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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먹지 말라 한 것이 사실이냐 ? (창 3: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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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지 말라 한 것이 사실이냐 ? (창 3:1-21)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은 바 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을 때 오는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고통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지지 못할 때 필연적으로 오는 것입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처음 에덴동산에는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더 이상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본질적인 관계입니다. 본질적인 관계가 무너지면 모든 것과의 관계는 무너지고 맙니다. 원문대로 하면 사탄은 뱀을 통하여 하와에게 『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한 것이 사실이냐 』라고 했습니다. 

Ⅰ. 사탄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무너뜨 리게 합니다. 

1) 사탄은 뱀을 자신의 목적 성취의 이용물로 삼았습니다.
 
본문 3장 1절에 『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라고 했습니다. 
에덴동산의 뱀은 사탄의 이용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여기 '간교하다'는 말은 좋은 의미에서는 영리하고 신중하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잠언 12장 16절에 『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고 했습니다. 

잠언 22장 3절에 『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아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쁜 의미로는 교활하고 기회주의적인 것을 뜻합니다. 
욥기 5장 12절에 『 하나님은 궤휼한 자의 계교를 파하사 그 손으로 하는 일을 이루지 못하게 하시며 』라고 했습니다.
욥기 15장 5절에 『 네 죄악이 네 입을 가르치나니 네가 간사한 자의 혀를 택하였구나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뱀을 영리하도록 지었는데 그만 사탄의 목적에 의해 그 영리함이 지배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2) 사탄은 뱀을 통하여 하와를 유혹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본문 3장 1절에 『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먹지 말라 하시더냐 』라고 했습니다. 
원문의 번역은 『 …먹지 말라 한 것이 사실이냐 』입니다. 사탄이 뱀을 통하여 하와를 유혹의 대상으로 삼은 것입니다. 이것은 여자가 남자보다 더 연약하고 쉽게 미혹당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7절에 『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시험(probation)과 유혹(temptation)의 차이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시험에는 인간을 성숙시키려는 하나님의 선한 의지가 자리 잡고 있으나, 유혹에는 인간을 타락 시키려는 사탄의 악의(惡意)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뱀은 본래부터 악한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뱀을 모든 들짐승 중 가장 영리한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뱀의 지혜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도 언급하신 바 있습니다(마 10:16). 그러나 불순종과 파괴의 화신인 사탄이 자신의 악한 목적을 달성키 위한 도구로 뱀의 지혜를 사용함으로써 뱀은 유혹자인 사탄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경고는 오늘날 우리들이 지닌 각자의 달란트도 주를 위해 쓰일 때는 생명을 살리는 구원의 도구가 되지만 사탄에게 이용당할 때는 생명을 죽이는 도구가 된다는 교훈을 일깨워줍니다. 

Ⅱ. 사탄은 인간이 하나님을 도전하게 합니다. 

1)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입니다. 

본문 3장 1절에 『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라고 했습니다. 
사탄이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몰랐을 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원문대로 직역하면 『 먹지 말라고 한 것이 사실이냐 』고 한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입니다. 

2) 하나님에 대한 불신행위입니다.

민수기 23장 19절에 『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식언하거나 변개치 않으십니다. 
사무엘상 15장 29절에 『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십니다(약 1:17).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복입니다(신 6:4-9). 

3) 하나님과의 동등됨을 주장하도록 유혹한 것입니다. 

본문 3장 4절에 『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고 했습니다. 
죄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동사(動詞)를 거역하는 것입니다 『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창 2:17)는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당돌하고 파렴치한 사탄의 소리입니다. 『 그것을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될 수가 있다 』고 했습니다. 이렇게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무시해 버립니다. 사탄은 이 시간에도 이 세상의 다양한 부류와 직종의 사람들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자꾸만 멀어지게 하는 소리를 발하기 때문에 항상 조심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4) 하나님의 법을 파괴하게 한 것입니다.
 
본문 3장 6절에 『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고 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 대신에 타락한 인간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사탄에 의해 점령당한 심령은 안목의 정욕에 이끌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거짓되지만 오직 하나님은 참되십니다. 하나님의 법을 파괴한 결과는 불안에 떨고 있는 공포입니다. 

창세기 3장 10절에 『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 『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반대로 사탄은 끝까지 망하게 합니다. 
본문 3장 11-12절에 『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책망을 들은 여자는 또 말하기를 『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3:13)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들의 책임을 전가하는 대화 패턴(pattern)입니다. 자기 자신의 범죄적 행위에 대하여 자신이 책임지기를 싫어하는 도피적 자세가 인간들의 솔직한 한계입니다. 
옛말에 '중호지 필찰언 중악지 필찰언(衆好之 必察焉 衆惡之 必察焉)'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할 때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하고 많은 사람들이 악하다고 할 때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대중적 군중심리를 경계하는 말입니다.

Ⅲ.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의 바른 관계를 선언 하셨습니다. 

