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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행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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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행 20:35)


사도바울이 인용한 본문의 말씀은 복음서에는 없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사상을 반영하는 말씀에서 인용했다고 봅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에 『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바울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결론적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받기 위해 주는 것(give and take)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기 주는 것은 거저 주는 선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선물을 주는 솟는 샘처럼 부요한 단체입니다. 

Ⅰ. 교회는 값없이 거저 받은 거룩한 공동체 입니다. 

마태복음 10장 8절에 『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고 했습니다.
교회는 선물을 받은 거룩한 단체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선물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은 십자가를 통해서 오는 선물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에 『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고 했습니다.
거저 받은 것은 예수(구원)입니다. 그 선물이 바로 구원입니다. 사랑, 예수, 복음, 구원은 동일선상에서 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받아가는 비결은 믿음입니다. 이 선물은 완전히 은혜(값없이 공짜)로 받은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4절에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고 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경제원리입니다. 십자가는 경제원리입니다. 값이라고 했습니다. 

Ⅱ. 교회는 값없이 거저 주는 거룩한 공동체 입니다. 

마태복음 10장 8절에 『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고 했습니다. 
교회가 줄 수 있는 선물은 복음, 곧 예수 구원입니다. 교회는 예수 구원을 온 세상에 전달하는 통로(관수로)입니다. 
이사야 55장 1절에 『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7절에 『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6절에 『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7절에 『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고 했습니다. 
왜 거저 줍니까? 

1) 내가 받은 사랑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 『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3-14절에 『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35절에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라고 했습니다. 
왜 거저 줍니까?

2) 내가 받은 사랑에 대한 감사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 15절에 『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 했습니다. 
왜 거저 줍니까?

3) 구원 받은데 대한 보은의 충성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16-17절에 『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찌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고 했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원수로 갚아서는 안됩니다(I don t warm a snake in one s bosom). 

Ⅲ. 사랑의 표현은 희생입니다. 

본문 20장 35절에 『 약한 사람들… 』이라고 한 것은 경제적인 면에서 빈궁한 자를 가리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병들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자를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3장 16-17절에 『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라고 했습니다. 
학개서 2장 8절에 『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필요 때문에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자신의 영광에 우리를 참예시키고자 강권하시는 것입니다. 
전도서 11장 1절에 『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고 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은혜를 받고 자기 자신까지 드렸습니다.
로마서 16장 4절에 『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사랑의 표현은 자신이 순교적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 『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고 했습니다. 
산 제물이라는 표현은 제물의 개념으로 볼 때 모순입니다. 제물이 살아서는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산 순교자라는 말도 마찬가지로 모순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다른 의미로 언어의 활용적 가치를 높여야 할 필요를 느끼는 것은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표면적(表面的)의미보다 이면적(裏面的)사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산 제물이나 산 순교라는 말은 목숨은 살아 있으나 이미 목숨까지 바친바 된 신행일치의 신앙철학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산 제물, 산 순교라는 말의 순화적 표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형(물리적), 무형(정신적)의 모든 재능(달란트)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려진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탄생 이후 이 세상은 대환란이 시작된 것입니다. 환란의 강도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고 하고 실제로 죽이는 데까지 이른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환란이 어디 있겠습니까? 대환란과 함께 택한 백성들에게 구원을 받아야 하는 필연적 과제가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구원의 방법을 우리를 통하여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했습니다(고전 1:21). 그래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한없이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었습니다(고전 1:1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주면 살고 받으려고 하면 있는 것까지 빼앗기고 맙니다. 이것은 개인이나 가정이나 다같이 적용되는 천정(天定)의 법칙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6-8절에 『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톨스토이는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에서 인간에게 땅이 어느 정도 필요한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주인공 바흠은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온 종일을 걸어서 많은 땅을 차지했지만 출발점에 도착하는 순간 피를 토하고 쓰러져 죽었습니다. 결국 바흠은 그 넓은 땅을 남겨둔 채 3아르신(약 70cm)도 채 안 되는 자신이 쓰러진 곳에 묻혔습니다. 톨스토이는 인간에게는 많은 땅이 필요 없다는 것을 경고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넓은 땅을 보면 소유하고 싶은 충동을 다스릴 길이 없습니다. 육욕을 쳐서 복종시키면서도 여전히 갈등은 남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가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경주 최부자 가문입니다. 그가 죽을 때 자손들을 모아놓고 유언하기를 

"① 우리 집 반경 백리(40km)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② 우리 자손들은 벼슬을 하되 진사(進士)이상 하지 말라. ③ 땅을 살 때는 흉년일 때 사지 말라"고 했다고 합니다. 
독립운동가 이시영(李始榮) 박사(1869. 12. 3-1953. 4. 17)는 조선말기 1869년(고종 6년) 서울 저동에서 태어났습니다. 1910년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자 만주로 망명하여 류허현에서 독립군 양성에 힘쓰다가 1919년 4월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법무총장, 재무총장을 역임했습니다. 

이른바 삼한갑족(三韓甲族, 우리나라에 예로부터 문벌(門閥)이 높은 집안을 일컫는 말)이라 불리던 명문가의 후손으로 형 건영, 석영, 철영, 희영, 동생 호영과 함께 6형제가 전 재산을 바쳐 독립운동에 투신한 집안입니다. 
이러한 공로로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서훈(敍勳)했습니다. 백사 이항복의 19대 후손으로 청렴하기로 유명했던 이시영 선생은 송곳하나 꽂을 땅도 남겨두지 않은 채 서울 중구 일대 2만평 넘는 땅이 저들 가문의 재산이었으나 선생은 전 재산(현시가 600억 원)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했습니다. 이들 형제는 60명의 대가족 모두를 12대의 마차에 나누어 태우고 1910년 겨울에 서울 명동을 떠나 눈 내리는 만주로 망명했습니다. 

서울 명동을 떠나면서 재산을 처분한 재산 총액은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1,000억 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들 가문의 형제들은 국권회복을 위하여 오직 한 마음으로 움직였던 것입니다. 이들은 이 세상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도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놓는데 하물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우리가 해야 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나를 주께 드리고 내 가진 모든 것을 주께 드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롱펠로우(Longfellow)는 말하기를 "그대가 가진 것을 주라. 그것은 어떤 사람에게는 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에드먼(V.R. Edman)은 말하기를 "주님께 드린 것은 무엇이나 주님의 손에서 나뉘어서 무리들에게 주어지며 그들의 필요에 충분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모자랐을 때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습니다. 

요한복음 2장 7-10절에 『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축사하신 후에 오천 명을 먹이시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습니다.

요한복음 6장 9-13절에 『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드려진 것은 그대로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주는 나! 주는 가정! 주는 교회가 됩시다.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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