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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전도회주일] 어머니여, 자녀를 위하여 울어야 합니다 (눅 23: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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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여, 자녀를 위하여 울어야 합니다 (눅 23:26-28)
   

오늘은 여전도회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제25회 총회에서 결의되었으니, 제정 70주년이 넘은 아주 오래된 특별주일입니다. 모든 한국교회는 여전도회가 있습니다.  모든 교회들이 개척 시절부터 여전도회를 조직하였고, 봉사하도록 힘쓰고 있습니다.  여전도회주일을 맞아 본래적인 사명에 충실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가야겠습니다. 

“이제는 여성 지도력이 필요합니다”라는 교계신문의 사설을 읽어 보았습니다. 우리 사회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여성의 지도력을 우리 사회와 교회를 향해 다시 한 번 발휘해야할 때가 되었습니다.  지금 교회는 여성의 수가 절반을 훨씬 넘어서 전교인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여성들은 남성의 동반자라는 생각을 넘어 이제는 여성의 지도력을 인정하고 더욱 확대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21세기를 흔히 3F의 시대라고 합니다.  Female -여성적인, Fiction -창조적인,  그리고 Feeling -감성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그동안 남성들이 이 세계를 지배하면서 남성적이고, 근력과 힘, 지성적인 면을 강조하였지만, 이제는 여성적이고, 창조적이고, 감성적인 것을 강조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여성의 지도력을 높여야 합니다.  

여성들을 연구해보면, 여성들은 말을 잘 하고, 잘 듣는 편입니다.  여성들은 언어 능력에 있어 남성들보다 30%가 더 뛰어난다고 합니다.  남자들은 한쪽 뇌만 가동해서 말하는데 비하여 여성들은 좌뇌와 우뇌를 둘 다 사용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말로 해서 여성을 이기는 남자는 없다고 합니다.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연인 사이로, 남자 말합니다.  “너 어제 어디 갔는데 휴대폰도 꺼놨냐”고 다그치자, 당장 여자 쪽에서 반격이 들어갑니다.  “그래 너 말 잘했어. 그러니까 3년 전 97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때 왜 휴대폰을 꺼놨니?”라고 되받아칩니다.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3년 전에 어느 날, 휴대폰을 꺼 놓은 것까지 기억하고 한번 써먹으려고 입력해놓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올라가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를 지워 끌고 가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매를 맞고, 채찍에 맞고 지칠 때로 지쳐 있었기에 더 이상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없다고 판단하는 로마 군인들은 들에서 오는 시몬이라는 한 구레네 사람을 붙들어서 그에게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게 하였습니다.  

그 때에 많은 백성과 여자의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 가고 있었는데, 특별히 여자들은 고난 받으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들려주었고, 불치의 질병을 고쳐주시고, 사람으로 인정하시면서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유대교권자들의 시기와 질투로 아무런 저항도 못해보고 죽어야 하는 현실을 보면서 울분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은혜를 감사하면서 가슴을 치고 통곡하였습니다.   이때에 우리 주님은 여인들을 향하여 한 말씀하셨습니다.  28절입니다.  “예수께서 여자들을 돌아다보시고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두고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두고 울어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는 예수님을 기록하면서, 여성들을 이해하여 주시고, 관심을 가져주시고, 여성의 억울함을 권고하시는 예수님으로 그려주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보다는 누가복음에서는 여성들이 부각되고, 당시의 천대받던 여성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협력하며 섬기고 있었고, 예수님의 활동하시는 중에 여성들을 알아주었고, 여성의 억울함을 들어주셨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복음은 남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성들을 배제하지 않는 복음이었고, 하늘나라는 가난하고 보잘것없어 천대받는 여성을 위하여 준비되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가난하고 천대받는 사람들, 당시의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하던 여성들, 외국인, 이방인들을 위하여 오신 예수님을 보여주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빌라도의 관정을 나와서 골고다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여성들이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러면 아무리 고통 속에 계신 주님이라도 그들을 위로하면서 한 말씀해주셔야 했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두고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두고 울어라.”고 하셨습니다.  직접적으로 예루살렘의 여성들에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을 두고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의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셔야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억만 죄악을 친히 담당하시고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인간적인 감정으로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의 크신 구속을 완성하시고 다 이루시려고 하십니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라는 말씀은 결연히 십자가를 지시겠다는 의지로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하여야겠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위하여 울지 말라고 하시면서 애통하는 관심의 대상이 잘못되었다고 하십니다.  정말 애통하고 가슴치고 울어야할 일은 우리들 자신과 우리의 자녀들 때문이어야 합니다. 정작 가슴치고 안타까워해야 하는 일은 우리의 죄악성을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울어야 합니다.  여전히 죄 가운데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우리 자신의 완악함으로 울어야 합니다.  십자가로 몰아가는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에 울어야 합니다.  

