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믿지 않음을 인하여 (마 13:51-58)

첨부 1


믿지 않음을 인하여 (마 13:51-58)
 
 
51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53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그 곳을 떠나서 
54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56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 
57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58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그 동안 잠시 중단했던 마태복음 강해 설교를 계속하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13장에는 1)씨 뿌리는 비유 2)알곡과 가라지 비유 3)겨자씨 비유 4)누룩 비유 5)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 6)값진 진주 비유 7)그물 비유 등 일곱 가지 비유가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곱 가지 비유를 말씀하시고 나서, 제자들에게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주님의 말씀에서, 말씀을 읽고 듣는 모든 자들이 그 뜻을 분명히 이해하는 것을 주님께서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에, 자신이 그 뜻을 참으로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지 않고서는 이해하기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성경을 읽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성령께서 잘 깨닫게 해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고 물으실 때, 제자들은 “그러하오이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귀중한 교훈을 얻습니다. 즉 주님의 교훈을 잘 받은 성도만이 천국의 비밀, 즉 하나님의 구원 진리를 깨닫는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천국 비유를 선포하실 때에, 큰 무리들이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비유로 교훈하신 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고,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저희’는 어떤 자들을 말합니까? 그들은 그저 표적만 바라고 따르며, 육신의 것들을 얻기 위해 따르던 무리들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비유를 통해 교훈하실 때에, 주님께 묻지도 않았고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고 하며 주님 곁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것들만 얻고자 주님을 따랐던 자들이요, 주님께 가르침 받으려는 마음은 없던 자들이 곧 주님이 말씀하신 ‘저희’들입니다. 그들이야말로 세상 마지막 날에 천사들이 구분해 낼 ‘잡고기’들이나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비유를 깨달았다고 대답했을 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서기관마다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리켜 그 당시 성경을 잘 알고 해석하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과 대조시켜 ‘천국의 서기관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의 제자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배웠으나 천국의 비밀은 깨닫지 못했고,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율법으로는 그들에게 미치지는 못하지만 천국의 진리는 확실하게 깨우쳤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깨달은 제자들은 이제 천국의 서기관이 되어 구약성경이 제시한 메시아를 올바르게 인식하게 되었으며, 또한 메시아를 통한 하나님나라의 축복을 바르게 전하고 가르칠 수 있는 천국의 서기관들이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천국 비유의 결론으로 주신 말씀은, 천국 복음의 비밀을 깨달은 자는 그것을 혼자만 간직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힘써 전함으로 그들도 복음 진리를 깨닫고 구원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국의 진리를 이해한 자는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이다.”는 말씀은 우리들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그래서 서기관처럼 진리를 깨닫지 못한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할 책임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의무적으로 복음을 전해야만 합니다. 전도는 의무인 동시에, 천국의 진리를 먼저 깨우친 자로서의 특권이며 사명인 것입니다. 

살아 있는 순교자로 불리는 리차드 범부란트 목사님은, 한 때 공산국가 루마니아에 침투하여 비밀리에 복음을 증거 하다, 붙잡혀서 모진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해 수차례 기절을 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문 속에서도 그는 고문하는 공산당에게 설교하고 전도만을 했으며, 더욱 더 심한 고문이 가해지면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나서는 “조금 전에 내가 어디까지 말했지요?” 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옛 것과 새 것’을 그 곳간에서 가져오는 좋은 집주인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옛 것과 새 것’이란 곧 구약과 신약을 의미합니다. 모세의 제자들인 서기관들은 구약에만 너무나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약을 발견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구약을 무시해 버린 신약도 진정한 신앙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옛 것인 구약 성경에 기록된 진리를 채우고,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계시된 새로운 신약성경의 진리를 심령에 저장하고 때를 따라 꺼내 주는 진리의 집주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옛 것과 새 것을 서로 조화할 줄 알아야 합니다. 

