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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역사의 문턱에서 (수 8:3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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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역사의 문턱에서 (수 8:30-35)


[그 뒤에 여호수아는 에발 산 위에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려고 제단을 쌓았다. 그것은 주님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한 대로, 또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자연석으로 쌓은 제단이다. 그들은 그 위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주님께 드렸다. 거기에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자손이 보는 앞에서 모세가 쓴 모세의 율법을 그 돌에 새겼다. 온 이스라엘 백성은 장로들과 지도자들과 재판장들과 이방 사람과 본토 사람과 함께 궤의 양쪽에 서서, 주님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백성의 절반은 그리심산을 등지고 서고, 절반은 에발 산을 등지고 섰는데, 이것은 전에 주님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려고 할 때에 명령한 것과 같았다. 그 뒤에 여호수아는 율법책에 기록된 축복과 저주의 말을 일일이 그대로 낭독하였다. 모세가 명령한 것 가운데서,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자들과 아이들, 그리고 그들 가운데 같이 사는 이방 사람들 앞에서, 여호수아가 낭독하지 않은 말씀은 하나도 없었다.]

• 강을 건너다

매섭게 추운 이 날, 주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나온 교우 여러분께 주님의 은총과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이 혹독한 추위에도 여전히 일터에 있는 분들과 몸을 곱송그린 채 떨고 있는 우리 이웃들의 시린 마음에도 주님의 은총의 햇살이 비치기를 기도합니다. 날이 추워도 햇빛이 비치면 견딜만합니다. 이렇게 추운 날이면 사람들은 온기가 있는 곳으로 모여듭니다. 우리가 한 줌의 햇살 같은 사람이라면 좋겠습니다. 

공사장이나 시장 통에 군불을 지펴놓고 둘러서서 언 몸을 녹이는 사람들, 몸을 붙인 채 체온을 나누는 동물들을 보면 가슴이 짠해집니다. 군색해 보일지라도 그들은 겨울을 견디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온기를 나눌 사람이 있다는 것처럼 고마운 일이 또 있을까요? 온기를 나눌 때 우리는 벗이 되고, 그 우정은 새로운 공동체를 빚어냅니다. 오늘은 여호수아기를 중심으로 해서 출애굽한 히브리인들이 언약의 공동체로 형성되어간 과정을 살펴보려 합니다.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경험의 공유입니다. 함께 고생하고 땀 흘리고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죽을 고비를 넘길 때 우리 속에는 깊은 연대감과 우정이 생깁니다. 히브리인들은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을 거친 후 마침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탈출 1세대는 다 광야에 묻혔고, 광야에서 태어난 세대는 마치 그들의 조상이 홍해를 건넜던 것처럼 요단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마침 추수기간이어서 강물은 제방까지 차올라 철썩이고 있었습니다. 안전한 마른 땅을 떠나 강물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것은 정말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에 닿는 순간, 흘러내리던 물줄기가 끊기고, 물이 둑처럼 일어섰습니다. 그들은 물이 만든 둑 사이를 걸어 건너편 언덕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요단강을 건넜다는 것은 장소의 이동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옛 삶과의 단절과 새로운 삶으로의 진입을 상징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은 일종의 무덤인 셈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요단강에서 함께 죽고 다시 사는 과정을 통해 운명 공동체로 형성되었습니다.

• 할례를 받다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두 번째 요소는 신뢰입니다. 사람끼리의 신뢰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뢰야말로 신앙 공동체의 근거입니다.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선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기치 않은 지시를 받습니다. 돌칼을 만들어 할례를 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광야에서 태어난 백성들이 할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하지만 경계태세를 강화하고 전력을 극대화해야 할 시간에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무모하고도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지시는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황당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바로 앞에 나아가 ‘나의 백성을 보내라’는 명령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미디안의 대군에 맞서기 위해 모집한 군사들이 너무 많으니 돌려보내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기드온에게 남겨진 군사는 겨우 삼백 명이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목자 잃은 양 같은 처지의 무리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셨습니다. 모두 계산이 안 나오는 명령입니다.

할례를 행하라는 지시를 받은 백성들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이런 우리의 궁금증은 전혀 충족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느꼈을 당혹감, 수군거림, 망설임을 전혀 기록하지 않고 일의 경과만 간략하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백성이 모두 할례를 받고 나서 다 낫기까지 진 안에 머물러 있었다.”(수5:8)

이 대책 없는 순종을 어찌 이해해야 할까요? 그것은 고통을 통해 터득한 삶의 지혜였습니다. 광야를 거쳐 오는 동안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힘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경험했습니다. 지금 당장은 이해할 수 없다 해도, 하나님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고 우리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 삶은 든든해집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할례를 행한 후에야 할례를 명하신 까닭을 밝히십니다.

