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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험을 능히 감당하는 성도가 되라 (고전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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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을 능히 감당하는 성도가 되라 (고전 10:13)


학생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부터 대학교를 졸업하기까지 수많은 시험을 치릅니다. 시험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언제쯤이면 시험이 없는 세상에서 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대학생들은 말하기를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시험이 없을 줄 알았는데…”라고 합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이 된 후에도 회사 내에서 여러 가지 시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학생이든 사회인이든 “시험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요”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세상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험이 즐거운 것은 아니지만 고통만 가져다주는 것도 아닙니다. 시험을 잘 통과하면 그만큼 실력을 인정받고 거기에 합당한 자격을 얻게 됩니다.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서 뿐 아니라, 각 분야에서 인정하는 자격증을 얻기 위해서도 필요한 시험을 통과해야 헙니다. 그리고 시험을 통과했을 때 성취감과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한편, 우리가 한 세상 사노라면 학교나 회사에서 치르는 시험이나, 자격증을 따기 위해 치르는 시험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시험들을 만납니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인생 시험”이라고나 할까요?  이 시험은 우리가 시험 날짜를 선택할 수도 없고, 원한다고 해서 피할 수도 없습니다. 태풍 하나가 지나가면 또 다른 태풍이 다가오듯이, 인생 시험도 하나가 지나면 또 다른 시험이 다가옵니다. 이 지구상에서 시험이 없는 곳은 공동묘지 밖에 없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누구나 계속해서 시험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이 시험을 통해서 실력을 인정받아 진급도 하고 상급학교에 진학하듯이,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시험도 잘 대처하기만 하면 인생의 계단을 하나씩 올라서게 됩니다. 시험을 잘 통과하면 우리의 인격이 성숙해 집니다. 그리하여 자기만 알던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사정도 이해할 줄 아는 사람으로 바뀌고, 교만한 사람이 겸손하게 변합니다. 성급한 사람이 신중한 사람이 되고, 모난 사람이 원만한 성격으로 바뀝니다. 

오늘은 성도들이 만나는 시험의 종류와 각각의 시험에 대처하는 신앙적인 방법에 대하여 말씀해 드리려 합니다. 

첫째로, 우리 자신의 욕심 때문에 받는 시험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에 이르기를 “13)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받는 시험 가운데 우리의 욕심 때문에 당하는 시험이 가장 많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것은 ‘하나님처럼 되려는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피조물이 감히 창조주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허황된 욕심을 품은 것이 타락의 원인이었습니다. 이처럼 욕심은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만들고 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범죄로 인해  아담과 하와는 에덴에서 쫓겨났으며, 수고로운 삶을 살다가 결국은 죽어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이 동일한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방 선지 발람은 모압 왕 발락이 제시한 높은 지위와 은금보화에 마음이 동해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범죄케 하는 꾀를 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많은 사람이 모압인들의 술수에 넘어가서 저들의 우상 앞에 절하고 우상의 음식을 먹고 모압 여자들과 행음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진노하셔서 염병으로 이만 사천 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이방 선지 발람은 그 얼마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자손을 칠 때에 칼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발람은 욕심으로 인한 시험에 져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이스라엘 자손이 여리고 성을 함락시킬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리고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멸하고, 아무 물건이든 갖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여리고 성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하나님의 심판으로 진멸 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간은 성안에 들어갔다가 은금과 좋은 의복을 보고는 그만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는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나가는 금덩이 하나와 시날산(産)의 아름다운 외투 한벌을 가져다가 자기 장막 가운데 땅을 파고 숨겨두었습니다. 이 일로 하나님께서 노하시니, 이스라엘 자손이 아이 성을 치러 갔다가 패하여 서른여섯 명이 죽고 도망쳐 왔습니다. 아간 한 사람이 범죄한 결과, 이스라엘 자손 전부가 패배의 쓴맛을 보게 되었고, 결국 아간은 범죄가 발각되어 처형당했습니다. 

