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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있는 사람 (시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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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있는 사람 (시 1:1-6)


지금 카타르에서 아시아 컵 축구 경기가 열리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와 바레인의 경기 중 골을 넣는 장면 가운데 보는 이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저도 이 장면을 보고 아주 기분이 좋았습니다. 한 번 영상으로 보겠습니다. 차두리 선수가 중거리 슛을 쏜 것을 바레인 골키퍼가 잘 막았습니다. 그것을 구자철 선수가 차 넣었습니다. 골이 들어가자 중거리 슛을 쐈던 차두리 선수가 기뻐하는 모습입니다. 어느 네티즌은 ‘깨방정 박수’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천진난만한 모습입니다. 자신이 넣을 수 있었던 골을 다른 선수가 넣었을 때 아쉬워하지 않고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맑은 영혼을 가진 사람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주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습니다. 그런 마음과 성품 자체가 복입니다. 

오늘 본문인 시편 1편을 제대로 읽으면 복의 개념이 분명해집니다. 본문은 ‘복 있는 사람은’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성경은 ‘돈 있는 사람이 복되다. 땅 있는 사람이 복되다.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복되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라고 말합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소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 가짐과 성품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마음과 성품이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고 지도를 받아 하나님의 마음과 성품을 닮아가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시편의 저자는 복 있는 사람을 ‘시냇가에 심은 나무’에 비유합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다고 말합니다. 팔레스틴 지역은 기온이 높은 지역입니다. 또한 가뭄이 심합니다. 웬만한 식물들은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 즉 시냇가의 물을 향해 깊이 뿌리를 내려 물을 공급받을 수 있는 나무만이 심한 가뭄과 세찬 바람 가운데서 살아남아 계절에 따라 푸른 잎사귀를 내고 열매를 맺습니다. 

이와 같이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세상의 어떤 유혹과 풍랑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푸르름과 열매를 맺는 삶을 삽니다. . 복은 환경이 우선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 됨이 먼저입니다.   

베스트셀러인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을 아실 겁니다. 조그마한 책인데 전 세계에 엄청나게 팔린 베스트셀러입니다. 그 책은 역대상 4장에 나오는 야베스의 기도를 중심으로 쓴 책입니다. 그 책에 보면 존이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존이 천국에 갔습니다. 베드로의 인도로 천국의 화려한 세계를 다 구경했습니다. 그 아름답고 영광된 천국 구경을 하는데 한 곳에 갔더니 어마어마하게 큰 창고가 있는 겁니다. 그 창고에는 창문도 없고 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존이 저곳에 들어 가보고 싶다고 하니 베드로가 하는 말이 ‘그건 안 보는 게 좋을 거다’ 라고 말했습니다. 보지 말라고 하니까 존은 더 보고 싶어서 ‘그래도 보고 싶습니다’ 라고 간청했습니다. 베드로는 웃으면서 ‘정 그러면 들어가 보렴’ 하고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존이 큰 창고에 들어가 보니 수많은 큰 상자가 천장에까지 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상자마다 빨간 리본이 붙어 있고 거기에 사람들의 이름이 쓰여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기 위해 마련해 놓으신 선물이라고 말했습니다. 존은 자기 이름이 붙어 있는 상자는 어디 있나 하고 열심히 J자부터 알파벳을 찾아 자기이름을 찾았습니다. 존은 자기의 이름이 붙여있는 상자를 내려서 열어 보았습니다. 그 안에는 온갖 귀한 보화가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존은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너를 줄려고 예비해 놓은 축복이다’ ‘그런데 왜 안 줬습니까?’ ‘네가 구하지 않으니까 안 줬지. 

그리고 네가 받을만하지 못하니까 안 줬지. 사람들은 복을 못 받는다고 야단이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준비해 놓고도 줄 수가 없단다’라고 말합니다. 야베스의 기도 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내용은 간단하지만 하나님은 복을 주시기 위해 예비하고 계신데 우리들이 그 복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이 되지 못해서 주시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두 주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그 복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이 되지 못하기에 복을 주시지 못하십니다. 사람들이 복을 달라고 아우성이지만 그 복을 잘 관리하고 선하게 사용할 수 있는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복 받지 못할 마음과 성품을 가진 사람이 복을 받으면 자신도 망하고 다른 사람도 망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구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위한 구함이어야 함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받을 복을 가지고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살 수 있는 선한 마음과 성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야고보서 4장 2절에 보면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복의 문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돈이 복이다. 땅이 복이다. 환경이 복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복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돈은 있는데 인격이 없는 사람을 우리는 졸부라고 합니다. 지식은 있는데 덕이 없는 사람을 독선자라고 말합니다. 권세는 있는데 지혜가 없는 사람을 독재자라고 말합니다. 졸부와 독선자와 독재자를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도리어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만듭니다. 

