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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는 한 해로 살자! (고전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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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최선을 다하는 한 해로 살자! (고전 4:1-5)


새해를 맞이하여 사랑하는 여러분 모두 위에 인류의 축복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류의 어느 누구도 살아보지 못한 2011년을 맞은 이 새해 벽두에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음성을 듣는 일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여기에 왜 왔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러 왔습니다.  우리가 옷을 잘 입는 사람을 보러 온 것도 아니고, 잘 생긴 사람을 보러온 것도 아닙니다.  신령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러 왔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마음의 문을 활짝 여십시오.  귀를 바짝 세우십시오.  그리고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으십시오.

무엇보다 사랑하는 여러분, 새해 벽두에 내 영혼을 향해 선언을 하십시오.  "나는 떡으로만 살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내 인생에는 떡보다 귀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떡보다도 귀한 것을 찾아야 됩니다.  떡보다도 귀한 것을 만들어야 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산다고 하면 불행입니다.  그것은 비극입니다.  종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떡보다 훨씬 더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붙잡고 이 미지의 새해를 열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첫 날을 맞으면서 사랑하는 여러분, 인류의 소망이 되시는 주님을 붙들고 모든 무력감을 벗어 던지고 힘있게 다시 일어서기를 바랍니다.  이 무력감은 대단히 무섭습니다.  인간은 의욕을 상실할 때 두려움과 편견을 합리화합니다.  그러니까 의욕이 자꾸 떨어지는 사람일수록 자기를 합리화하려고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편견을 합리화합니다.  두려움을 합리화합니다.  불평과 원망을 합리화합니다.  무엇 때문에, 누구 때문에, 환경 때문에, 건강 때문에, 나이 때문에, 지식 때문에, 병이 들어서?  기억하십시오.  우리에게 의욕을 대신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리가 무엇입니까?  진리는 사람들의 마음에 무서운 의욕을 주는 것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사람들이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임할 때에 저들 속에 30배, 60배, 100배로 3천명을 일으킬 수 있는 놀라운 의욕이 왔습니다.  모든 무력감을 벗어 버렸습니다.  사탄에게 잡힌 사람들은 무력해집니다.  무력해지면 의욕 상실을 낳고, 의욕상실은 우울증을 낳습니다.  

우울증은 좌절을 낳고, 좌절은 절망을 낳습니다.  절망은 패배를 낳고, 패배는 파멸을 낳습니다.  그리고 파멸은 사망을 낳습니다.  이것이 사탄의 공식입니다.  그러나 모든 무력을 이길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너는 칼과 창을 의지하고 나오지만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과 능력을 의지하고 나간다!"
오늘 이 시간 이후로 이렇게 자기 선언을 하십시오.
"하늘의 하나님이 나를 돕는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누구입니까?  아직 이 땅에 증거 되지 않은 일들을 증명할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본질적인 특징이라고 하는 것은 미래에 이루어질 어떤 목적을 향해서, 아직 이 땅에 이루어지지 않은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서 선견지명을 가지고 끝없이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인생의 모든 역경을 이기는 힘입니다.  내 안에서 믿음만 일어나면 모든 무력감으로부터 해방될 것입니다.  믿음만 일어나면 의욕이 뜨겁게 일어날 것입니다.

때문에 새해 벽두에 우리가 정말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너진 영혼의 재단을 다시 세우는 일입니다.  약해진 내 믿음을 다시 강하게 불태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인도를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을 우습게 알면 안됩니다.  불확실한 인생 길을 가는 동안에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만큼 귀하고 복된 일은 없습니다.

