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 (창 11:1-9)

첨부 1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 (창 11:1-9)
  

우리 속담에 “공(功)든 탑이 무너지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말 그건가요? 물론 사람이 성실하게 노력하는 것은 인생의 기본입니다. 또 그러면 인생을 성공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공든 탑도 얼마든지 무너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을 보면 공든 탑들이 여기저기서 무너지는 것을 목격합니다. 높이 올라 간 줄 알았는데, 무참히 추락하는 모습을 보면 “아, 인생이 저럴 수도 있구나!”하고 경악하게 됩니다.   

이런 일들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다 보면, 인생에는 좀 더 근본적인 원리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공을 들이되, 정말 잘~ 들여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무조건 아무렇게나 공을 들인다고 해서 잘 되는 게 결코 아닙니다. 자기는 인생을 잘 사는 줄 알았는데, 심지어 성공한 줄 알았는데, 나중에서야 인생을 망치고 잘못 살았음을 깨닫고 후회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만회할 기회가 있으면 그나마 다행인데, 그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으면 정말 비참한 인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폴레옹(Napoléon Bonaparte, 1769~1821)은 한 때 천하를 호령했던 프랑스의 영웅입니다. 그는 코르시카 섬 사람으로 비천하게 태어났지만, 35세에 프랑스 황제가 됐습니다. 승승장구하던 시절에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죠. “내 사전에 ‘불가능’이라는 단어는 없다!” 그러나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의 웰링턴 장군에게 패배한 후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52세에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때 그가 남긴 말입니다. “내 인생의 실패와 몰락에 대해서 탓할 사람은 나 자신 외에 아무도 없다. 내가 나 자신의 최대의 적이었으며, 비참한 운명의 원인이었다.” 그는 분명히 역사 속에서 한 페이지를 장식한 영웅이었지만, 개인으로 보면 실패한 인생입니다. 차라리 그가 평범했더라면 얼마든지 행복한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황제가 되기까지 그가 얼마나 공을 들였겠습니까? 그러나 그 모든 게 무너져버린 상태에서 인생을 마감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공든 탑도 얼마든지 무너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러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한번 뿐인 우리 인생에 공을 잘~ 들이고 굳게 세워질 수 있을까요? 두고두고 후회 없는 인생, 감사하며 승리하는 인생이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반면교사가 됩니다. 본문은 잘 아시는 대로 ‘바벨탑 함락 사건’입니다. 아무쪼록 이 말씀을 통해 저도 여러분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 복된 인생 이루시기 바랍니다.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성경 전체가 주는 교훈을 생각해 봅니다. 인간은 왜 실패하며 비참한 인생으로 전락하는가? 그 이유는 한 마디로 창조주 하나님을 인생의 무대에서 배제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 아니, 내가 바로 내 인생을 만들어가는 하나님이야! 이런 착각 속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교만이 인생의 타락과 멸망의 시작입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인류의 시조 아담과 여자가 타락하는 장면이 나오죠. 사탄이 다가와서 유혹한 말이 무엇입니까? 창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 말을 듣고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배반한 겁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한 것이 죄의 씨앗이고, 그로 인해 저주와 사망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교만이 곧 성경에서 말하는 ‘죄’(sin)입니다. 신8:14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 ”

교만은 불신앙이고, 불신앙은 교만입니다. 이게 죄의 뿌리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무척 싫어하십니다. 왜냐하면 교만한 마음으로는 하나님과 기본적인 관계조차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무시하는 교만한 자는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잠16:5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그러므로 개인도 망하고 심지어 집단으로 뭉쳐도 반드시 망합니다. 하나님을 교만함으로 거역하는 것은 마치 계란으로 바위 깨는 것과 같습니다. 계란 한 개를 바위에 던져도, 한 판을 던져도 깨집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대적하면, 개인이든 민족이든 반드시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간단히 다시 정리해 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신본주의(神本主義)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인간이 신이 되려고 하는 인본주의(人本主義)는 반드시 망합니다.   

이런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바벨탑 사건입니다. 노아 홍수 이후 인류는 새롭게 번성했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또다시 죄악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곧 무신론과 불신앙의 역사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무시하며 보란 듯이 바벨탑을 높이높이 쌓았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호언장담합니다. 아니, 자기들이 신(神)이라고 자처한 겁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7절~9절.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 ” 

그 당시만 해도 인류의 언어는 하나였습니다. 이런 사실은 현대 언어학자들이 한결같이 동의하는 바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한 언어로 뭉쳐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차마 보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사방으로 다 흩어버립니다. 바벨탑도 무너지고 공사가 중단됩니다. 이때부터 언어가 달라져서 민족마다 소통이 어렵게 된 겁니다. 이 바벨탑 때문에 오늘 우리가 자녀들이 외국어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 겁니다.   