“너희가 이집트에서 받은 수치를, 오늘 내가 없애버렸다.”(수5:9)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의 기억 속에 각인된 애굽을 몰아내는 의식이었던 셈입니다. 가끔 삶에는 이런 의례가 필요한 법입니다. 여러분은 13세기의 성자 아씨시의 프란체스코의 일화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새들에게 설교를 했다든지, 구비오의 늑대를 설득해서 사람들을 해치지 않게 했다든지, 나환자에게 자기 옷을 벗어주고 그를 부둥켜안았다든지, 그의 손과 발에 예수님의 수난을 나타내는 상흔이 나타났다든지…. 몇 해 전 아씨시에 갔을 때 저는 지오토라는 화가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프레스코화 앞에 한참을 머물러 있었습니다. 지오토는 프란체스코의 몇 가지 일화들을 그림으로 재현해놓았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인상적인 것은 벌거벗은 프란체스코의 모습이었습니다. 

자초지종은 이렇습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기도하던 프란체스코는 어느 날 “나의 교회를 다시 세우라”는 주님의 명령을 들었습니다. 그는 부유한 포목상이었던 아버지 피에트로의 가게 몇 개를 돌보고 있었는데, 돈이 생기는 대로 그것을 교회 수리에 다 썼습니다. 아들이 자기 돈을 탕진할 뿐 아니라, 천한 이들이 하는 노동을 함으로써 가족의 명예를 손상한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아들을 귀도 주교에게 데려갑니다. 화가 난 그는 이제 부자관계를 청산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사실 그가 이렇게 험하게 나온 것은 우선은 돈을 되찾고 싶어서였고, 부차적 목적은 아들에게 경각심을 불어넣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느닷없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돌돌 말아 아버지 발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그 망측한 모습에 놀란 주교는 얼른 자기 망토를 벗어 프란체스코의 알몸을 덮어주었습니다. 지오토는 바로 그 광경을 그렸던 것입니다. 알몸이 됨으로써 프란체스코는 옛 세계와 단절했습니다. 주교의 망토는 프란체스코의 새로운 운명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오로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적진을 앞에 두고 할례를 행함으로써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새로운 백성으로 거듭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 탐심을 경계하다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세 번째 요소는 자기 비움입니다. 할례의 상처가 다 아문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난공불락의 요새화된 성읍 여리고를 점령했습니다. 물론 그들이 한 일이라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치 승리를 자기들이 쟁취한 것인 양 한껏 들떴습니다. 그들은 내친 김에 아이성까지 점령하자며 염탐꾼을 파견했습니다. 돌아온 그들은 아이성 공략에는 삼천 명이면 족하다고 보고합니다. 여호수아는 주님께 여쭈어보는 절차도 생략한 채 전투를 시작합니다. 결과는 참패였습니다. 자만심이 부른 화였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빨리 하나님을 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기의 저자는 아이성 패배의 원인을 다른 데서 찾고 있습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이 아간입니다. 그는 여리고 성을 함락시킨 후 전리품 중의 일부를 숨겼습니다. 은 이백 세겔, 금 오십 세겔, 시날 산(産) 외투 한 벌입니다. 토라는 첫 이삭이나 첫 열매, 맏아들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여겨 주님께 바쳐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여리고성은 새 역사의 첫 열매였고, 따라서 하나님께 바쳐야 할 제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은 다 죽이거나 불태워버리는 것입니다.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을 다 없애버리라는 명령은 대단히 잔혹하고 비인간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는 그런 명령의 타당성 여부를 따지느라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아간이 하나님의 것에 손을 대 결과적으로 제물 전체가 부정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어느 신학자는 원죄란 ‘공공의 것’(the public)을 ‘사유화’(privitization) 한 것이라 말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동산에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 속해 있던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그것을 사유화했다는 것입니다. 아간은 바로 그런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사리사욕이 공동체를 위기에 빠뜨립니다. 우리 시대에도 아간은 많습니다. 공직자들에 대한 청문회를 볼 때마다 허탈감을 느낍니다. 

