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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 쉼을 얻는 신앙생활 (마 11:2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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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쉼을 얻는 신앙생활 (마 11:25-30)


인생은 만남의 연속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과 내용, 삶의 질이 달라집니다. 어떤 부모, 어떤 친구, 어떤 스승, 어떤 동료, 어떤 책, 어떤 직업, 어떤 지도자, 어떤 종교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은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행복해 질 수도, 불행해 질 수도 있습니다. 보다 좋은 인생살이를 할 수도 있고 힘겨운 인생살이도 할 수 있습니다.

실제 하버드대학 교수인 니컬러스 크리스태키스가 만남이 얼마나 영향력을 끼치는가 과학적으로 연구를 했습니다. 이분은 2009년 <타임>의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선정된 의사이며 사회학자입니다. 지난 10년 동안 의사로서 말기 환자들과 그 가족들을 돌보면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배우자에게 얼마나 큰 타격을 주는지 보아왔습니다. 아내가 병에 걸리거나 죽으면, 남편도 곧 죽음을 맞이할 위험이 상당히 높아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러한 양자 관계들은 아주 멀리까지 거대한 연결망을 만들어낸다는 사실도 알아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임스 파울러와 함께 본격적으로 이 분야를 연구를 했습니다. 그들은 1971년부터 2003년까지 총 1만 2067명을 연구 추적해 행복의 생성과 확산을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3단계 영향 법칙'을 도출해냈습니다. 

'3단계 영향 법칙'이란 3단계 거리 안에 있는 사람들, 즉 친구(1단계), 친구의 친구(2단계), 친구의 친구의 친구(3단계)에게서 우리는 직접적 영향을 받으며 우리 또한 3단계 거리 내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는 이론입니다. 서로의 영향력을 수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직접 연결된 사람(친구)이 행복할 경우 당사자가 행복할 확률은 약 15% 높아지고, 2단계 거리에 있는 사람(친구의 친구)에 대한 행복 확산 효과는 10%이며, 3단계 거리에 있는 사람(친구의 친구의 친구)에 대한 행복 확산 효과는 약 6%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4단계에서는 그 효과가 거의 사라진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3단계 인간관계 법칙이 나옵니다. 행복한 친구가 한 명 추가될 때마다 그 사람이 행복해질 확률은 약 9%씩 증가하고, 불행한 친구가 한 명 추가될 때마다 행복해질 확률은 약 7%씩 감소한다고 합니다. 행복은 단순한 개인적 경험이나 선택의 산물이 아니라 집단의 성질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행복감을 느끼는 친구가 1.6km안에 살면 자신의 행복감이 25% 늘어나며, 행복감을 느끼는 이웃이 옆에 살면 34% 행복감이, 형제, 자매가 근처에 살면 14%의 행복감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행복도 전염된다는 것입니다. 행복뿐 아니라 삶과 죽음, 정의와 불의, 부자와 빈자, 비만과 질병도 전염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은 많은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사람들은 인생 살이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며 결정짓는 만남 셋이 있다고 합니다. 그 첫째는 부모와의 만남이고 둘째는 배우자와의 만남이고 셋째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라고 합니다.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 얼굴 모양과 신체 구조가 달라집니다. 양육 환경과 교육 배경이 달라집니다. 인생의 출발에 많은 영향력을 끼칩니다. 그러나 친구를 만나고 배우자를 만납니다. 어떤 배우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자녀의 키가 달라지고 눈 크기가 달라집니다. 후반기 인생이 달라집니다. 

