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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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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 4:1-6)


종교 개혁자 죤. 칼빈은『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이는 자기를 알 수 없고 자기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호세아 4장 1절에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죄를 범하게 되었고, 그 죄의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호세아 4장 6절에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고 했습니다. 

잠언 1장 7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시편 14편 1절에 보면『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고 했습니다.

지식의 근본이 없는 어리석은 인생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다』는 어리석은 말을 자랑삼아 합니다. 그것은 무서운 죄악이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를 알아야 합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아야 합니다』(6:3).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고 탄식하시며(4:1),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6:6)고 했습니다.

여기서『인애』란「헤세드(ד󰘑󰕛)』라는 말로서 약하고 고통받는 자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자비, 언약에 기초한 사랑으로서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은총과 긍휼을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리고『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다아트(ת󰘞󰕐)」라는 말로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경험에서 얻게되는 체험적 지식을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얻어지는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는 자가 예배를 드리고, 찬송을 부르고, 봉사를 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헌금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는 제목의 설교로 함께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찾아오신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창조한 세계에 오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사단의 미혹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는 두려움과 죄책감 때문에 무화과나무 밑에 숨었습니다. 하나님을 피하여 숨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아오셔서『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셨습니다. 두려움과 수치심을 가리워 주셨습니다. 

아담을 찾아오신 그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을 죽이고 태연해 하는 가인을 찾아오셔서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하여 그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악한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찾아 오셔서 은혜를 입혀 주셨습니다. 그리고 방주를 짓게 하여 하나님의 심판날에 그와 그 가족을 구원하셨습니다. 

또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던 아브람을 찾아오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축복의 땅, 언약의 땅으로 불러내어 믿음의 조상, 축복의 조상, 선민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인간을 찾아오신 하나님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 책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을 찾아오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곧 계시 종교입니다.
인간을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남, 북으로 갈리어 남쪽의 유다는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를 거쳐 히스기야(B,C 715-686년)가 왕이 되고, 이사야와 미가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에 북쪽 이스라엘에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찾아 오셨습니다. 

당시 북쪽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B,C 793-753년)의 통치하에서 전무후무한 번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패와 타락은 극에 달했습니다. 곧 물질적 풍요와 영적 빈곤의 시대 였습니다. 
결국 「여로보암 2세」 말기에 와서 국권은 급전직하의 사양길로 접어들어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며 멸망길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여로보암 2세의 아들 「스가랴」가 왕권을 이어 받았으나 6개월만에「살룸」의 반역으로 여로보암 가(家)는 종말을 고했습니다(B.C 752).

「살룸왕」은 왕위에 오른지 1개월만에「므나헴」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왕하 15:14).
살룸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므나헴은 「앗수르의 불」의 침략을 받아 많은 조공을 바침으로 그 명맥을 유지했으나(왕하 15:19). 그 후 그의 왕위를 이어 받은 아들 「브가히야」는 궁중 반란으로 「베가」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베가」는 반 앗수르 정책으로 국권을 회복하려고 했으나「호세아」의 반란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호세아」는 앗수르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후 앗수르를 배반하고 친 애굽정책을 펴다가 결국 북쪽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B.C 722년에 멸망했습니다. 
이렇게 급변하는 시대적 상황에 부름을 받아 사명을 감당했던 선지자가『호세아』입니다.

호세아서 1장 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통 선지자들을 세울 때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세울 때는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라고 하셨습니다(사 6:9-10). 

아모스 선지자에게는 『너는 가서 내 백성에게 예언하라』(암 7:15)고 하셨고, 예레미야 선지자에게도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주었노라』(렘 1:9)고 하시며 격려함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호세아 선지자에게는『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직업적으로 음란한 여인에게 장가를 가게 하셨고, 음란한 행동의 결과로 얻는 자식을 보라고 하셨을까요? 