둘째로 “너희를 위하여 울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자신을 돌아보라는 말씀입니다.  “너희와” 이 말은 우리들 자신을 말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하여 울어야 합니다.  사실 나 자신의 문제를 놓고 눈물로 간구하고, 여전히 죄 가운데 살고 있는 자신의 나약함을 가지고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고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언제 울어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작년 11월에 뼈만 앙상하게 남으신 어머니의 손을 잡고 ‘이제 예수님만 의지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가슴에 안고, 예수님을 부르면서 남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니, 어머니가 ‘아멘’하면서 응답하시는데, 감사한 마음도 들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한동안 울었습니다.  어머니도 울고, 저도 울고 옆에 앉은 아내도 울고 세 사람이 한참 울다가 왔습니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강해지고 독해져서 그런지 눈물이 말라버렸습니다.  여간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어도 눈물이 없습니다.  가슴 아픈 일을 겪어도 눈물이 말라버렸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별 것도 아닌 일에 울고 있으면, 더욱 나약해지고, 소심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물이 말라버린 것을 가지고 안타까워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무능하고 연약하여 자신을 이길 수 없음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울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우리의 신앙의 현주소는 어디쯤인지,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해야겠습니다.  

셋째로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자식을 키워야 하는 것이 정답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쯤 자식을 길렀으면 잘 해보겠는데, 젊었을 때 어떻게 무슨 가치관을 가지고 길렀는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잘 자라주고, 교회를 떠나지 않은 것만도 감사하기만 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의 자식들 때문에 울어보셨습니까?   예전의 어머니들은 아이들에게 먹일 것이 없고, 입힐 옷이 없고, 가난을 물려줄까봐, 공부하지 못한 한을 대물림할 것으로 생각되어 울었습니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우리를 사람으로 키우면서 우셨습니다.  정말 먹일 것이 없고, 입힐 것이 없어 우셨습니다.  그리고 공부시키려고 우셨습니다.  

우렁이 이야기를 아십니까?  논에 사는 우렁이는 새끼를 낳으면 그 새끼가 어미 속살을 파먹으며 자라는데, 어미우렁이는 껍질만 물 위에 둥둥 뜬다고 합니다.  그러면 새끼 우렁이는 ‘아, 우리 엄마 뱃놀이 한다.’고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자식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어미를 빗대어 하는 말이 우렁이 어미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 어머니들의 희생을 잘 나타내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어머니는 우렁이 어미와 같은 어머니였다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저의 어머니는 여러 자식을 키우면서 참으로 많이도 우셨습니다.   형님이 학교에 가지 않고, 친구들과 어울려 서울 시내를 쏘다니다 돌아오면 붙잡고 우셨습니다.  여동생이 교대에 입학하려고 시험쳤는데 떨어지고 돌아올 때에 동생을 붙잡고 한참을 함께 울어주셨습니다. 넷째 아들이 겨울 등반에 나섰다가 설악산 토왕성 폭포에서 눈사태로 세상을 먼저 떠날 때에는 그렇게 자주 우시던 눈물마저 말라버렸습니다.   저는 우리 어머니의 눈물어린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자녀를 위하여 울라는 말씀은 눈물로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자녀를 위해 울라는 말씀은 눈물로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은 기도입니다. 무엇보다도 귀한 것은 부모님의 기도입니다. 자식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한 그 자식은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자녀들을 꾸짖기 전에 기도하세요. 기도하고 꾸짖으면 낙심하지 않습니다. 분노하지 않습니다. 자식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실 때에 하나님은 어머니의 안타까운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기도하실 때에 눈물로 기도하는 것은 간절하다는 말씀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만이 살길임을 알기에 눈물로 기도합니다.  한 영혼, 우리의 자녀는 반드시 구원받아야 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구원받은 자녀로 태어났으며, 구원을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녀라고 울부짖으면서 예수 믿게 해야 합니다.    믿음의 대를 이어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물려줄 믿음이 없어, 유산으로 남겨줄만한 믿음이 없어 울어야 합니다.  

