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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명령받아 명령하라! (수 1: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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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받아 명령하라! (수 1:10-15)  
      

:10 이에 여호수아가 그 백성의 관리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11 진중에 두루 다니며 그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양식을 준비하라 사흘 안에 너희가 이 요단을 건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사 차지하게 하시는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들어갈 것임이니라 하라. :12 여호수아가 또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말하여 이르되, :13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였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 :14 너희의 처자와 가축은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쪽 땅에 머무르려니와 너희 모든 용사들은 무장하고 너희의 형제보다 앞서 건너가서 그들을 돕되, :15 여호와께서 너희를 안식하게 하신 것 같이 너희의 형제도 안식하며 그들도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그 땅을 차지하기까지 하라 그리고 너희는 너희 소유지 곧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쪽 해 돋는 곳으로 돌아와서 그것을 차지할지니라.

지구촌 곳곳에서 지구 멸망 징조가 뚜렷하다며 많은 사람들이 큰 불안에 떨고 있다는 뉴스가 있습니다. 
      
지난 해 연말, 자신을 키가 7m인 화성 사람으로 살았다고 주장하는 러시아의 천재 소년 보리스 키프리야노비치가 뉴스에 떴습니다. 그는 오는 2013년 지구에 재앙이 닥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새해 벽두, 미국 루이지애나 주에서는 붉은 어깨 찌르레기 약 500마리가 죽은 채 도로에 떨어졌습니다. 아칸소 주에서도 수천마리의 새가 떨어져 죽었습니다. 아칸소 강에서 8만~10만 마리의 물고기가 죽어 떠올랐습니다. 문제는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태양이 여러 개로 보이는 매우 특이한 기상 현상인 ‘환일현상’까지 나타나 더 불안감을 더욱 부추겼습니다. 공기 속에 뜬 얼음 결정에 태양빛이 반사되어 굴절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중국에서 환일 현상은 나쁜 징조로 여겼습니다.
      
화산폭발이나 대지진 그리고 위성충돌과 지구 온난화, 지구의 극이동 등 환경변화에 따른 과학적 종말론도 함께 대두되고 있습니다.
      
그 날은 분명히 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릅니다(마 24:36). 다만 우리는 그 날을 준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날을 두려워 할 것도 아닙니다. 세상의 자녀들처럼 무시하고 살 것도 아닙니다. 두려움이 아니라 담대함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걱정이 아니라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의 삶을 위하여 들어야 할 명령이 있습니다.

I. 명령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9)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은 명령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를 묻으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분명히 명령하였으니 너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반드시 강하고 담대하여야 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담대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여호수아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10절 말씀입니다.
 :10 이에 여호수아가 그 백성의 관리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
이에’ 그리하여 여호수아는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늘 함께 계실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자신이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래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명령받고 그 명령에 순종하여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여기서 명령하다[hw:x/짜바]는 말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다는 때와 같은 단어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명령을 받고 백성의 관리들에게 명령하였습니다.
      
1.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명령하였습니다.
      
우선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고 여호수아가 그 명령에 따랐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순종하여야 할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따르지 않는 것은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신 것을 말씀하신 것처럼 말하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순종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을 향하여 담대히 선포하는 신앙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어떻게 하였습니까?
      
11절 말씀입니다.
:11 진중에 두루 다니며 그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양식을 준비하라 사흘 안에 너희가 이 요단을 건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사 차지하게 하시는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들어갈 것임이니라 하라. 
      
이 말씀은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내린 명령이 아닙니다. 여호수아는 백성의 관리들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명령의 내용은 백성들에게 전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여호수아는 백성의 관리들에게 백성에게 명령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2. 백성에게 명령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여호수아는 백성의 관리들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관리들은 백성들에게 명령하였습니다. 하나님, 여호수아, 관리, 백성으로 이어지는 명령 체계를 볼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고 싶어도 그 명령을 받을 관리들이 없다면, 관리들이 여호수아의 명령을 따르고 싶어도 명령할 백성이 없다면 일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그 명령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질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가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부탁하신 것을 또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하여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명령받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미루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도 순종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또 다른 사람을 세워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축복하실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론과 그 아들들 즉 제사장들에게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은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축복할 때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을 축복할 책임이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2)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하였습니다. 디모데는 충성된 사람들에게 그 말을 부탁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면 그 충성된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말씀 받아들이고 또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이어져 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전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에게까지 오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사람을 세우지 않는다면 복음은 세상 끝날까지 이어지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이름이 놀라운 이름인 것을 확신하십시오. 또한 예수님의 이름을 세상에 담대히 선포하는 또 다른 사람들을 세워 가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명령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설득과 부탁 그리고 이해와 수용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도 있습니다. 모세가 명령하는 지도력이었다면 여호수아는 부탁하는 지도력입니다.


