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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 영혼의 선한 목자 (요 10: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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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영혼의 선한 목자 (요 10:10-15)


성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목자와 양의 관계에 비유합니다. 이사야서 40장 11절에 보면 “그는 목자 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라고 하였고, 시편 100편 3절에는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찌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라고 했습니다. 

이 같은 표현이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조상 적부터 줄곧 목축을 해 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매우 적절한 비유였음이 분명합니다. 곧 하나님께서 목자가 양무리를 보살피고 보호하시듯이 선민 이스라엘의 보호자와 인도자가 되시며, 이스라엘 백성은 그 같은 하나님의 보살핌 가운데서만 행복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대에 선민 이스라엘은 양을 기르는 목적이 고기를 얻기 위함이라기보다는 털을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목자와 양들은 오랫동안 함께 친밀하게 지냈습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일일이 알 뿐 아니라 저마다의 특성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목축이 이루어진 팔레스틴의 고원지대는 폭이 좁고 좌우에 낭떠러지와 바위로 된 절벽이 많은데다 무슨 울타리를 쳐 둔 것도 아니어서 양들이 아래로 떨어져 다치거나 죽는 일이 자주 생겼습니다. 게다가 사자나 하이에나와 같은 맹수가 양들을 노리고, 도적들이 양을 훔쳐가려고 틈을 엿보기도 합니다. 게다가 양은 타고난 성질이 유순해서 맹수의 공격을 거의 피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양들을 지키기 위해서 밤낮으로 쉬지 않고 감시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선민의 조상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서 고대 사회의 목자들이 어떻게 역할을 수행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에서의 장자권과 장자의 축복을 가로챈 일로 하란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야곱은 외삼촌 집에서 목자 노릇을 했습니다. 드디어 객지생활 20년 만에 그는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우고, 외삼촌이 양털 깎으러 먼 곳에 간 틈을 타서 자기 가솔과 가축 떼를 이끌고 가나안으로 향해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 며칠 후에, 외삼촌 라반이 이 사실을 알고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추격해 왔습니다. 그 때 야곱이 라반을 만나 이같이 항의합니다.

“나의 허물이 무엇입니까? 무슨 죄가 있기에 외삼촌께서 나를 불같이 급히 쫓아오셨습니까? 지금까지 내가 이십 년 동안 장인과 함께 지내오면서 장인의 암양과 암염소 가운데 한 마리라도 낙태한 일이 있었습니까? 나는 장인의 양떼 가운데 숫양 한 마리도 잡아먹은 적이 없습니다. 양이 맹수에게 물려 죽어도 그것을 장인께 가져가지 않고 내가 물어냈습니다. 또한 밤에 도둑을 맞았든지 낮에 도둑을 맞았든지 내가 다 물어냈습니다. 그뿐입니까? 낮에는 더위에 허덕였고 밤에는 추위에 떨면서 제대로 눈도 붙이지 못했습니다.” 