눈물이라고 하면 여러 가지의 눈물이 있습니다.   남의 불행을 보면서 슬플 때에 흘리는 눈물이 있습니다.  기쁠 때에 흐르는 눈물이 있습니다.   사랑할 때에 흘리는 눈물, 억울할 때에 분노에 차서 흐르는 눈물, 감격스러워 흐르는 눈물, 그의 진실함을 어찌 표현할 수 없어 흘리는 눈물, 다양한 눈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울라는 말씀은 기도의 뜨거운 눈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가 눈물로 기도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왕하20:5)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눈물로 기도한 사람입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6:6)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한없이 부족하고 죄인임을 고백하면서 울었습니다. 그의 베개를 적셔내었고, 그는 눈물로 기도하면서 요를 적시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재기할 수 있게 붙들어주셨습니다.  

눅7:31-32에는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눈물이 말라 버린 시대가 되었습니다.  감정이 싸늘하여졌습니다.  

네 자녀를 위하여 울라는 말씀은 간절한 마음, 안타까운 마음으로 자식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여성들에게는 영적인 힘과 동정심이 많습니다. 영적으로 예민하면서도 확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눈물이 많다는 말은 동정심이 많고, 온정과 자비심이 많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선민은 어머니에 의하여 결정되었습니다.  유대인은 어머니가 유대인이어야 유대인이 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면서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의 가정에 있어 어머니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선민의 조상으로 남자만 택한 것이 아니라, 돕는 배필들도 아울러 선택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식들은 세 부인을 통하여 생겨났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택하신 선민은 아브라함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 사라의 태에서 난 이삭은 선민이 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영적인 상속자는 아브라함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어머니 사라에 의하여 결정되었습니다.  