본문 3장 7-9절에 『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사탄의 소리에 침노를 당하여 불안과 공포 속에 떨고 있는 아담을 찾아오셨습니다. 벌거벗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한 아담과 하와를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숨어서 떨고 있는 사람을 찾아오셨습니다. 첨예한 과학문명의 눈부신 황금빛으로 치마를 엮어 입지만 여전히 불안에 떨고 있는 인간을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촌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하여 에덴동산 이후로 인간들은 노력을 아끼지 아니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평안이 정착되기는커녕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사람들은 이전보다 왠지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나라마다 가지고 있는 민족주의가 절대 이데올로기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세계평화를 내세우지만 자국의 이익이 우선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한 목적을 가지고 협상 테이블에 앉아 있지만 동상이몽(同床異夢)입니다. 최근에 지구촌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연재해와 그로 인한 사건 사고는 인간들이 생각하고 통제 가능한 사고의 한계를 넘었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아니고는 해석할 방법도 없을 뿐만 아니라 사태를 수습할 실마리를 찾을 수도 없습니다. 인간들의 마음이 강퍅해질 대로 다하여 이른바 양두구육(羊頭狗肉, 양의 머리를 걸어 놓고 개고기를 판다는 뜻으로, 겉보기만 그럴듯하게 보이고 속은 변변하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의 현장에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오늘날 소위 대국들은 타민족의 이민을 통제하면서까지 자기들만의 자연 그대로의 무공해 치마를 만들어 입기에 분주합니다. 그러나 인간 스스로가 만든 심각한 지구촌의 환경과 오염을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자녀들의 장래와 함께 깨어지고 있는 이 지구촌의 앞날을 예지하면서 불안에 떨고 있는 우리를 이 시간에도 하나님은 찾고 계십니다. 

요한계시록 18장 4-5절에 『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고 했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세계에서 1위가 되는 것이 127개나 된다고 합니다. 삼성이니, 현대니 하면서 물질만능의 치마를 엮어 입고 자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장차 닥쳐올 이 땅의 경제적 궁핍을 예언하셨습니다(계 6:5-6). 진정한 의미에서 기갈은 물질의 빈곤이 아닙니다. 

아모스 8장 11절에 『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라고 했습니다.
과학만능의 치마로 유토피아 건설을 꿈꾸지만 인간은 여전히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종류의 치마를 엮어 입고 불안에 떨면서 숨어 있는 인간을 찾아오셨습니다. 모든 위생시설과 수많은 보험제도로 자만의 치마를 입고 있지만 질병 앞에 속수무책인 인간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1) 범죄한 인간을 부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3장 9절에 『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라고 했습니다.

2) 죄를 지적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3장 11절에 『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라고 했습니다. 
본문 3장 13절에 『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라고 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 인간에게는 수고와 고통이 따르고 결국 사망이 온다고 하였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선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3장 15절에 『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희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이것은 범죄한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여인의 후손으로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온다는 것입니다. 
본문 3장 21절에 『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하여 우리의 죄가 가리움을 받는다는 묵시적인 계시적 교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에덴동산에 있었던 격동은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항상 존재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성경에 대하여 비판적인 말로 도전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의심을 품게 합니다. 사탄은 오늘의 주님의 몸된 교회에 대하여 온갖 감언이설로 불신하도록 우리를 유혹합니다. 사탄은 목사의 설교에 대하여 정면으로 도전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목사의 설교를 상대적으로 수용하게 하고 때로는 무시해 버리도록 합니다. 더 나아가 목사의 설교보다 더 좋은 말씀이 있는 것처럼 유혹합니다. 

타락한 인간은 사탄에 의해서 조종을 받는 이용물이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떠난 인간은 온갖 문명과 세상 지식으로 치장해 보지만 결국 벌거숭이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입은 옷은 기껏해야 분명한 한계를 가진 나뭇잎으로 만든 옷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수치를 감추려고 애를 써보지만 속수무책입니다. 그들의 영적 수치는 가릴 수 없습니다. 나뭇잎으로 가린 죄는 가린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짐승을 잡아 가죽 옷을 우리에게 입히셨습니다. 

이사야 52장 1절에 『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61장 3절에 『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라고 했습니다.
스가랴 3장 3-4절에 『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3장 14절에 『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 『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4장 24절에 『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3절에 『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에 『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4-5절에 『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고 했습니다.
구원받은 것을 흰 옷에 비유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8절에 『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 4절에 『 또 보좌에 둘려 이십 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 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고 했습니다. 
구원받은 것을 피에 씻은 옷에 비유했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 14절에 『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신앙의 정조를 지키는 것을 자기 옷을 지키는 것에다 비유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6장 15절에 『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라고 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합니다. 
옷은 그 사람의 인격의 표현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말의 그 첫 번째 의미는 

그리스도로 구원받았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은 구원받은 자의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는 의미입니다. 곧 구원받은 자들은 그리스도화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화라는 말은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몸된 교회화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면 주님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교회운동의 충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자신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몸된 교회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우리의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는 축복도 아울러 베푸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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