그분들이 재산을 증식시키고, 사회적 지위를 유지해가는 과정을 살펴보면 과연 ‘그들만의 리그’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탈법적인 부분도 있고 합법적인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부가 늘어날수록 가난한 이들의 등골은 더욱 휘게 마련입니다. 저는 그들의 모습에서 아간의 초상을 봅니다. 공공의 장소에서 다른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동을 하는 이들도 아간의 부류라 할 수 있습니다.

아간은 공공의 것을 사유화함으로써 패전의 빌미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떠오르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이 꼭 아간만의 책임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가로챈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 대부분이 아니었습니까? 승리에 도취해 그들은 하나님을 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도 아간과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아간이 유형적인 것을 가로챘다면, 백성들은 무형적인 가치를 가로챈 것일 따름입니다. 어쨌든 아간과 같은 사람이 있는 한 공동체의 화합은 불가능합니다. 서로 의심하고, 비난하고, 정죄하는 곳에서 생명은 자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실을 너무나 잘 아시기에 아간의 책임을 엄중하게 물으셨습니다.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는 이들은 자기 욕심을 먼저 내려놓아야 합니다.

• 율법을 낭독하다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필요한 네 번째 요소는 하나의 중심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아이성을 함락시킨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발 산 위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여호수아기의 저자는 그들이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않은 자연석으로 제단을 쌓았다고 말합니다. 다듬지 않은 돌을 유독 강조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어쩌면 다듬은 돌은 조상들의 고역살이를 떠오르게 하는 것이기에 한사코 피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연석으로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모세의 율법을 새긴 후, 온 백성을 두 패로 나누어 한 패는 그리심산을 등지고 서게 하고, 다른 한 패는 에발산을 등지고 서게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시위하여 서있는 백성들 앞에서 율법책에 기록된 축복과 저주의 말을 전부 낭독했습니다. 생명과 번영의 길, 죽음과 파멸의 길을 가르치면서 생명을 택하라고 간곡히 당부하던 모세의 말도 포함되었을 겁니다.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손이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십시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의 말씀을 들으며 그를 따르십시오.”(신30:19b-20a) 

율법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 사랑은 분리할 수없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이웃을 사랑할 수 없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참 위험한 곳이 되었습니다. ‘묻지마’ 범죄도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미국 애리조나에서도 총기난사 사건은 여러 명의 희생자가 나왔습니다. 연방하원의원을 노린 범죄였다고 합니다. 무고한 이들이 많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희생자 추도식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참 감동적인 연설을 했습니다. 그 연설의 전문을 듣고 또 읽으면서 저는 솔직히 상당히 부러웠습니다. 

오바마는 눈물을 자아내려는 화법을 쓰지 않았습니다. 마치 지금도 곁에 있는 친근한 사람들인 것처럼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며 그들의 삶의 모습을 담백하게 그렸습니다. 그런 범죄가 빈발하는 현실이나 범죄자에 대해 비분강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그런 어두운 현실을 넘어 함께 만들어가야 할 세상에 대해 말했습니다. “누구한테 손가락질하거나 비난을 가하기 전에 이번 사건을 도덕적 지혜를 기르고, 타인에게 좀 더 귀 기울이며, 공감 능력을 가다듬으며, 꿈과 희망은 늘 함께한다는 것을 되새기는 계기로 삼자”며, “우리의 화법이 너무 날카롭게 대립하고, 우리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고통의 원인을 돌리는” 문화를 청산하자고 말했습니다. 

“우리를 분열시키는 힘은 우리를 단결시키는 힘보다 강하지 않다”며 이번 사건에서 용기를 발휘해 더 큰 희생을 막은 사람들을 예로 들었습니다. 영웅적인 행위는 전장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특별한 훈련을 받거나 신체적으로 강인해야만 가능한 것도 아니라면서, 영웅은 우리 곁에 있는 동료 시민들의 가슴 속에서 호출되기만을 바라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위기는 늘 있게 마련입니다.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심이 깊어지고, 사익보다 공익을 추구하는 마음이 자라고, 하나님의 뜻을 우리 삶의 중심으로 삼을 때, 우리는 마침내 새 역사의 여명을 보게 될 것입니다. 가장 혹독한 추위 속에서 따스하게 손을 잡아주는 이가 절실한 것처럼, 지금 세상은 따뜻하고 친절한 마음으로 이웃에게 다가서는 사람들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겨울을 녹이는 봄의 사람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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