한국인이 영어 공부 하는 데 쓰는 돈이 한 해에 무려 15조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지난 주간에 보도를 보니까, 어린이 110명이 필리핀에 어학연수 갔다가 유학원의 실수로 필리핀 당국에 여권까지 압수당하고 억류되어 있다죠. 다행히 이 달 내로 돌아온다고 합니다만, 뭐하는 짓인가 생각했습니다. 

이 모든 게 바벨탑에서 유래한 비극입니다. 여기서 ‘바벨’이란 이름의 뜻이 ‘혼잡’ ‘혼란’ ‘혼돈’(confusion, disorder, chaos) 등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신본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을 부정하고 인간 중심으로 살아나는 인본주의는 바벨탑과 같이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1] 하나님의 뜻 vs 인간의 욕심  

바벨탑 사건이 발생한 것은 노아 홍수가 끝난 지 약 350년 지난 때였는데,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보다 인간의 욕심을 앞세운 결과였습니다. 이 사건은 시날 평지에서 있었는데,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에 위치한 비옥한 땅입니다. 흔히 메소포타미아 지역이라 부르죠. 지금으로 말하면 이라크 지역에 해당됩니다. 그 땅의 지배자는 ‘니므롯’이었습니다. 

창10:8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니므롯은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의 손자 즉 구스의 아들로 그 시대의 영웅이었습니다. 노아 홍수 후 인구가 증가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는데, 그들을 이끌고 시날 평지로 이동했던 것입니다. 

1절~2절. “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그들이 동방으로 간 것은 물론 장소적인 이동이었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멀리 떠났음을 암시합니다. 그들은 그곳에 모여 도시를 형성하고 하나님을 배제한 ‘인간 왕국’을 건설하려고 합니다.   

창1:28 보면, 하나님의 뜻을 사방에 흩어져 땅에 충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의 욕심으로 그 뜻을 거르셨습니다. 그로 인해 비극이 시작됩니다. 약1:15 ...

약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렇습니다! 인간의 작은 욕심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다 보면 죄가 되고 마침내 멸망하게 됩니다. 바벨탑은 인간의 욕심을 상징합니다. 욕심으로 세운 인생의 공든 탑은 반드시 언젠가는 무너집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한 뜻대로 세운 인생의 탑만이 굳게 세워집니다. 

요일2:15,17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수년 전에 터진 세계금융위기 때문에 지금도 전 세계가 허덕이고 있죠.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의 탐욕 때문이 아닙니까? 경제전문가들이 뒤늦게 내놓은 진단이 바로 이겁니다. 정부 관료와 기업, 시장, 개인의 탐욕이 결합되어 금융위기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개인이든 기업이든 나라든 탐욕으로 키우는 것은 반드시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법칙 위에 세워야 오래오래 갑니다. 심지어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조차 돈만 벌려는 욕심이 아니라 이웃 사랑의 고상한 가치를 추구할 때 훨씬 더 좋은 결과를 낳게 됩니다. 

명품 회사인 페라가모 창업주 살바토레 페라가모가 그 아들 페루치오 회장에게 교훈한 기업 경영의 원리입니다. “돈을 벌겠다는 욕심으로 구두를 만들면 실패한다. 좋은 구두를 만드는 것은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에서 출발해야 된다.” 실제로 경영학자들의 연구 조사에 의하면 고상한 가치를 가지고 경영하는 기업이 단순히 돈만 벌려는 기업에 비해 총수입 4배, 일자리 수 7배, 주식 가격 12배가 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반짝 하는 기업과 유구한 역사를 갖는 기업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지금 어떻습니까? 지금 하는 일을 과연 무엇 때문에 열심히 하고 있습니까? 개인의 욕심 때문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함입니까? 그것이 바벨탑 인생인가 아닌가를 가늠하는 기준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능력 vs 인간의 재주  

바벨탑은 인간이 하나님의 능력을 겸손히 의지하기보다 인간 자신의 재주만을 과신한 결과입니다. 시날 평지에 모인 인간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3절.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입니다. 그 이전에는 나무나 돌을 갖고 집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흙을 갖고 벽돌을 구워 역청(콜타르)을 발라 방수처리까지 하면서 자유자재로 건축물을 만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컴퓨터를 만들어낸 것 이상으로 엄청난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심판으로 산산이 무너지고 혼잡해진 것입니다. 시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인간이 제아무리 재주를 부리고 발달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무시하면 반드시 실패한다는 겁니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라는 겁니다.   