대통령을 만나면 사람들이 영부인이라고 불러주고 사장을 만나면 사모님이라고 불러주고 슈퍼 주인을 만나면 아줌마라고 불러줍니다. 이 만남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영원한 인생이 달라집니다. 모든 만남의 영향력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나타냅니다. 부모를 잘 못 만나 불행할 지라도 하나님을 만나면 행복해 집니다. 배우자를 잘 못 만나 평안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을 만나면 참 평안과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만남은 어떤 만남보다 영향력을 끼칩니다. 예수님을 1단계 친구로 만나면 15%가 아니라 100%의 영향을 받아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평안해 질 수 있습니다. 염려와 근심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친구로서 같이 살기를 초청합니다.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구세주, 주님으로 받아들이면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사는 신비한 삶의 참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은 무거운 짐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오길 원합니다(28).

무거운 인생의 짐을 지고 근심과 걱정, 두려움으로 괴로워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우리 주님이 초청하는 사람들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입니다. 

1)우리 주님께서는 수고의 짐을 지고 참된 안식(쉼)을 누리지 못한 자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여기서 수고하다는 말(능동태)은 스스로 일을 만들어 고생하다는 말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 자신들도 지키지 못할 율법을 만들어 억지로 지킴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 날도 억지로 수고의 짐을 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나를 완벽하게 통제함으로 자기 구원을 이루고 행복과 만족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실력과 노력으로 행복해 질 수 있고 자기 힘으로 얼마든지 평안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법 없이도 자기의 양심으로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고 참 쉼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습니까? 내가 만든 내 규율을 얼마나 잘 지키고 사십니까? 자신을 얼마나 통제할 수 있습니까? 저는 가면 갈수록 저의 무능력을 깨닫습니다. 

2) 우리 주님은 무거운 짐을 진(페포르티스메노이) 자들을 초청하고 있습니다.(수동태)
타의(他意)로, 환경 때문에 짐을 졌다는 것입니다. 원치 않는 짐을 지고 고통받으며 괴로워하는 자들을 부르시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적 율법의 짐입니다. 오늘날도 유교라는 전통, 미신, 제도 등 갖가지 무거운 것들이 있습니다. 집을 이사하는데도 마음대로 못합니다. 물어보고 합니다. 직원 하나를 뽑는데도 사주를 봅니다. 

스스로 지고 있는 짐이 무엇입니까? 원치 않는 짐이 무엇입니까? 죽음의 짐입니까? 죄책감 짐입니까? 사업의 짐입니까? 책임감의 짐입니까? 질병의 짐입니까? 가난의 짐입니까? 미움과 시기의 짐입니까? 고독의 짐입니까? 과거의 짐입니까? 죄의 짐입니까? 자녀의 짐입니까? 아내의 짐입니까? 남편의 짐입니까? 시어머니의 짐입니까? 시아버지의 짐입니까? 며느리의 짐입니까? 시어머니의 짐입니까? 어떤 짐이 있다면 그 짐으로 주님을 멀리하지 마시고 그 짐 때문에 주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짐을 지고 있는 우리를 주님은 초청하고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 의원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하는 자에게 우리 주님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죄인들에게 우리 주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짐을 나를 불행하게 하고 나를 괴롭히고 나를 망하게 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며 괴로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어떤 짐일지라도 그 짐을 지고 가면 다 받아 주십니다. 

짐은 예수님께 나오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제가 아는 한 자매는 아버지의 짐을 지고 사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어릴 때 어머니가 새벽기도를 다녔는데 아버지가 자신을 성폭행한 것입니다.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아버지가 무엇을 하는지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자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일하러 중동에 갔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에 다시 돌아 왔습니다. 그 무거운 짐 때문에 괴로워하였습니다. 아버지를 피하기 위해 수녀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이런 짐도 주님께 내려놓으면 우리 주님께서는 참 안식, 참 자유를 주십니다. 