『호세아』란 『여호수아』란 말입니다. 그 뜻은『구원』입니다. 이름의 뜻이 구원하면 생각나는 분이 있지요 누구입니까? 예 바로『예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호세아서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구속사적인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모스 선지자와 같은, 호세아 선지자 보다 앞선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을 하셨으나 듣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마치 아무리 말과 글로 설명을 해도 이해를 하지 못할 때는 그림을 그려서 이해를 하게 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호세아 선지자는 말이 아니라 비극적 삶을 통하여 그들의 죄악상과 죄의 결과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의 모든 삶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셨듯이 말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고멜이라는 음란한 거리의 여인에게 장가를 갔습니다. 그런데 이미 고멜은 배 안에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아이는 호세아의 아이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르엘』이란 『이스라엘』이란 말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그 뜻은 전혀 다릅니다. 그들의 나라 이름이『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축복의 이름입니다.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여 승리한 후 하나님께서 축복과 언약의 증표로 주신 영광의 이름입니다. 그러나 『이스르엘』은 저주받은 땅의 이름입니다. 멸망을 상징하는 저주의 이름입니다. 

구약 성경 열왕기상 21장과 열왕기하 9장에 보면 아합의 왕궁 가까운 곳에 나봇이라는 사람의 포도원이 있었습니다 왕이 나봇의 포도원이 심히 아름다운 것을 보고 탐심을 갖고 그 포도원을 자기에게 팔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봇은 그 포도원을 팔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포도원은 조상 때부터 믈려 받은 기업이므로 절대로 팔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탐심에 붙들린 아합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지 못해서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때 왕후 이세벨이 왕에게 『왕은 마음에 무엇을 근심합니까? 일국의 왕이 나봇의 포도원 하나를 빼앗지 못하여 식사를 하지 않습니까? 내가 빼앗아 드리리다』고 했습니다. 

왕후 이세벨은 즉시 거짓증인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나봇이 하나님을 저주하고 왕을 저주했다는 거짓증거를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저주하거나 왕을 저주한 사람은 증인 두 사람만 있으면 돌로 쳐서 죽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봇은 이세벨이 꾸민 음모에 따라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나봇은 이스르엘 땅에서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나봇의 포도원은 아합에게 돌아갔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서 『아합에게 말하라 네가 죽이고 또 빼앗느냐 나봇이 피 흘려 죽은 이스르엘 땅, 거기서 네가 죽고 개들이 네 피를 핥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후 「예후」라는 왕이 일어나서 아합의 모든 식구를 죽입니다. 아합의 전 가정이 이스르엘 땅 나봇이 죽은 곳에서 피를 흘려 죽었습니다. 그 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르엘만 지나면 얼굴을 돌렸습니다. 그 피흘린 저주의 땅을 보기 싫어했던 것입니다. 나봇이 이스르엘에서 아합에게 죽고, 아합과 이세벨도 이스르엘에서 죽고, 그 왕가는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호세아의 첫 번째 아들의 이름을 불명예스럽게도 『이스르엘이라 하라 그리고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에게 갚고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후의 집이 어떻게 멸망할 것인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후는 아합의 집을 멸한 후 그들이 섬기던 바알신당을 진멸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칭찬했습니다. 『내 마음에 있는 대로 아합 집에 다 행하였은즉 네 자손이 이스라엘 왕위를 이어 4대를 지내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기지 않고 여로보암의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4대만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영광의 이스라엘이 이스르엘 땅같이 저주로 망하겠다는 것입니다. 
『너희 이름이 이스라엘이냐? 틀렸다. 너희는 복받을 사람이 못된다. 이스르엘이다.』 이것은 저주의 상징입니다. 그 이유는 2절 하반절의 말씀같이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1장 6절을 읽어봅시다. 
『고멜이 또 잉태하여 딸을 나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루하마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사하지 않을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고멜이 두번째 잉태하여 딸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그도 호세아의 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이름을 『로루하마』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부정 접두사로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루하마』는 『긍휼히 여긴다, 사랑한다, 동정한다, 애정을 쏟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로루하마』는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동정하지 않는다. 애정이 없다』는 뜻입니다. 나는 너를 긍휼히 여길 수도, 사랑할 수도, 동정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매시간 하나님의 긍휼 속에서 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면 우리는 한 시간도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제목 중의 하나는『하나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입니다. 그것은 한 시도 하나님의 긍휼이 없으면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제는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만이 남았습니다. 

1장 8-9절을 읽겠습니다. 
『고멜이 로루하마를 젖뗀 후에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고멜이 다시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도 호세아와 상관이 없는 음란한 아들입니다. 
그 이름을『로암미』라고 했습니다. 『암미』란『내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로암미』는『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본래는『암미』라는 칭호를 들었던 백성입니다. 

