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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야 길에서 승리하려면 (출 16: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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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 길에서 승리하려면 (출 16:1-12)


며칠 전에 신문에 신정아씨 인터뷰 기사가 나왔습니다. 예일대 박사라고 학력을 위조해서 대학 교수도 하고 광주비엔날레 예술 감독도 했고, 고위공직자와 스캔들도 있었죠. 4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절망적인 과정들을 쭉 피력을 했습니다. 그렇게 인터뷰를 한참이나하고 맨 마지막에 기자가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신정아씨의 죄가 무엇이었습니까? 도대체 당신이 무슨 죄를 지었나라는 그런 질문을 했습니다. 이 분이 자신의 과오를 함축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해선 안될 사랑을 했고, 돈으로 학위를 사려 했다. 땀 흘려 한걸음씩 가야하는데 잘못된 지름길을 선택했다. 성실하지 못했고 내 인생관이 잘못돼 있었다.” “죽도록 창피했다 죽도록 반성했다… 이제는 살고 싶다. 절박하게!” 

저는 그 인터뷰를 보면서 본인이 말했던 그 잘못된 지름길을 추구했던 그런 인생관이 얼마나 비참하게 되었는가 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마치 저는 그 인터뷰 기사 속에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저처럼 허무한 길을 걷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호소하는 듯한 소리로 들려졌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렇게도 지긋지긋한 430년 간 애굽에서 노예살이 하던 것을 털어버리고 그토록 갈망하던 가나안 땅으로 가던 광야 길에서 불평이 일어났습니다. 3절입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지금 이들이 원망과 불평의 이유는 바로 먹는 문제였습니다. 애굽을 탈출해 이제 한 달 정도 가나안을 향해 가는 도중에 이 광야에서 그들이 들고 나온 양식이 다 떨어져 버렸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20세 이상 된 장정만 60만 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족까지 한다면 적어도 200만 명도 족히 넘을 것입니다. 말이 200만 명이지 얼마나 많은 사람입니까? 그런데 광야생활을 시작하면서 애굽에서 가지고 왔던 양식은 다 떨어지고 없어졌습니다. 그렇다고 광야에서 양식을 구할 수도 없습니다. 이제 먹을 것이 없어 막막하기만 합니다.  여러분! 그 때의 상황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이들은 등 뒤에 업혀서 배고프다고 칭얼거리며 울어댑니다. 

부모들의 손에 이끌려 멋모르고 따라 나온 아이들도 배고프다고 난리입니다. 어디 아이들만 그렇습니까? 배고픈 것은 아이나 어른이나 다 똑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먹을 것이 없어 먹을 것을 달라고 아우성치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말만 듣고 애굽에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기에 그 말씀만 믿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다가는 가나안 땅에 도착하기도 전에 모두 굶어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약속의 땅 -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간다는 희망이 이제는 절망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온 천지에 모래밖에 없는 이 사막에서 사람의 방법으로는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먹는 문제를 도저히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가능성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말도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술렁이기 시작합니다. 여기저기서 불평이 터져 나옵니다.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비난의 소리도 쏟아져 나옵니다. “우리를 이 광야에서 굶겨 죽일 작정이냐?”고 따지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애굽에서 하나님이 내리신 10가지 재앙과 기적을 눈으로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나일강이 피로 물들었고, 하늘에서 우박이 떨어지고, 마지막에는 멀쩡한 장자가 죽어나가는 것을 보았던 자들입니다. 이 공포 속에서도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있었기 때문에 죽음이 통과한 것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그들은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고 그 가운데로 난 길을 걸어서 홍해를 건넜으며, 애굽의 군인들이 그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불기둥, 구름기둥도 보았습니다. 이런 것을 보더라도 아무리 답답하고 내 이성에 동의되지 않는 이유가 있어도 원망하고 불평하고 시비하는 일은 오늘로 끝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한번 택한 내 인생을 결코 놓치지 않는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널부러져 앉아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11-12절에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무슨 말입니까? ‘내가 하나님 아니냐? 내가 너희들 먹여 줄께! 걱정마라!’ 매일 아침에는 떡을 주고, 매일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준다는 겁니다. 그 떡 이름이 뭡니까? 31절 보면 ‘만나’입니다. 만나는 히브리어 ‘만-후’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만-후는 ‘이것이 무엇이냐?’(출16:15)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내려주신 떡을 보고 신기해 하면서 서로 물었습니다. ‘이게 뭐지?’ ‘이게 뭐지?’ 그러다가 그 이름이 ‘만나’가 된 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광야를 통과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농산물을 먹을 때까지 무려 40여 년 간 아침마다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성경을 잘 보면, 그 기간은 정확하게 39년 11개월이나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루도 굶기지 않으셨습니다. 한 마디로 기적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을 보면 이 만나의 축복에는 공식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잘 알고 우리가 헤쳐 나가야 할 이 한해를 보다 값지게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첫 번째는 ‘날마다 거두라’는 것입니다. 이는 탐욕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본문 4절에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나는 매일 매일 그날의 것을 주어다가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귀찮다고 해서 ‘일주일 분을 한꺼번에 거두어다가 놓고 편히 앉아서 먹자.’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거두는 방법을 말하죠? 16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의 식량대로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인수대로 매명에 한 오멜씩 취하되 각 사람이 그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취할지니라 하셨느니라” 여기서 1오멜은 약 2리터에 해당합니다. 한 사람이 먹을 충분한 양입니다. 이 말씀대로 순종하니까 어떤 결과가 나타났나요? 출16:17-18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 전혀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항상 청개구리들이 있기 마련아닙니까? 자기 멋대로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IQ(지능 지수)가 높은 것은 좋은데, 자기 머리만 믿고 재주를 부리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잔머리를 굴리는 겁니다. I자가 조금 비딱해지면 J자가 됩니다. 그래서 JQ(잔머리 지수)라고 합니다. JQ가 높은 사람들은 단기적으로는 반짝반짝 하고 잘 되는 것 같은데, 장기적으로 보면 반드시 망합니다. 19-20절을 보세요.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많이 짊어지고 오느라 고생, 썩은 냄새가 진동해서 고생, 갖다 버리느라 고생, 주위 사람들에게 창피하고, 하나님 앞에 면목 없고... 좋은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보세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인간의 욕망은 끝도 끝도 없습니다. 마치 갈증난 사람이 바닷물을 들이 키듯이 그렇게 탐욕에 젖어 살아갑니다. 요즘 요즘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함바집 사건’을 보세요. 이 ‘함바집 사건’의 핵심 인물은 65세인 유씨입니다. 이번 사건이 커진 이유는 유씨가 관리하고 있는 사람이 천여 명이 넘는다는데 있습니다. 