오래 전에 어느 집에 심방을 갔는데 안방을 열어 주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갓난 아이가 있는 것입니다. 딸이 시집을 갔는데 미숙아이며 장애아를 낳았습니다. 의사는 얼마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딸이 기를 수 없어 어머니에게 맡겼습니다. 그 무거운 짐을 지고 가정이 침울하게 살아갑니다. 그런 짐을 나 홀로만지지 마시고 그 짐 때문에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피겨 스케이팅으로 올림픽과 세계선수권을 제패한 스콧 해밀턴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분이 책을 썼습니다. “스콧 해밀턴의 행복을 위한 8가지 기본기”라는 책입니다.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생후 6개월 만에 친부모에게 버림받았습니다. 양부모에게 입양되었지만 두 살 때부터 괴질에 걸려 병원을 전전했습니다. 1997년 고환암 3기 진단을 받았습니다. 2004년 뇌종양과 뇌하수체암에 걸렸습니다. 2010년 또 뇌종양에 걸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미국 피겨 스케이팅 선수로 1984년 동계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남자 싱글 부문에서 금메달을 땄으며, 1981년부터 1984년까지 4회 연속 전미 선수권 대회와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습니다. 세 번이나 암을 이겨내고 현재 암 환자를 돕는 자선단체를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8가지 행복의 비결 중에 “전능한 코치를 믿으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그는 전능한 코치라고 말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성공의 비결은 내가 얼음판 위에서 항상 혼자가 아니었다는 데에 있다. 나의 신앙심은 혼자라면 절대 이룰 수 없었던 경지까지 나를 항상 끌어주었다.” 스케이터에게 코치란 신과 같다고 말합니다. 선수가 코치에게 신뢰감을 갖고 있지 못하면, 그 스포츠에서 그리 성공의 기쁨을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삶의 설계자로 삶에 관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삶의 굴곡, 성공과 실패, 사랑의 발견과 이별, 내가 경험했고 이겨냈던 삶을 건 질병과의 투쟁 등은 자신을 성장시키고 학습시키고 그 분의 계획에 따라 살도록 하는 하느님이 준비하신 기회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당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당신 삶의 방정식을 제거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집중하라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십시오. 수많은 무거운 짐진자들이 그 짐 때문에 주님을 만나 참 안식과 행복을 누리며 인생을 살았습니다. 중풍병으로 무거운 짐을 지고 인생을 사는 사람이 그 육체의 질병에서 해방되어 참 안식을 얻었습니다. 다섯 남자와 살았던 여인이 수치감과 죄의식으로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는데 예수님 만나 참 자유를 얻고 진정한 안식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38년 동안이나 베데스다 연못에게 경쟁의 낙오자가 되어 무거운 질병을 지고 사는 인생이 예수님 만나 진정한 안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도 우리 주님이 우리를 초청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멸시를 받는 자, 경멸당하는 자, 짐승만큼의 대우도 받지 못하는 자,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자를 부르고 계십니다. 병든 자도 다 오라고 부르십니다. 마음에 병든 자, 고통속에 사는 것이 숙명이라고 생각하고 걸어가는 자, 자기의 불성실로 인하여 고민하는 자, 학대받고 천대받는 자, 선을 주었으나 악으로 보상받는 자, 모략과 이기심과 시기심의 제물이 된 자, 비겁하고 비열한 자들로부터 버림받은 자, 수많은 군중들 속에서 외로움과 고독을 느끼는 자,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마음이 허전한 자, 없는 것 없이 차려놓고 살지만 웬지 모르게 텅빈 곳이 많은 자들을 향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짐이 없는 체 위선 떨지 말고, 나 스스로 다 해결할 수 있다고 만용 부리지 말고, 스스로 다 아는 체 교만 부리지 말고 어린 아이처럼 주님께 그 짐 지고 나아가면 됩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스스로 지혜 있고 슬기 있다는 주님께 나아가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가 나아갑니다. 그래서 참 안식을 누리는 구원의 길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계시됩니다. 아버지 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습니다. 오직 어린 아이에게만 계시해 주십니다. 아기들은 이가 어린 사람이 아니라 나이가 어떠하든 겸손하고 어린아기 같은 사람입니다. 진실하고 겸손한 추구자입니다. 이간 인식의 한계와 능력의 한계를 정식이 고백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오는 자들입니다. 


