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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건져내시는 주님 (롬 7: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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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건져내시는 주님 (롬 7:14-25)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내재한 심각한 갈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갈등은 율법에 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의 단락에서 사도 바울은 율법이 우리에게 어떤 것인지를 확실하게 정리한 바 있습니다. 7:7에서는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했고, 7:12에서는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고마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율법의 참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전히 밝혀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밝혀지는 율법의 참 뜻을 우리로 하여금 깨달아 알게 해주시는 이는 오직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율법은 신령한 것입니다. 

“신령하다.”는 것은 “영적이라.”는 뜻입니다. 이 영적인 율법을 영적인 사람이 받으면 아무런 갈등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육적인 사람이 받으면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이신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삶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긴 하나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은 아직 완전히 영적인 사람이 되지 못한 상태에 있습니다. 날마다 조금씩 보다 더 영적인 삶을 이루어가기는 하지만 아직 육의 잔재를 안고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되고 죄의 노예상태로부터 해방되기는 했으나 아직 죄의 사슬을 완전히 끊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새 삶의 대한 감격과 기쁨과 갈망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직도 세상적 삶, 육적 삶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자유인의 신분이 주어지긴 했으나 아직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치 감옥에서 풀려나오긴 했는데 감옥에서 차고 있던 쇠사슬을 그냥 차고 나온 것과 같습니다. 감옥에서 입던 죄수복을 아직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모순된 모습입니까? 그 모순된 모습을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먼저 14-15절을 봅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여기서 “나”라고 한 것은 사도 바울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게 되었으며 율법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고 따라서 성실히 지켜야 할 것임을 알고는 있지만 아직 그 율법이 요구하는 바대로 온전히 행할 능력이 없는 신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죄 아래에 팔렸다.”는 말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옛날에는 사람을 사고 파는 노예시장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팔리면 그 산 사람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 아래에 팔렸다.”는 말의 뜻은 죄의 노예상태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래 모든 사람은 다 죄의 노예상태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죄의 노예상태에 있던 사람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죄 값으로 내주시고 되찾아 오신 바 된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따라서 “죄 아래에 팔렸다.”는 말은 그리스도인에게 붙이기에 적절하지 않은 말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무슨 뜻으로 그 말을 썼겠습니까? 

바로 이어지는 15절의 말대로입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이 다시 죄의 팔렸다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꼭 죄에 팔린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15절의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한 것은 자기의 행위를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바로 이어서 말하는 대로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죄로부터 해방된 사람인데도 아직 죄의 노예상태에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니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신자들의 모순된 모습을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언급합니다. 16-18절입니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사도 바울은 인간의 몸 자체를 악하다고 보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육체” 혹은 “육신”이라고 한 것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본성”이란 의미로 사용한 것입니다. 즉 성령의 능력과 단절된 인간의 본성을 가리켜서 한 말입니다. 

계속해서 사도 바울의 말을 들어봅니다. 본문 19-23절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선에 대한 갈망은 생겼으나 선을 행할 능력은 없음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안의 이 모순과 갈등을 확인하며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한 것을 갈망하는 새 사람이 내 안에 생겼으나 악한 것을 행하는 옛 사람이 아직도 내 안에 머무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는데도 오히려 행동으로는 그 율법이 금하는 일을 하고 있음을 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모순된 행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기 안에 옛 사람의 죄적 본성이 얼마나 뿌리 깊게 박혀있는지를 설명할 뿐입니다. 그 죄의 힘이 어찌나 크고 집요한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로 하고자 할 때마다 어김없이 그 흉측한 머리를 다시 들곤 합니다. 

그 끈질긴 규칙성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것을 또 하나의 “법”이라고까지 부른 것입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사도 바울은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라고 하여 그리스도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쟁에 비유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율법을 깨달아 아는 순간부터 영적 전쟁을 치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 안의 새 사람과 옛 사람,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의 공존,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생긴 자신 안의 모순된 모습과 갈등을 체험하고 확인한 그리스도인은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생의 복락에로 부르심을 받고 그것을 갈망하게 되었으면서도 우리 안에 남아있는 육신의 잔재와 죄의 힘이 우리를 영생의 복락에로 나아갈 수 없게 하며 사망 가운데 아직 붙들어두는 이 상태를 부끄러워하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심정을 사도 바울은 본문 24절에서 이렇게 토로하고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곤고하다”는 말의 뜻은 “곤란하고 괴롭다”는 것입니다. 불쌍하다, 가엽다, 불행하다는 뜻입니다. 25절 하반절의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한 말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겪을 수 있는 그런 모순적이고 자기분열적인 상태를 약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다 그런 상태에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망의 몸”이라는 것은 아직 우리에게 남아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어서 우리를 죄와 그로 인한 죽음으로 끌고 갈 “육”을 말합니다. 달리 말하면 육에 붙들려 결국 죄 가운데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한 것은 “아무도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낼 수 없다.”는 말의 수사학적 표현일 수 있습니다. 진실로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그 사망의 몸에서 건져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를 그 사망의 몸에서 건져낼 이가 없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망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런 모순적이고 자기분열적인 상태와 그로 인한 자괴감과 한탄 가운데 내버려두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못하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는 하십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놓으셨습니다. 25절 상반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사도 바울이 24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한 것은 사실 절망의 절규가 아니라 바로 25절 상반절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하는 답을 이끌어내기 위해 던진 물음인 것입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로 옮겨졌지만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한 물음에 답하여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건져내십니다.”라고 답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는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나를 건져내시니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십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율법의 정죄와 곤고한 삶에서 건져냄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죄의 감옥에서 풀려나온 우리가 그 감옥에서 차고 있던 쇠고랑을 그냥 끌고 다녀서는 안 될 것입니다. 너무나 보기 흉할 것입니다. 감옥에서 입고 있던 죄수복을 여전히 걸치고 거리를 활보하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부끄럽고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모습일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요즈음 이 세상은 마치 그들 눈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죄수복 입고 발에 쇠고랑 찬 채로 부끄러움 모르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파렴치한이나 되는 듯 교회를 싸잡아 욕하고 있습니다. 속히 옛 죄수복을 벗어버리고 발의 쇠고랑도 끊어버리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법은 끈질기게 우리를 사로잡으려 하지만 우리는 더욱 단호하게 그 죄의 사슬을 끊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힘만으로는 안 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여 끊으면 끊어질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곧 뒤따를 롬8:1-2에서 사도 바울이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우리 안에 끈질기게 남아있는 죄와 사망의 법이 우리를 쉬지 않고 사로잡더라도 결국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과 싸워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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