평범한 고객이 천명이 아니라, 전직 치안 총수를 포함해서 정치인들, 전직 장관, 건설업체 사장, 공기업 사장, 시도지사 등 고위 관리들이 줄줄이 그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의 권력과 힘을 이용해서 자기의 이익을 얻기 위한 욕망에 모두가 걸려든 것이 아닙니까? 며칠 전에는 유씨와 접촉한 적이 있는 사람은 자진 신고하라는 경찰청의 지시에, 전국 총경급 이상 경찰 간부 560여명 가운데 41명이 유씨와 만난 적이 있다고 자진 신고했다고 합니다. 유씨가 가지고 있던 로비 수첩에는 영남권 광역단체장 및 정치인들의 명단이 천여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전국으로 합하면 그 수가 어마어마할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공(功)든 탑이 무너지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말 그런가요? 물론 사람이 성실하게 노력하는 것은 인생의 기본입니다. 또 그러면 인생을 성공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공든 탑도 얼마든지 무너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을 보면 공든 탑들이 여기저기서 무너지는 것을 목격합니다. 높이 올라 간 줄 알았는데, 무참히 추락하는 모습을 보면 “아, 인생이 저럴 수도 있구나!”하고 경악하게 됩니다. 이런 일들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다 보면, 인생에는 좀 더 근본적인 원리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공을 들이되, 정말 잘 들여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무조건 아무렇게나 공을 들인다고 해서 잘 되는 게 결코 아닙니다. 자기는 인생을 잘 사는 줄 알았는데, 심지어 성공한 줄 알았는데, 나중에서야 인생을 망치고 잘못 살았음을 깨닫고 후회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만회할 기회가 있으면 그나마 다행인데, 그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으면 정말 비참한 인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 번째 만나의 법칙은 “아침에 거두라”는 것입니다. 성실함과 순종을 말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 바로 뒤인 21절에 보면 “무리가 아침마다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만나를 거두었는데, 언제 거두었느냐 하면 아침에 일찍이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늦잠을 자서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만나를 거두러 나가면 이미 만나는 뜨거운 햇볕에 녹아내려서 거둘 수가 없습니다. 만나가 내리는 곳은 사막입니다. 사막의 햇볕은 아주 강렬합니다. 그러기에 싱싱한 만나를 얻기 위해서는 아침 뜨거운 햇볕이 내려쬐이기 전에 나가야 합니다. 아침 일찍이 양식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아침에 거두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영의 양식을 얻고 영적으로 튼튼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침 일찍이 만나를 구하지 못한 사람은 그날 굶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적인 생활에서도 만나를 얻기 위해서는 새벽시간을 선용해야 합니다. 여러분, 새벽시간은 하루의 첫 시간입니다. 하루의 첫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서 하루의 삶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처음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 새벽에 신약 성경을 통독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말 날이 춥고 길도 불편한데 많은 분들이 신령한 만나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려고 오는 그 모습은 눈물이 날 정도입니다. 