야곱의 말을 통해서 우리는 목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목자가 없으면 양들은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모든 목자가 다 야곱처럼 충실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양들을 아끼지 않는 목자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삯군을 만난 양들은 평소에도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맹수들이 덤벼드는 위기 상황에서는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불행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양들인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목숨까지 버리신 선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으나 무덤에 장사되신 지 삼 일만에 부활하신 승리의 주님으로서 우리의 영혼의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첫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잃어버린 자들을 찾으러 오신 선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 나라는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지만, 종교생활만큼은 대제사장들이 수장으로 있는 산헤드린 공회가 관장했습니다. 유대교의 양대 세력은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였는데, 전자에는 제사장 계급이 속했고, 후자에는 주로 율법에 열심이 특심한 중산층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 두 종파는 종교가 지배하는 유대 사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반면에, 로마 제국을 위해 일하는 세리들이나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자들은 죄인이라고 해서 경멸을 당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세리들이나 죄인들과는 말도 하지 않고 아무 거래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저들과 달랐습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을 거부하지 않고 용납해 주셨습니다. 저들이 말씀을 들으러 오는 것을 허용하고, 때로는 저들이 초대하는 자리에 앉아서 음식을 잡수시고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한번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온 것을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비방하기를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5)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7)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칭 의인들로서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 행하시는 이적을 보면서도 예수님이 하늘로서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리들과 죄인들은 자기들이 불의한 자들인 것을 인정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예수님의 눈에 세리들과 죄인들은 길 잃고 헤매는 한 마리의 양과 같이 주님의 구원의 손길이 절실하게 필요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잃어버린 양들 곧 죄로 인해 영원한 멸망에 처한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마가복음 6장 34절에 보니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주님께서는 길 잃고 방황하는 인생들을 보시면서 목자 없는 양 같이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그런가하면, 길 잃은 양이 목자를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양을 찾아다닙니다. 목자는 무리를 떠난 양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으므로 이곳저곳을 두루 찾고 다녀야 했습니다. 낭떠러지 아래도 내려가 보고 바위 틈 바구니도 찾아보았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맹수에게 물려 간 것은 아닐까 염려하면서 잠시도 쉬지 못하고 찾았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드디어 외딴 곳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양을 발견하자 다가가서 얼싸 안습니다. 즐거워하면서 어깨에 메고 돌아옵니다. 

목자는 너무 기쁜 나머지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나와 함께 즐깁시다. 나의 잃은 양을 찾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천사들과 더불어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저와 성도 여러분이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에도 하늘에서 기쁜 잔치가 열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일입니까!

죄와 허물이 많은 우리가 무엇이기에 그토록 파격적인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일까요? 우리를 대속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니,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저와 성도님들이 이 같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아직도 이 땅에는 길 잃고 방황하는 영혼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지금도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아 구원하시는 일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천년 전에 이 땅에 육체로 계실 때와는 달리 지금은 먼저 믿은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이 일을 행하기를 기뻐하십니다. 

“15)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17)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 16:)고 하셨습니다.

먼저 믿은 우리가 주님의 사신이 되어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목자가 잃은 양을 찾기 위해 온갖 수고를 마다하지 않듯이, 우리도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수고도 기꺼이 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잃어버린 영혼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부어 주시고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능력을 더해 주십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품고 길 잃고 방황하는 영혼들을 찾아 주님의 품에 안기게 하는 전도의 사명을 위해 열과 성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마귀의 손에서 지켜주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서두에서 살펴본 대로, 선한 목자는 도적이나 맹수가 양들을 훔쳐가거나 해치지 못하도록 두 눈을 부릅뜨고 지킵니다. 맹수가 덤비면 막대기로 때려서 물리쳐야 하고, 때로는 물매를 날려서 짐승을 격퇴하기도 합니다. 

다윗 왕은 어려서 목동생활을 했습니다. 한번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전장에 나간 형들을 찾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가보니, 블레셋 진에서 골리앗이라고 하는 키가 3미터나 되는 거인 장수가 나와서 쩌렁쩌렁한 음성으로 이스라엘 군대를 모독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진에서는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고 다들 겁에 질려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다윗은 의분을 참지 못하고 사울 왕에게 나아가서 자기가 나가서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했습니다. 그 때 사울 왕이 다윗에게 말하기를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삼상 17:33)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이 같이 말합니다. 

“34)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35)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 36)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37)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삼상 17:) 

다윗은 일개 목동에 불과했지만, 자기의 양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리하여 사자나 곰이 와서 새끼를 물고 달아나면 기어코 쫓아가서 그것들을 치고 새끼를 구해냈습니다. 사자나 곰이 화가 나서 다윗에게 덤비면 그 수염을 잡고 쳐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다윗 역시 죽기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도적은 마귀를 가리킨 것입니다. 마귀는 양을 도적질하기 위해 은밀히 숨어들어오는 도적과 같습니다. 도적이 오는 목적은 양들을 훔쳐가서 잡아먹거나 남에게 팔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도적이 양을 훔쳐가지 못하도록 밤낮으로 눈을 부릅뜨고 지켜야 했으며, 도적이 양을 훔쳐 달아나면 쫓아가서 도로 빼앗아 왔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마귀가 노리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받은 성도들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지난날 우리는 길 잃고 헤매던 양들이었으나 이제는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보살핌을 받는 양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고 그 음성을 듣고 순종하기만 하면 두 번 다시 길 잃고 헤매는 일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7)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28)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고 하셨습니다. 