복은 환경이 아니라 어떤 악인의 꾀도, 죄의 길도, 오만한 자의 어떤 유혹도 그를 흔들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의 마음과 성품으로 채워진 사람 자체입니다. 그가 진정으로 복 있는 사람이고 그에게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채우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 1편을 반으로 접으면 1절-3절까지와 4절에서 6절로 접힙니다. 그 첫 단어들이 대조됩니다. 1절의 처음 단어는 ‘복 있는 사람은’입니다. 3절의 마지막 단어는 ‘형통하리로다’입니다. 복 있는 사람을 비유한 것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입니다. 4절의 첫 단어는 ‘악인은’입니다. 6절의 마지막 단어는 ‘망하리로다’입니다. 악인을 비유한 것이 ‘바람에 나는 겨’입니다. 시편 1편의 저자가 기가 막히게 단어들을 대조적으로 사용하면서 복된 인생의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악인을 ‘바람에 나는 겨’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바람에 나는 겨는 목적도 방향도 없습니다. 그저 바람이 부는 대로 날리다가 떨어지는 곳에서 썩어 없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의 정체성이 없습니다. 세상의 유혹과 시험에 힘없이 무너집니다. 악인이 꾀에 쉽게 넘어갑니다. 죄의 길에 쉽게 들어섭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 교만을 떱니다. 신앙의 깊은 심지가 없고 핑계와 원망만 가득합니다. 세상의 쾌락과 소유를 위해서는 앞뒤를 가리지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듭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기뻐하시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이 없습니다. 

소금은 어디를 가든지 짠 맛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소금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길가에 버려져 사람들의 발에 밟힐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침반은 어디에 가져다 놓아도 북쪽을 가리킵니다. 나침반의 장소를 옮기고 환경을 바꾼다고 해서 바늘이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면 그것은 나침반이 될 수 없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에도, 죄인의 길에도, 오만한 자의 자리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신의 중심을 간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장소와 환경에 따라 짠 맛을 잃어버린 소금과 같은 모습이 된다는 것입니다. 고장난 나침반처럼 환경과 장소에 따라 흔들리며 방향 감각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은 결국 망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하는 가운데 에베소라는 도시에 들어가 복음을 증거 합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증거 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은혜를 주셔서 바울의 손을 통해 병을 낫게 합니다. 바울이 쓰던 손수건을 환자의 몸에 올려놓아도 환자가 낫습니다. 귀신을 쫓아냅니다. 에베소 도시에 스게와라는 유대교의 제사장이 있었는데 그에게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바울의 귀신을 쫓아내는 모습을 보고 흉내를 냈습니다. 

그들은 귀신들린 사람을 향해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이르노니 물러가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때 귀신이 제사장 스게와의 아들들에게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고 묻습니다. 스게와의 아들들이 아무 대답을 못합니다. 그때 귀신이 그들에게 달려들어 제압합니다. 그들이 귀신에게 눌려 상하고 벌거벗은 추한 모습으로 도망갔습니다.

스게와의 아들들은 유대교의 제사장의 아들들이었습니다. 즉 레위 지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분명한 정체성이 없었습니다.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바르게 설정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에게 떠나라고 명령합니다. 자신들이 믿는 예수님의 이름이 아닙니다. 그들의 믿음은 상황과 환경에 따라 요동칩니다. 주변의 것에 쉽게 휘둘리는 모습입니다. 그때 귀신은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희들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귀신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귀신에게 눌려 비웃음과 조롱거리가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악인은 망하리로다’ 라는 말씀이 그대로 이뤄짐을 볼 수 있습니다. 

1800년대에 독일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하인리히 슐리만이라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의 나이 7살 때 아버지가 성탄절 선물로 준 ‘어린이를 위한 세계사’라는 책에서 유명한 시인 호머가 쓴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트로이라는 도시가 아직도 이 땅에 실재하는 장소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믿음은 마침내 그의 일생을 이끌어 가는 포기할 수 없는 꿈이 되어 그의 나이 41세 되던 해 고고학자의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나이 51세 되던 해 1871년 드디어 그는 과거의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 에게 해 연안 언덕에서 소설속의 도시 트로이 유적을 발굴하는 일에 성공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적 탐사의 과정에서 그는 어마 어마한 보화들을 발굴하고 세기의 부호가 되었습니다. 그가 믿음으로만 꿈꾸던 이 보화들을 발굴하던 그 순간의 그의 감격을 상상해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한 독일의 기자가 그의 부자 됨을 축하했을 때 그는 매우 흥미 있는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지금 비로소 부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내가 트로이에 대한 믿음과 꿈을 가진 그 순간부터 나는 이미 부자였으니까요.’

행복은 그것을 이미 마음에 품고 감사하며 기뻐하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입니다. 행복은 다 만들어진 후에 느끼고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행복을 마음에 품고 감사하며 기뻐게 사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 주일 아침에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오늘 본문에서 선포하는 ‘복 있는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감사와 기쁨의 마음으로 믿음의 정체성을 굳건하게 함으로서 그 위에 주시는 하나님의 진정한 복을 누리는 은혜가 모든 성도 여러분 가운데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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