천국의 서기관은 옛 것에만 고집하는 완고하고 융통성이 없는 자도 아니고, 새 것에만 심취하고 집착하는 떠돌이와 같은 자들도 아닙니다. 즉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기 위해서는, 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진리와, 오래 전부터 있었던 옛 진리를 다 수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옛 것과 새 것 곡 구약과 신약은 둘 다 좋은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조화요 일치입니다. 거기에 구원의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오직 옛부터 전해 오는 율법과 전통만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근본 의미를 바르게 해석해 주시면서, 새로운 신약 복음을 전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 진리를 믿지 않고 오히려 대적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유대인을 가리켜 모세의 수건으로 눈을 가린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구약 시대 율법만 신앙의 표준으로 삼고, 그리스도를 배척한 어리석음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의 참뜻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말씀을 믿어야 온전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성경’ 즉 구약 성경이 다 자신께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증거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주님께 오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옛날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그와 같은 고루한 의식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복음 진리보다, 구약의 율법을 더 강조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결국 구원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 유대인들처럼 버림받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자꾸 새 것만 찾는 이들도 있습니다. 

세상의 시대 풍조와 사상을 따라 신앙 가치관도 변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정통 교회의 가르침에 실증내고 이단들이 만들어 낸 소위 그릇된 ‘새로운 진리’만을 탐닉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자들을 가리켜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라고 단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새 것’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구약 시대의 ‘옛 것’도 잘 수용하여, 신구약 하나님의 말씀을 조화롭게 믿는 온전한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 13장에 나오는 모든 비유를 마치시고, 고향인 나사렛으로 가셨다고 했습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사람 뿐 아니라, 동물들에게도 있는 원초적인 본능입니다. 고향은 때때로 어머니의 품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그만큼 아늑하고 그리운 곳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고향을 잃은 사람이며, 돌아갈 고향이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는 분명히 돌아갈 고향이 있습니다. 그곳은 이 세상에서 도저히 맛볼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이 충만한, 한숨과 눈물과 슬픔이 없는 곳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이러한 고향을 사모하며 기리는 성도의 믿음만큼 아름다운 마음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향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고향 사람들은 매우 놀랐습니다. 지금까지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지혜와 능력이 그 말씀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을 의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사람의 이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고 의아해 하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이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메시아 되심에 대해서 전혀 고려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전부터 알고 지내던 ‘목수의 아들’로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주님의 교훈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렸겠습니까? 그들에게는 주님의 말씀이 ‘사람의 지혜’ 정도로만 들렸습니다. 이처럼 주님을 어떤 분으로 믿느냐에 따라 말씀의 의미도 달라집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 사람입니다. 완전한 인성을 지니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주님을 본다면, 주님과 그 교훈을 올바로 믿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인간의 육신을 지닌 온전한 인간이셨지만, 또 한편으로는 완전한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이시기도 하셨습니다. 주님은 성령을 통해 동정녀에게서 나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비로소 우리의 믿음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하나님으로 알 때, 주님의 교훈을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고, 또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속죄와 부활과 승천도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주변에는 예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그저 ‘탁월한 종교가’로만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권위를 도무지 인정하지 않는 학자와 이단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믿는 그리스도는 사회 혁명가, 종교 혁명가 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대속의 진리, 부활과 승천과 재림의 진리도, 그 제자들이 꾸며 낸 신화라고 가르칩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나사렛 주민의 신앙 찌꺼기’가 떠다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경계해야 합니다. 그 불순한 인본주의 신앙 찌꺼기에 우리 신앙이 오염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시적으로 인간으로 오신 영원하신 하나님이라는 진리를 굳게 믿고, 따라서 주님의 교훈도 절대적인 하나님의 진리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가리켜 ‘이 사람’이라고 했던 나사렛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대단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그 아버지가 목수였으며, 그 어머니와 동생들도 있는데, 예수가 어떻게 하늘에서 오신 메시아일 수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과 거할 때 하시던 일만 기억했습니다. 