새해가 되면 보편적으로 하는 인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입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복 받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우리가 복 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소원은 우리가 이 땅에서 복 받고 잘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에 길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복 받는 길이 있습니다.  복 받는 식이 있고 법이 있습니다.  그 길과 식과 법을 떠나면 복을 받을 수 없지만, 그 길과 식과 법을 따른다면 누구나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만들어 놓으신 복의 길과 식과 법 중에 하나는 '최선을 다함'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복을 받을만한 사람이 복을 받는 것이 공평하다고 하나님은 생각하십니다.  하나님은 복을 타고난 재능에 주시지 않고 '최선을 다함'에 허락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은사가 있습니다.  재능이 있습니다.  그것도 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은사와 재능만으로는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은사와 재능을 최선을 다하여 갈고 닦는 그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아무리 받은 은사가 크고 재능이 뛰어나다고 하여도 그것만 믿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결코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 대부분은 누구보다도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한 사람들입니다.  트윈 폴리오로 유명한 윤형주 장로님이 방송 중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난 2009년이 송창식씨와 트윈 폴리오를 결성하여 활동한지 40년이 되는 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송창식씨에게 기념 콘서트라도 하자고 제안을 하셨답니다.  그랬더니 송창식씨가 콘서트를 하려면 자기와 최소한 10달을 연습해야만 한다고 해서 결국은 성사되지 못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것이 바로 프로의 근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대중음악을 하는 연예인들의 화려한 모습만 보고 저들이 쉽게 인생을 횡재한 사람처럼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그렇지만 저들이 그 자리에 서기 위해서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하였는가를 알게 된다면 겉만 보고 함부로 사람을 평가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대부분 저들이 누리는 영광과 인기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저들이 흘린 눈물과 땀의 열매들입니다.  따라서 성공과 복은 어느 날 우연히 재수가 좋아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남다른 노력과 최선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시편 1편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사람이 꾀를 부리는 사람입니다.  요령을 피우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꾀를 부리고 요령 피우는 사람을 가리켜서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꾀를 부리고 요령 피우는 사람들 중에 복 받아 성공하는 사람을 본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복의 길에서 벗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세상에 왕도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복을 쉽고 편한 넓은 길에 놓아두지 않으시고 힘들고 어려운 좁은 길에 놓아 두셨습니다.  그래야 복이 공평하게 사람들에게 주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팔자를 이야기합니다.  일이 안되면 팔자소관으로 돌려버립니다.  그러나 세상에 팔자는 없습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이 그런 것들을 만들어 놓으셨을 리가 없습니다.  사람들 눈에는 팔자가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어떤 사람은 팔자를 좋게 타고 나는 것 같아 보이고, 어떤 사람은 팔자를 나쁘게 타고 나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팔자를 좋게 타고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 팔자를 믿고 게으름을 피우면 그는 결국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팔자를 나쁘게 타고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그 팔자를 무시하고 열심히 자기의 일에 최선을 다하면 그는 결국 복을 받게 되고 성공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팔자소관은 실패에 대한 자기 책임회피의 한 방법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꾀와 요령을 부리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 중에서도 제일 어리석은 일이 무엇인지 여러분은 아십니까?  예수 믿는데 꾀를 부리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데 요령을 피우는 것입니다.  아십니까?  꾀로 공부하는 사람 중에 우등생이 되는 사람이 없습니다.  꾀를 부리며 운동한 사람 중에 스타가 된 사람도 없습니다.  꾀를 부리며 직장 생활을 한 사람 중에 출세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물며 예수를 믿는 것도 꾀를 부리며 요령껏 대충 믿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2011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에서 꾀와 요령을 추방하십시다.  게으름을 추방하십시다.  대충, 대충하는 습관을 버리십시다.  남과 경쟁하여 무엇을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말고 그저 우직하게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하십시다.  세상 일도 열심히 최선을 다하십시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에게 하듯 눈속임을 하지 말고 주께 하듯 최선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십시다.  그래서 하는 일에 복을 받으십시다.  하나님께 그 복을 받을 때까지 포기하지 말고 안타까워하며 최선을 다하십시다.