2. 예수님은 주님의 멍에를 함께 메기를 원합니다(29). 

우리가 예수님께 나와 예수님을 진정 주님으로 모시면 죄책과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자유를 얻습니다. 죽음과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를 얻습니다. 자신을 압박하는 양심의 속박과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얻습니다. 우리를 근심 걱정의 늪으로 몰아가는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를 얻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삶의 짐들이 하루아침에 다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나왔다고 만나기 싫은 아버지가 죽어 버립니까? 예수님께 나왔다고 죽기만 바라고 있는 갓난아이가 승천합니까? 예수님께 나왔다고 바로 빗이 해결되고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가 천국에 갑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참 자유함과 안식을 가졌다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무거운 짐으로 있는 상황 자체까지 변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순식간에 무거운 짐이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상황은 여전히 남아 있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내 마음을 괴롭히는 무거운 짐으로 계시는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눈만 뜨면 보입니다. 사업에 위기를 당하여 초초하게 다가오는 압박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날만 새면 전화오는 것이 두렵습니다. 남에게도 보이기 싫은 장애 아이가 기적적으로 낳은 것이 아닙니다. 그 무게 그 중압감. 그 고통의 상황은 여전히 있는 것입니다. 언니 동생, 일가 친척간의 불편한 상황이 바뀐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짐을 벗어버리라 하지 않으시고 내 멍에를 메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멍에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두 마리의 짐승이 함께 밭을 갈 거나 무거운 짐수레를 끌 수 있도록 만든 틀입니다. 이 멍에는 짐을 가볍게 끌기 위하여 짐승의 등이 상하지 않기 위하여 만든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두 마리 소에게 이 멍에를 메게 합니다. 어린 송아지에게 밭고랑을 바르게 걷고 또 주인의 명령에 순복하여 행동하는 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어미 소의 멍에 아래 함께 두어서 밭을 갈게 하기도 합니다. 실상 멍에를 끄는 것은 어미 소이나 멍에 안에 어미 소와 송아지가 함께 있으므로 송아지도 멍에를 끄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송아지는 어미소를 그냥 따라가기 만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모든 짐을 맡기고 주님의 멍에아래 들어오면 주님께서 우리 짐을 져주심으로 우리는 주님의 멍에 아래서 인생의 짐을 짊어지되 쉽고 가볍게 휴식과 즐거움이 넘친 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메주신 멍에에 우리는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메는 것은 이제 나의 멍에가 아니라 주님의 멍에입니다. 이제까지는 나의 힘으로 할려하니 힘이 들고 쉼이 없고 안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의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참 안식이 있는 것입니다. 봉사도, 가정일도, 회사일도, 학업도, 전도도, 가르침도, 자녀교육도, 효도도, 질병 치료도, 사업도 이제는 나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할 때 참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자기 힘으로 할 때 참된 안식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힘으로 할 때 참 안식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에게 지금 지고 있는 너의 멍에를 벗어 버리고 예수님의 멍에를 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근본적인 의미는 율법의 멍에를 벗어 버리고 복음의 멍에를 메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의 권위보다 복음의 권위를 인정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참 쉼을 주시는 예수님의 멍에는 어떤 멍에입니까?

1)쉬운 멍에라고 말씀합니다.(30)

여기서 쉽다라는 말은 '친절하다. 유익하다, 편하다, 부드럽다' 등의 의미를 갖는 말입니다. '쉽다(크레스토스)'는 말은 몸에 잘 맞는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소는 밭을 갈아야 하는데 소의 목에 꼭 맞는 멍에라는 것입니다. 멍에가 꼭 맞으면 멍에가 쉽습니다. 멍에가 꼭 맞으면 짐이 가볍습니다. 그러나 멍에가 안 맞으면 짐을 무겁게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어느 것 하나 자기 마음에 꼭 맞는 것은 없습니다. 부부가 살면서 마음이 꼭 맞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내 마음에 꼭 맞는 자녀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무거운 짐을 지고 주님께 나오면 주님께서 참됨 쉼을 주시며 내가 꼭 맞게 지고 갈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우리 예수님께서 같이 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내 고통 내 눈물 함께 흘려주시기 때문입니다. 