성경에서 새벽은 아주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시간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세요! 홍해가 언제 갈라졌습니까? 난공불락으로 여겨진 그 여리고 성이 언제 무너졌습니까? 수문 앞 광장에서 일어난 부흥의 시발점이 언제였습니까? 그리고 마리아가 인류 최초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시간이 언제였습니까? 새벽입니다. 여러분, 새벽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능력이 역사하는 시간입니다. 새벽은 하나님께서 능력의 손으로 도우시는 시간입니다. 하루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시는 귀한 시간입니다. 우리 모든 교우님들도 새벽을 깨우며 새벽에 도우시는 주님의 은총을 날마다 체험하며 믿음으로 승리하며 사시는 한 해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세 번째는 ‘안식일 전날에는 갑절을 거두라’는 것입니다. 본문 5절에 보면 “제 육일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예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여섯 번째 날에는 만나를 갑절로 주십니까? 안식일에는 만나를 주시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왜 안식일에는 만나를 주시지 않습니까? 안식일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거룩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안식일 전날인 제 6일에 만나를 갑절로 거두라는 말씀은 제7일인 안식일에는 밖에 나가지 말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온전히 거룩한 날로 지키라는 뜻입니다. 요즘은 주일 개념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우리 교회도 주일에 적게는 120-150명의 교인이 교대로 주일에 안 나오십니다. 물론 이런 저런 사정이 있겠지만, 올해부터는 주일 성수에 최선을 다해 보세요. 

국민일보에 이런 기사가 실렸었습니다. 제주도 서귀포에 벌루닝(Ballooning)이란 열기구가 등장했습니다. 그 열기구는 지름 22m에 달하는 굉장히 큰 것으로, 30명을 태우고 지상 150m까지 올라가서 제주도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주는 관광 상품입니다. 그 열기구 관광을 시작한 사람은 예찬항공개발 대표인 제주법환교회 이종원 집사님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열기구 관광을 시작하면서 한 가지 분명하게 세운 원칙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일성수를 위해서 주일에는 열기구를 운항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일이 되면 제주도에는 평일보다 관광객 수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래서 주일에 열기구를 운항을 하면 10억 원에 이르는 매출실적을 더 올릴 수 있다고 합니다. 10억 원을 더 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종원 집사님은 10억 대신에 주일성수라는 믿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여러분, 10억을 더 벌 수 있는 돈벌이를 포기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10억 대신에 믿음을 선택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결단이 필요합니다. 세상 그 무엇을 준다 해도 주일은 하나님을 위한 날로 구별할 수만 있다면 그 믿음에 하나님께서 복에 복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으로 일한다면 하나님께서 주일에 거둬들이지 못한 몫까지도 반드시 평일에 채워 주실 것입니다. 그게 만나의 법칙이요 만나의 약속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이스라엘의 순종을 테스트하고 연단해 가셨습니다. 4절을 보세요.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또 신8:3 보면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무슨 말씀입니까? 사람이 육신의 떡만 먹고 사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삽니다. 말씀을 듣고 그대로 순종할 때 승리할 수 있다는 겁니다. 
  
신약에 와서 예수님은 이 만나 사건을 해석하시면서 바로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떡을 먹은 자는 하나님의 생명- 바로 영생을 소유한다고 말씀합니다. 그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고 광야 백성을 굶주리지 않도록 인도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셔서 내 안에 머물게 하심으로 내 인생을 가장 아름답게 가장 최선의 길로 이끌어 가시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광야의 연단이 최고의 축복은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게 하는 것입니다.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끈질기게 요구하신 삶은 바로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여전히 주께서 원하시는 우리의 삶의 스타일은 바로 주만 바라보고 사는 삶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광야지만 이 광야에는 숨겨진 축복들이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사막과 황무지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천국에서 맛볼 수 있는 기막힌 비밀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러한 비밀은 아무나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 비밀을 알고 볼 수 있는 자들은 하나님만 바라보는 자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눈을 들어 하늘을 보시기 바랍니다. 나를 보면 비참해질 수밖에 없고, 이웃을 보면 원망을 할 수 밖에 없고, 어두운 현실을 바라보면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 보면 구원의 하나님, 소망의 하나님, 승리의 하나님이 오늘도 ‘신령한 만나인 말씀’으로 내 인생의 등불로 밝혀 주시고, 내 가는 길에 빛으로 내 인생의 여정을 가장 아름답게 이끌어 가시는 기막힌 축복이 있습니다. 나는 우리 교회가 행복한 교회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나만의 축복이 아닌 이 영적으로 어지럽고 부패한 시대에 좀 하나님의 미음을 시원케 해 드리는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신령한 만나인 말씀 붙잡고 시119:105절처럼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이 말씀을 의지하여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애송하는 복음송 중에 「오 신실하신 주」라는 노래가 있죠. 
“하나님 한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부디 이 노랫말이 우리의 신앙 고백이 되기 바랍니다. 입술만의 고백이 아니라 우리 마음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진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광야 같은 인생이지만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늘 평안한 마음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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