이 언약은 출애굽 할 때 부터 있었고(출 4:6, 레 26:12, 27:9) 대대로 확인되었던 칭호였습니다(시 29:11, 33:12).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신고로 그 크신 이름을 위하여 영원히 버리지 아니하실 그런 선민이었습니다(삼상 12:22). 

이러한 백성이『로암미』(내 백성이 아니라)라는 불호령을 듣게 되었으니 참으로 비극 중의 비극입니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이라』,『나는 네 편이 되지 아니하리라』는 뜻입니다. 『이제는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선언입니다.
 
호세아의 자녀들 이름은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징계의 단계적인 깊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스르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 말이요, 『로루하마』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거두실 것을 밝히신 것이며, 『로암미』는 두 자녀의 이름보다 더 강한 징계를 표시하는 말씀입니다. 

원문의 뜻은『나는 너를 위해 있지 않다』,『나는 너희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구주요, 피난처시요, 반석이요, 이스라엘의 소망이요, 아버지셨던 하나님이 이제 그들에게 있어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신 것은 심판중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편이 되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두려움 가운데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죄를 품고 있는 한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와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죄를 멀리 해야 합니다. 『로암미』의 호칭을 들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죄를 미워하고 버리므로 『암미』로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면 마귀의 자식입니다. 마귀의 자식은 멸망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범죄한 이스라엘, 범죄한 우리는 영영히 하나님의 긍휼을 입지 못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하고 이스라엘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이스르엘, 로루하마, 로암미로 끝나고 맙니까? 하나님은 그러실 수가 없습니다, 범죄한 인간을 찾아오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우상을 섬기고 죄를 범했다고 아주 멀리하여 저주하고, 긍휼을 거두어 가시며, 이방인처럼 버리실 수 없는 하나님입니다. 찾아오심이 은혜요, 찾아오심이 긍휼입니다. 찾아오심이 축복이요,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알아야 합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아야 합니다.

1장 6절에서 『그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고 하고, 7절에서 『그러나』 합니다. 이 말은 앞의 말을 번복하는 것입니다. 재판관이 선고합니다. 『너는 죄인이다. 너는 죽어 마땅하다. 네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뒤에는 살 길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상을 참작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저희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다.』 는 것입니다. 

10절에도『그러나』가 있습니다. 1절에서 9절까지가 한 문맥입니다.  10절의『그러나』는 앞의 말 전체를 다 받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번성하고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두목을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한 두목』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흩으시기만 하는 분이 아니시고 모으시고 싸매시는 분이십니다(1:11). 

호세아서가 심판으로만 끝났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2장 1절의 말씀을 보니 회복과 소망의 말씀이 나타납니다.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고 했습니다. 

1장에서는 로암미, 로루하마 즉 내 백성이 아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고 했는데 이제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 내 백성이라고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하나님의 아픔의 신학』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 값으로는 마땅히 이스르엘이 되고 로암미, 로루하마입니다. 

『이스르엘』은『흩으신다』는 뜻도 있지만『모은다, 꽃을 심는다, 씨를 뿌린다.』는 뜻도 있습니다(2:23). 10-11절에는 다시 모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전에는 내 백성이 아니었는데 다시 모아 내 자녀 삼고 내 백성 삼고 『암미』라 하겠다는 말씀이니 불성실한 이스라엘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입니다. 『로루하마』하나님 스스로가 대적이 되셨던 자리에서 이제는 하나님 스스로가 모든 저주를 완전히 물리쳐 주신다는 뜻이니 축복의 극치입니다(2:13-14). 

『이스르엘』(흩으신다)에서『이스라엘』(하나님이 참으신다)로, 『로암미』로 저주했던 하나님께서 이제는『암미』(내 백성)로, 『루하마』(사랑한다)로 다시 회복해 주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1:10-2:1). 이스라엘은 찾아오신 하나님과 완전한 화해를 이루고 옛 언약의 완전한 회복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을 힘써 알아야 합니다.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모래와 같이 번성하리라』(창 15:15, 22:17, 26:4, 28:14)고 하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이스라엘 자녀들에게 주셨던 그 언약이 회복된 것입니다. 

옳습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의 두목을 세우신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고멜과 같은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죄인 되었을 때, 원수되었을 때, 화목하지 못할 때 찾아 오셔서 은혜와 진리로 충만케 하신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믿는 자에게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고,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을 힘써 알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을 알 때 가슴에 감격이 있고, 기쁨이 있고 희열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를 알아야 합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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