“모래 위의 발자국”이라는 글이 있지 않습니까? “어느 날 밤 한 사람이 꿈을 꾸었습니다. 그녀가 주님과 함께 해변을 걷고 있는 꿈이었습니다. 그녀의 생애의 장면들이 하늘 맞은 편에 비춰졌습니다. 매 장면마다 모래 위엔 두 발자국이 찍혀 있었는데; 하나는 주님의 발자국 또 하나는 자신의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생애 마지막 장면들이 비춰졌을 때, 그녀는 모래사장의 발자국들을 돌아봤습니다. 긴 세월을 살아 온 그녀 생애 가운데 오직 한 쌍의 발자국 만 보이는 것을 알게되고, 그것은 바로 그녀의 생애가운데 가장 어렵고 슬플 때였음도 알게 됩니다. 

그것이 몹시 마음에 걸려 그녀는 주께 여쭤봤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제가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하면, 항상 저와 함께 동행하시겠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제 삶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에는 오직 한 쌍의 발자국밖에 없네요. 제가 주님을 절실히 필요로 했을 때 왜 저를 버리셨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주께서 부드럽게 답하여 말씀하시기를; "나의 소중하고 사랑스런 아이야, 난 너를 사랑하고 또한 너를 결코 버린 적이 없단다. 네가 시험에 빠지고 힘들어 할 때, 오직 한 쌍의 발자국만 보이는 것은 그건 ...내가 너를 등에 업고 간 때문이란다." 

예수 믿고 주님께서 주신 멍에 괴로워하며 피하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멍에는 우리에게 꼭 필요하여 주신 것이고 나에게 가장 잘 맞는 것입니다. 


2)예수님은 내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지고 있는 짐 그 짐 때문에 우리 쓰러지고 망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구세주 주님으로 믿고 인생이 변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멍에가 있었습니다. 질병 때문에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질병을 고쳐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그 때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9)” 바울을 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해 주님의 은혜를 늘 사모하게 하기 위해 주님은 그 멍에를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감옥이 꼭 맞았습니다. 그는 거기서 찬송을 부릅니다. 많은 죄수들은 괴로워서 탄식하는데 그는 찬송을 부릅니다. 감옥 속에서 꼭 맞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의 멍에를 메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멍에는 자기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기 죽음을 선언한 사람은 누구에게든지 꼭 맞습니다.

자식들이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십니까? 시어머니가? 직장 생활이, 남편이, 아내가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십니까? 그 짐이 나에게 꼭 맞는 것을 받아 들이기시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이 함께 져 주시는 짐이고 그 멍에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한 방향으로 보조를 맞추며 가게 됩니다. 

이어령 교수께서 [지성에서 영성으로] 라는 책을 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시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딸을 통하여 예수님을 영접한 것입니다. 낮아지고 내려놓은 것입니다. 딸이 전 캘리포니아주 검사를 거쳐, 현재 캘리포니아주에서 청소년 범죄 전문 변호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손자가 자폐증에 걸렸고 딸이 암에 걸리고 시력이 상실되어 앞을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신비하게도 기도하면서 15년 동안 앓아 왔던 암에서 치유되고 손자의 자폐증이 낫는 기적과 시력이 회복되는 능력을 체험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실제 옆에서 경험하게 되고 결국 “사랑하는 내 딸아, 너의 기도가 높은 문지방을 넘게 했다. 암에 걸렸던 너의 아픔과 어둠이 나를 영성의 세계로 이끌어 주었다. 70평생 살아온 내 삶이 잿불과도 같은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 것이다.”라고 그 책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치료되었던 손자가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예수 믿고 나면 죽음도 질병도 고통도 부도도 아픔도 갈등도 다 살아져 버리는 것입니까?