율법을 잘 지켜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잘못 생각한 율법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들은 나름대로 율법을 열심히 지켰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말씀을 잘 지키려고 안식일에 대한 세칙을 600여 가지나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하나님을 오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지 그와 같은 율법을 잘 행한다고 얻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지 율법을 행함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 알아 가지고 입으로만 "주여, 주여"하고 행함이 없는 값싼 은혜주의자들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 한국에 많습니다.  율법주의자나 값싼 은혜주의자나 모두가 다 잘못되었습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율법주의자들보다 율법을 더 잘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위선은 경계하셨지만 저들의 행하는 바 열심은 본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올 한 해를 세상과 하나님께, 그리고 자신과 주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해로 만들어 보십시다.  특히 예수를 믿는 일에 있어서 한 번 죽자고 열심히 믿어 보십시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오늘 본문이 쓰여진 1세기의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성도들로 가득 찬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성령을 체험했고 또 성령의 풍성한 은사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회는 자라지 못했습니다.  사회 속에 거룩한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그리스도파라고 하는 파당을 만들어서 끝없는 분열과 불화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일이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교인들, 그들이 끝없이 불화하고 분열하면서 교회가 교회다운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진단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끝없이 다투고 분열했던 이유는 첫째로, 하나님의 일을 자신의 관점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본문 3절에 보면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이것은 자기의 인생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겠다는 그런 선언이 아닙니다.  판단은 필요한데 자신의 관점에서 바라본 주관적인 판단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자기 판단은 교회와 공동체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자신에게도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 판단의 주관적 오류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던 사도 바울은 그래서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그리고 바울의 고백은 계속됩니다.  4절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내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자책할 어떤 것을 내가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내가 의롭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내가 아무리 정의롭다고 스스로 주장해도 그것으로 내가 의롭다는 마지막 판단을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주관적인 판단의 오류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인생의 판단에 있어서 자기 자신의 관점에서만 나를 판단하는 것은 매우 위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결론을 내리는 일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자기 주관적인 판단을 앞세워서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또 다른 교회 분열의 씨앗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끝없이 다투고 분열했던 두 번째 이유는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나를 향한 이웃의 충고에 귀를 열고 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충고를 도무지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라갈 수가 없습니다.  잠언에 보면 충고의 아름다운 축복에 관한 교훈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웃의 비판에 귀를 기울여 들을 줄 아는 귀는 복된 귀입니다.  복된 인생입니다.

잠언뿐만 아니라 여러 군데 보면 모사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모사라는 단어의 뉘앙스가 우리 말 뉘앙스로는 아주 안 좋게 들립니다.  내 약점을 알면서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따뜻하게 내 마음을 열고 나를 세워줄 줄 아는 이런 위로자, 이런 충고자, 이런 격려자, 이런 상담자 친구들을 내 인생에서 가진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 주변에 모사꾼이 많으면 그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서 충고는 필요한 것입니다.  이웃의 관점에서 내 인생에 대한 그 맹목성을 진단하고 비판할 때 우리는 겸허히 귀를 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참고 사항일 뿐 내 인생에 대한 마지막 판단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판단하는 것이 잘못될 수가 있는 것처럼 종종 이웃들의 나를 향한 판단에도 편견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나를 향한 이웃의 판단은 결코 마지막 판단의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판단할 때도 그래서 참으로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은 그래서 판단의 악을 경계합니다.  판단하지 말라,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이웃을 비판하는 비판으로 도리어 비판받을 것을 각오하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사람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또 다른 분열의 씨앗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강조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의 관점을 가지고 내 인생의 미래를 열어 가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시각과 관점에서 내 인생을 보십시오.  주님의 판단으로 나를 판단해 보십시오.  이것이야말로 내 인생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관점에서의 새로운 시작,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바로 이 출발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들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최고를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냥 우리의 최선을 요구하십니다.  사람들은 최상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최선을 요구하십니다.  가만히 보면 세상은 언제나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에게만 기회가 주어집니다.  두 달란트를 맡은 사람이 인정을 받고 두각을 나타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재능이 두 달란트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여도 그 형편과 처지에서 자신이 최선을 다한다면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최선을 다하였을 때와 똑같은 인정과 칭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과부의 엽전 두 푼은 세상에서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세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이 있다면, 그것이 자신의 최선이라면 과부의 엽전 두 푼은 때로 부자의 자루 돈보다 더 크게 빛을 발하게도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이 욕심을 내셔서 스카우트 하셨던 베드로는 별로 유능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밤새도록 빈 그물질을 한 어찌 보면 무능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는데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그의 무능함을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밤새도록 그물질을 한 베드로의 그 우직함과 충직함을 보셨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재능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고, 충성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직하고 충직한 베드로를 귀하게 보시고 축복하시니까 밤새도록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던 사람이 두 배에 가득 채우고 남을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욕심을 내셔서 스카우트한 사람이 또 있습니다.  사울이라 불리던 바울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한 답시고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려고 다메섹으로 내려가던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분별력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어리석음에는 별로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그의 마음에만 관심이 있으셨습니다.  자기 딴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위하는 진심, 그리고 그 진심에 최선을 다하는 열정을 보셨습니다.  바울의 열정은 정말 흉내내기도 어렵습니다.  사도행전은 어찌 보면 바울행전입니다.  바울의 그 충성과 열심은 사도행전을 거의 혼자 쓰다시피 할만큼의 역사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 생활과 신앙생활을 열심히 충성스럽게 하는 한 해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대충, 대충 하는 습관을 털어 버리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교회와 하나님과 세상을 한 번 섬겨보십시다.  우리에게는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을 대충 대충하려고 하는 어리석은 마음이 있습니다.  꾀부리고 요령 피우며 그냥 주일날 예배당 뒷자리에서 대충 예배만 드리고 살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을 버려야만 여러분의 인생이 바뀔 수 있습니다.  그것을 버리면 여러분의 인생이 바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역전 될 것입니다.  그것을 버리면 여러분을 통해서 교회는 크게 세워질 것입니다.  그것을 버리면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이 덕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건성으로 예배드리지 말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십시다.  할 수 있는 대로 결석은 물론이고 지각도 하지 말고 예배에 정성을 쏟으십시다.  찬송도 기도도 건성으로 하지 말고 마음을 집중하여 찬송하고 기도하십시다.  그리하여 찬송 때마다, 기도 때마다 은혜를 받아 보십시다.  특히 설교 시간에 집중하십시다.  그리고 시간 시간마다 주시는 말씀의 은혜를 놓치지 마십시다.