II. 부탁

여호수아가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12)에게 말하였습니다. ‘말하다[rm'a/아마르]’는 아주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말입니다. 때로는 명령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명령하다는 말보다는 훨씬 부드럽게 부탁하는 말입니다.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지파의 반쪽은 요단강을 건너가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미 이들은 요단강 동쪽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입니다. 이곳은 본래 아모리 사람들이 살던 곳입니다.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이 다스리던 곳을 모세가 정복하여 두 지파 반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민 32:33). 두 지파 반은 요단강 동편 지금의 요르단 왕국이 있는 곳에 생활 터전을 이미 잡았습니다. 그들은 요단강을 건너가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입니다. 
      
요단강을 건너가야 하는 지파는 아홉 지파 반이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갈 준비는 아홉 지파 반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너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여호수아는 백성의 관리들을 시켜 아홉 지파 반에게 건너 갈 준비를 시켰습니다. 요단강을 건너갈 지파들은 양식을 준비하고 채비를 갖추느라고 부산하게 움직였습니다. 
      
바로 이 때 여호수아는 요단강 동쪽에 이미 자리 잡은 두 지파 반에게 직접 협조를 당부하고 협력을 요청합니다.

첫 번째 요청은 무엇입니까?
      
13절 말씀입니다.
:13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였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기억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기억하라는 말은 새기라는 말입니다. 지워지지 않게 도장을 파듯이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기억하라는 말이 맨 뒤에 나왔습니다. 히브리어에서는 강조하는 단어를 먼저 두기도 합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그 말을 기억하라고 강조합니다.
      
무엇을 기억하는 말입니까? 신명기 3:18-20 말씀입니다. 여호수아의 명령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명령한 바로 그 말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모세의 말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모세의 말은 인간 모세의 말이 아니라 모세를 통하여 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1.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에 안 나온 이야기를 성경에 나온 것처럼 이야기한다면 그는 ‘이단’입니다. 성경에 없는 “몇 년, 몇 월, 몇 일”을 이야기하면 이단입니다. ‘언제 종말이 온다!’, ‘여기로 모여라’, ‘나를 믿어라’하는 것은 이단들의 특징입니다. 성경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을 성경의 권위로 이야기하는 것은 이단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길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은 이단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분명히 기록하고 있는 사실을 없는 것처럼 여긴다면 이것은 이단이 아니라 이단 보다 두 단 더 올라가서 ‘사단’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사단’입니다. 이 사단을 약간 강하게 발음하면 ‘사탄’이 됩니다.
      
저는 성경에 없는 이야기를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이단’도 되기 싫습니다. 그렇다고, 있는 사실을 업신여기는 ‘사단’은 더 더욱 되기 싫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급적 있는 그대로 ‘삼단’(?)으로 전달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 시대’에 ‘그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을 ‘이 시대’에 ‘이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들려지는 말씀이 되게 하기 위하여 성경을 기록하신 성령님을 의지할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며 이 시대와 이 역사 속에 주시는 말씀을 들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받는 일에 노력하여야 합니다. 먼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마음에 새기십시오. 그리고 오늘 이 시대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때로 귀에 거슬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하는 성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또,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무엇을 부탁하였습니까?
      
14절 말씀입니다.
:14 너희의 처자와 가축은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쪽 땅에 머무르려니와 너희 모든 용사들은 무장하고 너희의 형제보다 앞서 건너가서 그들을 돕되,
      
여호수아가 두 지파 반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들이 요단강 동쪽에 이미 자리를 잡았다고 가만히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군대를 조직하여 아직 땅을 얻지 못한 다른 지파 형제들 보다 먼저 요단강을 건너가 그들을 도우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도우라는 것입니까? 15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15a여호와께서 너희를 안식하게 하신 것 같이 너희의 형제도 안식하며 그들도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그 땅을 차지하기까지 하라 
      
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동족들에게도 편히 쉴 곳을 주실 때까지, 그들도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땅을 차지할 때까지 그들을 도우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돕다[rz"[;/아자르]는 말은 ‘둘러싸다’는 말입니다. 둘러 싸 보호하여 주고 지원하라는 말입니다.
      
2. 형제를 도우십시오.
      