그래서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목수는 마을의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던 사람입니다. 당시에는 집을 비롯해 모든 가구가 철보다 나무로 만들어졌기에, 집 대문이나 가구와 또는 농기구 같은 것을 수선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니 목수란 온 동네의 ‘하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해서도 그러한 인식을 결코 떨쳐 버릴 수가 없었으며, 그래서 주님도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선입견이나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일지라도 성공하고 출세하기 전 ‘올챙이 시절’을 다 겪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사람의 성공하기까지의 노력과 변화를 인정하기에 인색 합니다. 그 마음속에 상대에 대한 시기심과 질투심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성장과 변화된 신분을 애써 외면합니다. 그래서 나사렛 사람들도 “예수는 예전에 우리 마구간을 고쳐 주던 사람이야!”라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외면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잘못된 선입관을 버려야 합니다. 만물도 변하듯 사람도 변화하고 성장하는 법입니다. 예전에 기독교에 대해 비판하던 사람이 탁월한 목회자로 변화할 수 있고, 무식했던 사람이 노력하여 대학 교수도 될 수 있습니다. 가난에 찌들었던 사람이 큰 사업가로 변신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한 선입견을 버릴 때, 그를 바로 볼 수 있고, 또 바른 인간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나같이 어리석고 무지한 죄인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무런 선입견 없이 부르사 충성스러운 성도로 변화시켜 주신 은혜를 기억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도 얼마든지 나처럼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줄 알아야, 겸손한 성도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선입견을 버리고 넓은 마음과 안목을 지닌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향인 나사렛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신 예수님께서는 “선지자가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자기들과 함께 지냈던 때의 육신적인 배경과 신분만 기억하면서, 이미 공생애 사역을 통해 드러난 예수님의 메시아 직분과 권능, 그리고 신성을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앙으로 인하여 그 곳에서는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능력 행하심과, 그를 따르는 자들의 믿음 사이에는 커다란 상관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신 것은, 주님의 능력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주님의 능력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가는 본절과 병행이 되는 구절에서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님의 능력이 그의 고향에서 제한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지 않는 그의 고향에서는 능력 행할 마음이 예수님께 전혀 없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왜 주님의 능력을 많이 경험하지 못합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신앙은 손해만 가져옵니다.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주님이 능력을 행하지 않으신 데에는 반드시 그 이유가 있습니다. 죄 사함과 병 고침과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능력은, 믿는 자에게만 따르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에겐 아무런 은혜도 능력도 따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능력은 갈망하는 자에게만 나타납니다. 주님의 능력은 갈망하는 자에게만 따릅니다. 나병환자의 간구에 응답하신 것처럼, 백부장의 간구로 그 하인이 나은 것처럼, 예수님은 주님의 능력을 믿고 따르는 자에게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만일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주님은 고향인 나사렛에서 많은 능력을 행하셨을 것입니다. 소경이 눈을 뜨며,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벙어리의 혀가 풀리고, 중풍병자가 걸으며, 아무리 뿌리 깊은 암 환자도 깨끗이 고침을 받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무한한 능력의 소유자이시지만, 우리의 믿음을 따라 역사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주님은 오늘도 우리들에게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은, 많은 경우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물을 길을 수 있는 그릇이 꼭 닫혀 있다면, 아무리 많은 양의 물을 그 위에 붓는다 하더라도, 그 그릇은 물로 채워질 수 없을 것입니다. 아니 그릇을 바다 속으로 던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텅 비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곧 불신앙이라고 하는 마개가 마음의 문을 닫아 놓고 있으면, 아무리 많은 생명수를 퍼붓는다 하더라도, 그 마음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강력한 역사도 그러한 마음에는 무위로 끝납니다. 그래서 이러한 불신앙의 죄는 죄인의 마음을 닫아 놓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손도 묶어 놓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들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확신했던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담대하게 고백하였습니다. 

존 헌터라는 분이 저술한 ‘하나님을 제한하지 말라’는 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좁쌀만한 지식, 경험, 이성,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울어도 못하고, 힘써도 못하고, 참아도 못하고, 말과 뜻과 행실이 착해도 못하지만 믿으면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불신앙으로 하나님을 제한했기 때문에, 열 하룻길이면 건너갈 수 있는 광야를 40년 동안이나 헤매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내가 인생의 광야에서 헤매고 있다면, 혹 하나님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자신의 믿음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라건대 금년에는 주님께 대한 큰 믿음으로, 절대적인 믿음으로, 사랑하는 성도들마다 기도 응답을 받고, 문제 해결을 받게 되는 복을 다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