셀 가족모임과 교회 각종 정규모임에도 빠지지 말고 참여하십시다.  그리고 열심히 활동하십시다.  교회 활동이 너무 지나쳐서 가정과 직장 일에 큰 지장이 있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시간을 잘 쪼개면, 그리고 불필요하고 건강하지 못한 시간들을 정리하면 얼마든지 가정과 직장에 충실하면서도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헌금생활도 열심히 하십시다.  특히 온전하고 흠 없는 십일조생활을 하십시다.  하나님과 교회가 너무 좋아서 언제나 제일 좋은 것을 드리고 싶은 마음을 한 번 가져보십시다.  예수 믿는 맛을 한 번 제대로 느껴보는 한 해가 되게 하십시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삶에, 가정에, 직장에, 사업에, 교회에 부흥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여기에 보면 우리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세 가지 약속을 하셨습니다.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 주의 백성들에게 세 가지를 주고 싶어하십니다.  칭찬과 영광과 존귀입니다.  그 분은 우리를 칭찬하고 싶어하십니다.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고 싶어하십니다.  우리를 존귀하게 하고 싶어하십니다.  그래서 그 분은 우리의 삶 속에 칭찬할 거리를 찾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그때에 우리가 주님 앞에 서서 칭찬 받으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칭찬하실 때에 칭찬할 만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이겠습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성실성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본문 2절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충성이라는 단어는 영어 성경에서 성실성이라는 단어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충성으로 번역해도 괜찮고 성실함으로 번역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여러분과 저의 삶에서 제일 보고 싶어하는 요소는 맡겨 주신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얼마나 성실하게 임하고 있느냐?  그 성실성을 보고 싶어하십니다.

A.T. Robertson이라는 성서 원어학자는 '충성'이라는 단어를 정의하기를 여기서 말하는 충성이라는 단어는 "공개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성실함이다"라고 했습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아 저 사람 정말 성실하지"  나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 모두에 의해서 함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성실성, 주님께서는 이 성실함을 보고 싶어하십니다.  그리고 보시자 마자 그것을 칭찬하시고 싶어하시는 주님,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그 주님이 한 해를 시작하는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이런 성실함의 요소들을 보고 계실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와 신앙생활에 후회 없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자라나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는 한 해가 되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정말 하나님과 사람들, 무엇보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부끄럽지 않는 성실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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