도우라는 말은 신약의 표현으로 하자면 ‘서로 섬기며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내 배부르다고 종의 밥을 짓지 말라’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정신이 아닙니다. 내 배가 부르더라도 배고픈 사람이 있다면 그를 위하여 밥을 짓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요즘, 여야와 보수·진보 할 것 없이 모두 ‘복지’를 외치고 있다다고 합니다. 한국 사회에 복지이슈가 등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김대중 정부는 ‘생산적 복지’를, 노무현 정부는 ‘참여복지’를 외쳤고, 현 정부 역시 ‘능동적 복지’를 내놨습니다.
      
그런데 요즘 복지에 대한 문제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급변한 상황이 점점 더 심해지기 때문입니다. 실업자가 늘고, 퇴직자들은 영세 자영업자로 전락했습니다. 시장 개방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기술격차는 커지고 있습니다. 비정규직 증가로 고용불안은 심해졌습니다. 가장 심각하게 다가오는 것은 일자리 문제입니다. 중산층의 상징인 내 집 마련의 꿈도 갈수록 멀어지고 있습니다. 평균수명이 늘면서 병원비 걱정은 더해갑니다. 문제는 전형적 중산층으로 볼 수 있는 ‘내 집을 가진 정규직’이라 해도 미래에 대해 안심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형제를 도우라는 말은 헛구호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내 코가 석 자인데 누구를 돕겠다고 하겠습니까? 하지만 이러한 세상이기에 교회가 세상 속에서 하여야 할 일 더 많아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았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서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사랑의 실천에 앞장서야 합니다. 교회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예수님은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시고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37)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을 행함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선을 행하여야 합니다. 이웃을 돕고 세상에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우리가 순종하여야 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사랑의 실천을 결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또,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무엇을 부탁하였습니까?
      
15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15b그리고 너희는 너희 소유지 곧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쪽 해 돋는 곳으로 돌아와서 그것을 차지할지니라. 
      
여호수아는 두 지파 반에게 ‘그런 다음에 당신들은 당신들의 소유지 돌아와 그 곳을 차지하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차지하다[vr'y/야랴쉬]는 말은 점유하다는 말입니다. 재산으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주신 것을 누리라는 말입니다. 
      
여호수아의 말을 듣고 요단강을 건너가 형제들을 위하여 싸우게 될 두 지파 반의 일부는 죽을 수도 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많은 전쟁을 통하여 가나안을 차지하였습니다. 이 가나안 정복 전쟁에 많은 피를 흘렸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순종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눈물과 땀과 피를 흘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가나안은 피의 순종으로 차지한 땅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죽을 수도 있는 그들에게 다시 돌아갈 것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다시 돌아와 누릴 행복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희생과 봉사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3. 안식을 누리십시오.
      
우리는 행복하여야 합니다. 아니 행복을 꿈꾸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이웃을 돕는 사람들은 행복하여야 합니다. 사람들에게는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반드시 행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려야 할 행복은 말초적인 신경을 자극하는 행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셔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행복입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고생스럽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이들의 행복입니다. 비록 십자가를 지는 일이 있더라도 그 너머의 부활을 바라보는 행복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대속의 십자가와 함께 영생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안식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사랑하고 섬기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아버지 세대들이 어려움을 참고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내일에 대한 희망이었습니다. 자신이 어렵더러도 자식들이 행복할 것을 바라보는 소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이 어렵다는 것은 이 희망이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희망만 있다면 살 터인데 희망이 보이지 않으니 절망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약속하는 것은 영원한 희망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주실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늙은 추장에게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추장은 세 아들 중 누군가 한 사람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추장은 아들 셋을 불러 놓고 말하였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해가 뜨거든 저 앞의 높은 산에 올라가서 너희들이 생각하기에 가장 귀한 것을 한 가지씩 가지고 오라!”
      
아들들은 저마다 최선을 다하여 정글을 헤치고, 바위를 타고 높은 산으로 향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돌아왔습니다.
첫째 아들의 손에는 진귀한 돌멩이 즉 보석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첫째에게는 부가 귀한 것이었습니다.
      
둘째 아들의 손에는 흰 독수리의 깃털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 부족이 신성시하는 것으로 명예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셋째 아들의 손에는, 아무 것도 들려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버지! 제가 산에 올라가 보니 저 산 넘어 넓고 푸른 평지가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곳으로 나가야 합니다.”
      
셋째 아들은 부도, 명예도 아닌 희망을 가지고 돌아왔던 것입니다.
      
아버지 추장은 희망을 가지고 온 셋째를 후계자로 삼았습니다. 그 희망 속에는 부와 명예와 그 이상의 것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호수아가 그러하였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에 순종할 뿐만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또 다른 사람들을 세워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말씀을 기억하고’, ‘사랑을 실천하고’, ‘희망을 일구어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함께 이 거룩한 일을 이루어 가는 교회가 되기를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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