반대로 인간이 좀 부족해도 겸손히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잠3:5~6 “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이 승리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전1: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이것은 비유법이죠. 어떻게 하나님이 약하고 어리석겠습니까? 인간이 제아무리 잘난 척해 봐도 하나님의 새끼손가락만도 못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한 게 아니겠습니까? 겸손히 무릎 꿇고 기도하는 이간과 자지 재주만 믿고 까부는 인간은 하늘 땅 차이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무조건 내 힘과 재주만 믿고 열심히 뛰고 있습니까? 아니면 기도하며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바벨탑 인생인가 아닌가를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영광 vs 인간의 허영   

바벨탑은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기보다 인간 자신의 영광 즉 허영을 추구한 결과입니다. 시날 평지에 모인 인간들이 바벨탑을 건설하려고한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4절. “또 말하되 자, 성읍(city)과 탑(tower)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자는 게 문제입니다. 단순히 높이 쌓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종교적인 목적이 있었던 겁니다.   

고고학자들의 탐사와 연구에 의하면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지구라트’(Ziggurat)라 불리는 탑들이 산재해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 바벨탑은 지구라트의 전신이 아닌가 짐작됩니다. 지구라트는 ‘하늘의 언덕’이란 뜻인데, 하늘 높이 층계 식으로 쌓은 건축물입니다. 그 꼭대기에 우상의 신상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바벨탑 위에도 우상 신상이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건축물을 세운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고층 건물은 다 무너져야죠. 그게 아니라, 하나님을 무시하고 거역하는 영적인 의도가 문제였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명심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피조물이고,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음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물건으로 비유해서 말하면, 제작 목적이 있다는 겁니다. 사43:7 “ ...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그러므로 인간은 당연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인생의 존재 목적을 갖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도 이렇게 역설합니다.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그럴 때 인간에게 참 만족이 있습니다. 행복이 있습니다. 보람이 있습니다. 참 이상한 것은 인간이 자기 영광을 위해서 열심히 사는 데도 이루지 못해서 안달이지만, 설사 이룬다고 할지라도 그 후에 또 공허합니다. 그 이유는 존재 목적이 충족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인간이 만족하고 영광스러워지는 길은 먼저 하나님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약4: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사무엘과 사울을 보면 아주 대조적인 인물들입니다. 그들이 각각 추구하던 인생의 목적이 있습니다. 사무엘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사울은 오직 자기 영광입니다. 두 사람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 각각 기념비를 세우는데 대조적입니다. 사무엘은 모든 공을 하나님께 돌리며 기념비를 세웁니다. 

삼상7: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 이라 하니라”(에벤에셀=‘도움의 돌’) 하나님이 도와주셨다고 감사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기뻐하시고 그가 사사로 있는 동안 태평성대를 이뤄주셨습니다. 반대로 사울은 어땠나요? 

삼상15:12 “ ...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전쟁에서 이긴 후 자기 도취에 빠져서 자기에게 모든 공을 돌리고 자기 영광을 위해 기념비를 세웁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왕으로 재위하는 동안 나라가 위태롭고 마침내 전쟁터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기들끼리 세운다고 세워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워주셔야 굳게 세워지는 겁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어요! 인생에는 바위성과 모래성 두 종류가 있다고 말입니다.(마7:24~27)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 삼은 후 말씀대로 살면 바위성입니다. 비바람이 불고 홍수가 나도 끄떡없습니다. 반면 자기 욕심대로, 자기 재주로, 자기 영광을 위해 아무렇게나 살면 모래성입니다. 당장은 평소에는 멀쩡한 것 같은데, 심지어 화려하고 대단한 것 같은데, 언젠가 무참하게 무너지고 만다는 겁니다. 

어제 신문에 신정아 씨 인터뷰 기사가 나왔습니다. 예일대 박사라고 학력을 위조해서 대학 교수도 하고 광주비엔날레 예술 감독도 했고, 고위공직자와 스캔들도 있었죠. 수감 생활을 마치고 이제 새로운 출발을 계획한다고 합니다. 그 스스로가 밝힌 과거 인생 이야기입니다. “해선 안 될 사랑을 했고, 돈으로 학위를 사려 했다. 내 인생관은 분명히 잘못됐었다.” “죽도록 창피했다 죽도록 반성했다… 이제는 살고 싶다. 절박하게!” 기사를 읽으면서 같은 인간으로서 측은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분이 무너진 인생의 바벨탑을 철거하고, 하나님 안에서 제대로 된 공든 탑을 세우기는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마음속 깊이 새기면서 인생의 안전 진단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인생의 공든 탑은 안전한가? 혹시 바벨탑은 아닌가? 두고두고 후회 없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고 싶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위에 인생을 세우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위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인생을 세우십시오. 평생 보증(lifetime guaranty), 그리고 영생 보증(eternal life guaranty)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쪼록 바벨탑을 쌓는 사람이 아니라 에벤에셀의 아름다운 탑을 쌓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