가 있습니다. 


2. 원망, 불평하지 않아야 한다. 

요셉의 일생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보기 드물게 모범적인 신앙의 삶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430년 동안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했습니다. 열 가지 기적과 홍해를 건너고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한 후 드디어 가나안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12지파 대표들을 뽑아서 12명의 정탐꾼들이 가나안을 40일 동안 다 정탐을 했습니다. 12정탐꾼이 돌아왔는데 여호수아 갈렙을 빼놓고 10정탐꾼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우리가 다 돌아보니 소문대로 견고합니다. 그리고 키도 장대하게 컸습니다. 또 무기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람들과 싸운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 새로운 지도자를 다시 세워서 애굽으로 돌아갑시다. 그리고 원망을 합니다. 온 이스라엘 민족이 이 소리를 듣고서 같이 원망을 하고 통곡하고 웁니다. 

그때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으니 들어갑시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원망 소리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원망 소리를 들으시고 하루를 일 년으로 잡아서 40년을 광야에서 유리방황하게 하다가 그 어른들은 다 광야에서 죽고 그 후손들만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어떤 상황에 있어도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언제 어떤 상황이 되어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을 찬양할 때, 그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체험 할 수가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아무에게나 하나님이 은혜주고 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한탄을 많이 하지 않았습니까? 말세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 말세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 다 예수 잘 믿는 것 같습니다. 

다 열심히 나와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고 아멘아멘 합니다. 모범적인 신자들 같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가서 내 생활 속에 들어가면 조그만 일에도 낙담하고 불안해하고 초조해 하고 원망 불평하고 조그만 일에도 마음속에 상처를 받고 하나님을 의심하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나지 않습니까? ‘믿어봤자 별수 있나? 아무리 믿어도, 아무리 열심히 신앙 생활해도 밤낮 문제는 계속되고 병은 낫지 않고......’ 하나님 앞에 자연히 원망하는 마음이 들어가기 쉽다는 말입니다. 내가 낙심하는 것, 내가 불평하는 것, 한마디로 말하면 불신앙입니다. 

욥도 뭐라고 말했습니까? ‘주신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입으로 원망치 아니하니라’ 이것이 참 중요합니다. 여러분 어려움 당할 때 중요한 것은 보는 시각도 중요하고 말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말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원망하는 이스라엘 민족들의 말소리를 우리 하나님이 들으시고 그들이 원망한 대로 그들에게 갚으셨습니다. 내가 들은대로 그들에게 갚겠다. 여러분 비록 인생이 힘들고 고달프고 괴로워도 원망하고 불평하지 말고 오히려 우리의 입술을 통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오히려 감사하고 또 감사하면 그 때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개가 날 이렇게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 사람이 내 배우자일수 있고, 자식일 수도 있고, 부모형제, 이웃일 수도 교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지. 바로 요셉이 이처럼 형들을 용서하고 넓은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원인이 바로 거기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지, 저 사람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사람 통해서 나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고, 나를 교육 하려고 하는 것이 있지..... 그렇게 생각할 때 그 사람이 개인적으로 미워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원수 갚고 싶은 마음이 없어집니다. 

오늘 우리가 원수 갚지 아니하고, 서로 맺히지 아니하고 완전히 사랑으로 하나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비결이 있다면 그 사람 개인을 보지 마십시오. 그 배후에 하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언제나 그가 미워지지 아니하고 그가 행한 행동에 관계없이 그를 사랑하게 되고, 그를 위해 주게 되고 그를 위해서 기도하게 되고, 사랑으로 하나 되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 간에도 그렇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배우자를 보냈습니까?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내 배우자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나에게 나쁘게 해도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나를 교육하기 위해서 나에게 필요한 것을 이 배우자에게 보충하도록 하기 위해서 나에게 보내 주었지 그리고 나에게 이렇게 힘들게 하지 그렇게 생각한다면 오히려 감사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어디 배우자 뿐이겠습니까? 우리 인간사 살아가면서 모든 나를 힘들게 하는 그런 상황이나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 이런 시각에서 보고 이런 시각에서 생각한다고 하면 오늘 우리는 누구도 미워하지 아니하고 용서할 수 있고,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고 절망하지 아니하고 기뻐하고 감사 할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3. 용서와 화합의 사람 