과기처 장관을 지내었고 현재 대학 총장으로 있는 세계적 핵물리학자인 정근모 박사(장로)의 간증을 읽어보았습니다. 아버지가 교장 선생님이었는데 학교에서 한 학생이 유리를 닦다 추락하여 죽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죄책감 때문에 결국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도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에 유학을 가 학위를 받고 1967년 뉴욕 공과 대학의 부교수로 임명되었고 서른 둘에 한국 과학원의 부원장으로 부임했습니다. 그런데 간염으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답니다. 열 살 된 아들에게서 '만성 신장염' 증세 나타났습니다. 한번에 4시간이 소요되는 투석치료를 하였답니다.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질병의 늪에 빠져 버린 것입니다. 

그는 과학자였습니다. 그러나 아들의 병을 났기 위해 교회에 찾아갔습니다. '구원'이니 '은혜'니 하는 말보다는 병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급했답니다. 아들은 학교 생활은 이미 포기한 상태였답니다. 이화 여대를 다닐 때부터 신앙생활을 해왔으나 지극히 형식적인 신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던 아내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참신자”가 되자고 말했답니다. 아들은 부부의 걱정에는 아랑곳없이 두 번이나 자살을 기도했답니다. 

교회에서 4일간의 부흥회가 열렸답니다. 집회를 앞두고 준비 기도를 열심히 했답니다. "이번 부흥회에서는 성령체험을 하게 해주소서. 뜨겁게 회개하며 깨지는 역사가 일어나길 원합니다. 니고데모처럼 중생(born again)하는 크리스천이 되고 싶습니다." 목사님이 에베소 2장 1-8절 말씀을 봉독한 뒤 설교를 시작했습니다."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말씀을 듣는 중에 갑자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밤 예배시간이었습니다. 설교를 듣는 중에 다시 눈물샘이 터졌나왔습니다. 그때에 나는 너무나도 크고 분명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아들아, 너는 네 아들에 대해 감사해 본 적이 있느냐?" 그건 뚜렷한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교만함과 불만에 가득찼던 생활을 회개했답니다. 죄악들을 고백할 때마다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답니다. 대성통곡을 하였답니다. 체면이나 지위도 아랑곳없이 엉엉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감정을 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내와 두 딸이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아들도 고개를 떨구며 울었습니다. 아들은 생명을 연장 받고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답니다. 

일의 우선순위가 바뀌었답니다. 첫째가 하나님 일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세상일이 바쁘고 중요하더라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야 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 앞장서서 살기로 했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3일 동안 철야 기도를 하며 하나님께 생명을 연장해 달라고 기도하였답니다. 흐르는 눈물을 가누지 못하고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삶에 지친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작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네 아들에게 감사해 본 적이 있느냐?" 자신이 지금껏 큰 짐으로 생각해 왔던 아들을 통해 자신과 가족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기도합니다. "오 주님! 저를 위해 무거운 짐을 져야 했던 제 아들에게 감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 하비야, 너는 그 작은 십자가를 평생 지고 다녔지. 그 십자가 때문에 아빠가 기도할 수 있었고, 우리의 간증을 듣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듭난 생명을 얻었는지 알 수가 없구나. "라고 쓰고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지는 멍에 영광이고 상급으로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어거스틴은 "이 짐을 지는 자는 무거운 짐이 아니라 날을 수 있는 날개가 된다고하였습니다.


3. 우리 주님은 주님에게 나와 배우기를 원합니다(29).