이삭에게 있어 부인은 한 부인 리브가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삭은 두 아들 중에 에서를 선택하려고 하였지만, 부인 리브가가 택한 야곱을 선민으로 이어지게 하셨습니다.  선택권은 어머니에게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신약의 사도 바울도 디모데의 믿음의 계보를 말씀하시면서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 1:5)  모두다 외할머니, 어머니의 신앙이 아들에게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1969년에 샤리트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국민 전체 뿐 아니라, 온 세계 유대인의 관심을 끌었던 사건이었습니다.   일명 샤리트 사건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사건의 본질은 “누가 유대인인의 자녀인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사건의 당사자는 ‘베냐민 샤리트’라는 이스라엘 해군 소령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해군 사관학교 졸업생 중에서도 두뇌가 명석하고 뛰어난 수재였습니다.   그는 아주 훌륭한 유대인 엘리트였습니다.  그는 영국 유학 중에 기독교인 영국 여자와 결혼하여 두 아이를 둔 가장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의 두 아이가 다니는 유대인 초등학교에서 가정환경 조사표를 보내왔습니다.  환경조사표에는 종교 난에 두 가지를 표시해야 했습니다. 첫째는 어느 민족인가?  두 번째는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는가? 라는 것이었습니다.  샤리트 소령은 주저함이 없이 자녀들은 유대인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시당국 교육위원회에서는 그 조사표를 가정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들의 자녀를 유대인 란에 말고, 기타 란에 기입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유대교로 개종하지 않는 이교도의 어머니에게서 낳은 아이는 유대인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는 해석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을 유대교도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평소에 유대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하였던 이스라엘 해군 장교 샤리트는 법원에 제소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통파 유대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재판부에서는 샤리트 소령의 아이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인이라고 등록하게 했습니다.  “유대인은 어머니가 유대인이어야 유대인이다”는 탈무드의 정의를 확인시켜준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눈물에는 믿음이 들어있고, 사랑과 애정이 담겨있습니다.  당신의 안타까운 마음이 눈물을 쏟아내고 통곡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에 끌려가는 자식을 보면서 밤에 일어나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딸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기절함이로다”(애 2:11)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어머니들은 그들의 눈이 눈물에 상하였습니다.    애간장이 녹아내렸습니다. 눈물의 기도로 키운 자녀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네 자녀를 위하여 울라는 말씀은 신앙의 모범을 보이라는 말씀입니다.  너희와 너희 자식을 위하여 울라고 하셨습니다.  자녀를 위하여 우신다고 하면 자신을 위하여 먼저 울어야 합니다.  자식의 영혼도 문제이지만, 부모의 영혼이 더욱 시급한 문제입니다.  부모가 바로서면 자녀도 바로 설 수 있습니다.  부모가 교회를 잘 다니면 자식을 저절로 교회에 다니게 됩니다.   부모가 기도하고 부모가 헌금생활하면 자식은 따라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부모의 그 자식이 됩니다.  그 아버지의 그 아들, 그 어머니의 그 딸이 됩니다.   자식이 잘못되는 것은 거의 부모의 책임이요, 부모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모델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으라고 하실 것입니까?  예수를 나처럼 믿으라고 하실 것입니까?  착하게 살라고 하지 말고, 먼저 부모님이 착하게 사시면 됩니다.  교회에 나가라는 말씀하실 것이 아니라, 먼저 교회에 나오시면 됩니다.  

자녀를 위하여 울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사랑을 품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올라가시는 중입니다.  그동안 너무나 많은 매를 맞고 채찍에 맞아 기진맥진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을 안타깝고, 불쌍한 마음으로 따르는 성도들의 가정을 생각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자기 가정을 구원해야 합니다.  남의 집을 생각하기 전에 자기 집, 자기 가정을 구원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식을 사랑한다고 해도 우리 주님이 사랑하시는 것만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더욱 급선무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풍성한 사랑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을 가지고 자식을 사랑해야겠습니다.

이 세상에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자식을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위험도 감수합니다.  

자식을 위한 일이라고 하면 불법도 서슴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기적인 부모, 믿음이 없는 부모, 세상 죄악에 빠져 나오지 못하는 부모님들 때문에 마음 고생하면서 교회를 떠나는 자식도 있습니다.  자식을 사랑한다고 하는데, 부모님의 이기적인 사랑 때문에 마음 아파하며 고통 받는 자식들이 있습니다. 부적절한 부모는 있어도 부적절한 자식은 없다고 합니다.  문제 부모는 있어도 문제아동은 없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마음에 부담이 됩니다.  내가 문제라는 말이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요, 그것을 받아들일 때에 우리는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의 입장만 생각하지 말고 자식의 입장을 생각하며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하여 힘써야겠습니다.   

시127:3에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라”고 했습니다.  자식은 나의 자식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주신 기업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씀입니다.  내 마음에 맞는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 길러야겠습니다. 

성 어거스틴을 낳은 어머니 모니카 여사의 일화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이탈리아 밀라노성당에 다니던 어머니 모니카가 아들을 염려하며 감독 암브로시우스에게 기도를 부탁드렸습니다.  그 때에 감독이 하신 말씀은 참으로 귀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눈물로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는 한 그 자식은 결코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자녀의 인격과 영적 성장은 어머니의 가슴에서 시작됩니다. 어머니의 따뜻한 가슴에서 자식의 따뜻한 마음도 인격도 영성도 자라납니다.  어머니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과 같습니다.  어머니의 영적 파수꾼이요, 가정의 불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자산은 눈물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을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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