고난을 성공의 기회로 삼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난당할 때 하나님을 떠나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가 고난을 성공의 기회로 삼을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누구를 고난을 통해서 성공으로 이끌어 주십니까? 고난 때문에 낙심하고 절망하고 좌절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고난 중에도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하고, 고난 중에도 그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기뻐하고, 고난을 하나님께 순종하고, 날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그 사람에게 고난을 성공의 기회로 삼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자 보십시오. 요셉이 얼마나 마음에 화가 나겠습니까? 아니 형들이 기분 나쁘면 요셉을 불러다 놓고 두들겨 팰 수도 있습니다. 혼을 한번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을 애굽에다 팔아 버립니다. 그리고 간사스럽게도 양털을 가지고 피를 발라서 아버지께 짐승에게 잡혀 먹었다고 그렇게 말합니다. 얼마나 나쁜 사람들입니까? 요셉이 노예 생활하면서 감옥에 갇히면서 그 형들에게 대해서 얼마나 미운 마음이 솟아올랐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형들을 조금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한마디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형들을 만났을 때도 한마디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형님들 왜 나를 애굽에 팔아서 나를 이렇게 고생하게 하였습니까? 한마디 그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형님들이여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들이 아닙니다. 우리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서 하나님이 형들을 앞서서 나를 이곳에 보냈습니다.’  참 멋지지 않습니까? 

이제 감옥에 갇혔습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치고 당당하게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그런데 보디발의 아내는 그만 증오와 질투에 눈이 어두워서 누명을 뒤집어씌우고 감옥에 보냈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 이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었을 때 보디발의 아내가 얼마나 괘심하겠습니까? 보디발의 아내를 불러다가 아마 매를 때리고 감옥에 가두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에 대해서 전혀 해하지 않았습니다. 한마디 나쁘다고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감옥에 갇혔을 때 술 관원과 떡 관원이 있었습니다. 술 관원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앞으로 삼일 뒤에 다시 왕궁에 가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겁니다. 떡 관원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삼일 뒤면 죽을 것입니다. 예언하였습니다. 그 예언대로 술 관원은 삼일 후에 왕을 다시 받들게 됩니다. 

그 때 요셉이 뭐라 말합니까? 앞으로 왕을 다시 보게 되면 나를 기억하십시오. 나는 이 감옥에 들어올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삼일이고 삼년이고 계속해서 부르지 않았습니다. 국무총리가 된 다음에 그 신하를 불러서 얼마나 호되게 나무랄 수 있습니까? ‘내가 그렇게 부탁했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모른척해?’ 그렇게 혼낼 수도 있는데 요셉은 전혀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비난하지도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용서의 사람이었습니다.  

누가 고난을 성공의 기회로 삼을 수가 있습니까? 누구나 다 용서하고 품어줄 수 있는 그 사람, 그리고 사랑으로 하나 될 수 있는 그 사람, 넓은 바다 같은 인격을 가진 그 사람은 고난을 성공의 기회로 삼을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조그만 것에 서로 맺혀 풀지 못하고 그러면 안 됩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이 하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큰 그릇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아무리 나에게 힘들게 하고 나를 괴롭히고 업신여기고 나를 짓밟았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끝까지 용서해 주고 끝까지 품어주고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왜? 그것은 개인이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역사하셨기 때문에, 그리고 그를 용서해 주고 그를 품어주고 받아 줄 수 있는 넓은 신앙 인격이 될 때 하나님은 그가 당한 고난을 성공의 기회로 삼아 주시고 그에 장래를 축복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맺힌 것 다 푸십시오. 이제 새해 되었는데, 작년까지 서로 맺혀 있던 것, 서로 불편한 관계에 있던 것, 서로 갈등 관계에 있던 것, 그거 다 풀어 버리고 새해를 출발해야 이 새해에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넘을 수도 없는 환란의 고갯길을 뛰어 넘고 승리하고 성공했던 요셉처럼 금년 한해도 여러분은 이 고난을 성공의 기회로 삼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환경,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의 기회로 생각하고 그 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낙심하지 말고 환란의 때에도 기뻐하며 감사하시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상황에도 많은 사람들을 용서하고 품어주고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통하여서, 상황을 통하여서 나의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를 이룩해 간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오늘도 내일도 서로 용서하고 사랑으로 하나 되어 승리하며 고난을 축복의 기회로 삼는 복된 한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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