우리는 참 행복해지는 방법, 부자되는 방법, 안식을 누리는 방법, 출세하는 방법 등을 배우기 위해 많은 돈을 투자합니다. 자녀 한명 키우는데 무려 2억 6천만원이나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참된 안식과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까? 참 안식과 행복을 누리는 방법을 주님께서는 주님에게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배우지 않고는 참 안식을 누리는 방법을 알 수가 없습니다. 쉼을 누리지 못합니다. 칼로 과일을 깍아 먹지 못하고 늘 상 손만 벱니다. 자칫 잘 못하면 그것으로 강도짓을 합니다. 칼 쓰는 잘 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여기서 배우다라는 말은 제자가 되다라는 말과 같은 어근을 가진 말로 "내 제자가 되어 내 가르치을 받으라."라는 말입니다. 주님께 나와 주님의 멍에를 멘다고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멍에를 메소 소를 길들이듯 주님으로부터 안식의 삶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배워야 합니다. 

유명한 오스왈드 센더스라고 하는 목사님이 계셨는데 그의 생애에 가장 어려운 경험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아내가 암병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는 곁에서 아내를 불쌍히 여기고 돌보는데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최선을 다해서 돌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 아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보, 당신이 내 곁에 있는 것이 나에게 오히려 고통을 줍니다. 소원이 하나 있는데 당신이내 곁을 떠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방해가 됩니다." 

목사님은 너무 너무 당황을 했습니다. 자기는 최선을 다해서 간호를 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하니까 너무 당황해서 아내한테 무슨 뜻이냐고 하니까 아내가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조용히 이 고통을 통해서 예수님을 좀 배우고 싶은데 당신이 나에게 너무 친절과 사랑을 베풀기에 예수님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어집니다." 

그때 목사님은 조용히 그 아내를 향해서 조용히 기도하고 곁을 떠나 주었습니다. 그 아내는 고통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배우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와 예수님과 동행한다고 말하면서도 조금만 자존심 상한 일이 생기면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씩씩 거리며 괴로워하고 밤잠을 설치고 한달 두달 아니 평생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아니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치사하고 간사한 인간들에게 배신당하고 침뱉음을 당하고 모욕당하면서 십자가에서 용서하시는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그런 부분에서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친구에게 배신당하면 견딜 수 없어합니다. 어떤 사람은 어느 지방 사람이 배신하고 속였다고 그 지방 사람들은 다 나쁜 놈이라고 정죄하고 적대시 합니다. 제 아는 목사님은 전남 분이 있는데 경남 분의 딸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장인이 장로님입니다. 그런데 명절 때만 되면 정치 이야기로 서로 싸운다는 것입니다. 참된 안식을 얻으려면 참 자유와 행복을 누리려면 예수님에게 이 부분 한 수 배워야 합니다. 사랑하는 제자에게 저주 당하고 인신 매매 당하면서도 용서하고 품어 주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우리가 배워야 할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십니다.(29)
온유라는 것은 단순히 성격 자체의 유순함이나 부르러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는 자기 마음을 하나님께만 고정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신뢰, 의탁하는 가운데 생기는 온화함과 관대함 그리고 친절함입니다. 그리고 겸손은 하나님께 대한 자발적인 헌신과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주어 그들을 섬기는데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2)친히 멍에를 메신 분이십니다.(29) 섬김의 도를 실천하신 분이십니다.
억지가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희생하신 분이십니다. 자원하는 심령으로 우리가 우리 일에 임해야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종으로 오셨습니다. 멍에를 메는 것은 자기 할 일을 하는 때입니다. 예수님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 10:43) 하였습니다. 십자가의 멍에를 메지 않는 섬김은 수고가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섬김은 안식이 됩니다.

3)우리에게 참된 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28,29) 
참된 마음의 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참된 안식을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주님께 나오십시오. 주님의 멍에를 메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배우십시오.
그러면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고달픈 인생 길을 걷다가 쉴 곳이 있습니다. 지치고 쓰러졌을 때 찾아가 쉴 곳이 있습니다. 패배와 절망의 골짜기를 지나 찾아갈 쉼터가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예수님의 넓은 가슴입니다. 함석헌님의 '친구'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멀리 집 나서는 길 처자를 내 맡기는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마음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양보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의 세상 빛을 다하여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눈감을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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