다윗 왕과 같이 신실한 사람도 욕심 때문에 범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나라가 부강하고 아무 걱정이 없던 때였습니다. 하루는 오후에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 왕궁 옥상을 거닐다가 한 여인이 목욕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시켜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보게 했더니 요압 장군을 따라서 전장에 나간 장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라고 했습니다. 이에 다윗은 밧세바를 데려오게 해서 동침했습니다. 얼마 후에, 밧세바는 자기가 잉태한 사실을 다윗에게 기별했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자기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 전령을  보내 전장에 나가 있는 우리아를 호출했습니다. 다윗은 우리아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그 날 저녁에 집에 가서 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아는 자기의 상관인 요압과 동료들이 다 전장에 나가 있는데 혼자서만 집에 가서 쉴 수 없다고 하면서 왕궁 문지기의 숙소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 이튿날도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집에 가서 쉬라고 했으나 우리아는 어제와 같은 이유를 대면서 왕궁 문지기 숙소에서 잤습니다. 

이에 다윗은 요압 장군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편에 보냈습니다. 그 편지에는 “우리아를 최일선에 내세워 적군의 손에 죽게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아가 일선에서 죽었다는 보고를 받자, 밧세바를 데려다가 후처로 삼았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악행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줄로 생각했으나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행위를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이 범죄로 인해 다윗은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맏아들 암논이 이복누이 다말을 욕보였는가 하면, 다말의 오라비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는 불상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몇 년 후에는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다윗은 맨발로 눈물을 흘리면서 피난을 가야 했습니다. 

방금 예로 든 것처럼, 우리 인간은 욕심 때문에 시험에 들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는 성경 말씀을 명심하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물욕, 명예욕, 육신의 정욕 등 모든 종류의 욕심을 물리쳐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마귀가 가져다주는 시험이 있습니다.

마귀 또는 사탄은 ‘대적자’를 의미합니다. 그 이름과 같이,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직접 하나님을 대적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을 시험하여 넘어뜨림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방법으로 대적합니다. 이를 위해서 마귀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사단은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기도 합니다(고후 11:14). 그러나 아무리 광명의 천사처럼 가장할지라도 그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경고하기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벧전 5:8)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성도들을 무한정 시험할 수는 없으며,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범위 안에서만 시험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단의 한계입니다. 그렇지만 사단은 누구를 봐 주는 법이 절대로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단이 오는 목적에 관해서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요 10:10) 라고 하셨습니다. 사단의 목적은 오직 한 가지, 우리의 삶과 영혼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입니다. 

욥기를 읽어 보면, 사단이 욥을 시험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욥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만큼 의롭고 선하고 하나님을 잘 경외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사단의 역사로 인해 말할 수 없이 큰 시험을 당했습니다. 하루아침에 그 많은 재산을 다 잃었습니다. 열 자녀가 맏형의 집에 모여 잔치하다가 태풍에 집이 무너져서 몰사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 같은 무서운 시험을 당했을 때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며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금 욥을 시험했는데, 이번에는 욥의 온 몸에 악창이 나게 했습니다. 정수리부터 발바닥까지 악성 종양이 생겨나서 온 몸이 코끼리 가죽처럼 부풀러 올랐다가 터져서 진물이 났습니다. 어찌나 가렵던지 기와조각으로 몸을 긁었습니다. 몸이 야위어 뼈와 가죽만 남았고, 피부가 까맣게 변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낙심하여 말하기를 “그래도 당신의 순전함을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입술로 범죄치 아니했습니다(욥 2:10). 

어떻게 욥이 이처럼 마귀의 시험을 능히 이겨낼 수 있었을까요?  욥기 23장 10절에 그 비결이 나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고 했습니다. 욥은 그가 당하는 시험이 하나님께서 그의 신앙을 정금같이 만드시려고 가하시는 연단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 대한 욥의 믿음이 어떠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가혹한 시련을 당하면서도 그것이 그를 망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정금 같게 만들기 위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욥을 통해서 우리는 시험을 이기는 비결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끝까지 인내하는 것입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약 1:12) 

사단은 우리 주 예수님도 시험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광야에 가셔서 40일 동안 밤낮으로 금식하시며 기도하셨습니다. 40일을 금식하고 심히 주리셨을 때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그 정도로 주리고 나면 광야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누런 돌멩이들이 빵처럼 보일 법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한번 패한 마귀가 이번에는 예수님을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말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르시기를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는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러자 마귀가 예수님을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주면서 말했습니다.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귀가 완전히 패하여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마귀의 시험을 이기는 비결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에 보니,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11)고 하였고, 또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17)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입니다. 우리도 주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마귀를 대적한다면 얼마든지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3절에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시험을 받지 않으실 뿐 아니라 악한 의도로 우리를 시험하지도 아니하십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선하신 뜻으로 성도들을 시험하실 때가 있으십니다. 

창세기 22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셨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하시기를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욥이 당한 시험도 크고 어려운 것이지만, 아브라함이 당한 시험은 더 크고 어렵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로서 제 아들을 죽여 번제로 바쳐야 하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삭이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이 백 살에 낳은 독자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아직 이삭이 장가도 들지 않은 때에 그를 번제로 바치면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소나 양이 아닌 인신(人身) 제물을 요구하시다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하나님의 명령은 불합리하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길을 떠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시하신 모리아 산까지 삼일 길을 걸어갔습니다. 산 아래 이르자, 두 사환을 거기 머물게 하고, 자기는 이삭과 함께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으로 갔습니다. 그곳에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나무를 벌려놓고 이삭을 결박하여 나무 위에 올려놓고는 칼을 빼어 들고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 절박한 순간에,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러자 여호와의 사자가 말씀하기를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보니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었습니다. 

이에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습니다. 그 때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말씀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주신 시험을 통과함으로 복의 근원이 되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과 하나님, 둘 중에 누구를 더 위하는지 알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성격으로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보다 더 위하고 사랑하는 것이 없는지를 시험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37)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8)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곧 우상입니다. 혹 하나님 보다 자식을 더 사랑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보다 돈을 더 사랑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보다 세상 즐거움을 더 사랑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시험에 질 수밖에 없습니다.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을 때, 하나님의 미쁘심을 믿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분이시므로 그 하신 약속을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약속을 하고서도 불리하면 어기기를 다반사로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한번 하신 약속을 반드시 이행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도 있는 것 같이 불러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삭을 번제로 바쳐 재가 되었더라도 재 가운데서 다시 살려내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시험을 이기려면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미쁘심과 전능하심을 의심치 말고 믿어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시험을 만나 한 동안 믿음으로 행합니다. 그러나 상황이 나아지지 않고 점점 더 불리해 지면 당황해서 믿음의 방법을 버리고 세상적인 방법의 찾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가하시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면 시험이 다가올 때 끝까지 믿음으로 이겨내야 합니다. 일이 점점 더 어려워져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끝까지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인정해 주시고 아브라함의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우리는 한 세상 살아가는 동안 여러 종류의 시험을 당합니다. 우리 자신의 욕심 때문에 당하는 시험도 있고, 마귀가 가져다주는 시험도 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도 있습니다. 시험의 종류에 따라서 대처하는 방법이 차이가 있습니다. 욕심 때문에 당하는 시험이거든 먼저 탐욕을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때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귀가 가져다주는 시험이거든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하여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험을 이길 수 있도록 성령의 능력을 더해 주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나아갈 때 마귀의 꾐에 넘어가지 않고 바른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이거든 아브라함처럼 전적으로 순종함으로써 통과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종류의 시험이든지 인내가 필요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욥의 인내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내를 본받으라고 말씀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시험 당할 때 외면하지 않으시고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르기를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시험이 다가올 때 지레 겁을 먹으면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지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감당할 시험 밖에는 우리에게 허락하지 아니하시며, 또한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셔서 우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끝까지 용기를 잃지 말고 시험을 이겨내야 합니다. 시험을 끝까지 이겨냈을 때 받게 되는 축복에 대하여 히브리서 12장 11절에 이르기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시험이 다가오든 시험은 무조건 이겨야 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교만한 마음과 욕심을 회개하고, 깨어 기도에 힘쓰며,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인내로써 시험을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시험을 감당하고도 남음이 있도록 성령의 능력을 부어 주시고, 위대한 영적 승리를 거두게 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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