나 자신이 예수님의 양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의 양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귀에다 음성을 들려주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을 올바로 믿는 성도들은 언제나 그 마음의 귀로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서, 또는 담임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 말을 알아들으며, 마음에 새겨서 늘 그 말씀이 지시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주님의 능력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며 마땅히 행할 바를 지시해 주십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한 마귀는 절대로 우리를 해할 수 없으며, 그리하여 우리 가운데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양 무리인 우리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신 선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 생명을 더 풍성히 얻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금은보화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명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지상의 생명도 돈을 주고 살 수 없으리만치 고귀한 것이지만,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은 더욱 더 중요합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생명은 기쁨을 동반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심령에는 구원의 기쁨이 늘 샘솟아야 합니다. 그리고 생명은 소망을 동반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생의 소망이 있습니다.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죽어야 하며, 여기에는 빈부귀천, 남녀의 차별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죽음이 종착역이 아니라, 부활과 영생에 대한 복 된 약속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생의 복 됨과 위대함을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세상의 하찮은 것 때문에 믿음을 저버리는 일이 생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보면, 크리스찬이 전도자의 말을 듣고서 자기가 살던 멸망의 도시를 떠나 저 멀리 보이는 좁은 문을 바라보고 달려갑니다. 그 때 이를 본 그의 아내와 자녀들이 크리스찬을 보고서 돌아오라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크리스찬은 손가락으로 귀를 틀어막은 채 계속 뛰어가면서 “생명! 생명! 영원한 생명!” 이라고 소리 지르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고 좁은 문을 향해서 달려갔습니다.

소돔성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하늘에서 내려온 불과 유황에 타기 직전에, 롯과 그의 처와 두 딸이 천사들의 손에 이끌려 성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 때 천사가 말하기를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롯의 처는 중도에서 뒤를 돌아보았다가 심판을 받아 그 자리에서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롯의 처는 멸망당하는 소돔성에서는 구출을 받았지만, 천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뒤를 돌아보았다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주님을 믿다가 중도에서 물질에 대한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주님 곁을 떠나 세상으로 가버린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유혹에 넘어간 것은 생명과 영생에 대한 가치를 올바로 알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영생은 그저 값없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를 값으로 지불하신 결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을 명심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영생의 소망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바쁘게 살아갑니다. 오늘날은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지식과 새로운 상품과 새로운 삶의 방식이 나오기 때문에 사람들은 시대에 뒤쳐지지 않으려고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우리는 솔로몬의 말씀과 같이, 해 아래 새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새 것이 내일이면 헌 것이 된다면, 우리가 매일같이 새 것을 추구하면서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런 것을 새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새 것은 이 세상의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 이르기를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라고 했습니다. 낡아가는 것은 생명의 쇠퇴를 의미합니다. 반면에 생명은 언제나 새로움을 의미합니다. 이 땅의 것들은 아무리 새 것이라고 해도 곧 바로 헌 것이 되고 마는데, 그것은 이 땅의 것은 영원한 생명과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영생을 소유한 사람들이므로 육신은 늙고 쇠퇴해 갈지라도 그 내면은 나날이 새로워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영생을 가진 사람들이므로 언제 어떠한 형편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일시에 불에 타서 사라질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희망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도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사라지지 않으며 더욱 분명해 집니다. 우리 영혼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것처럼 그의 양 무리인 우리가 가진 영생의 희망도 불변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사도 베드로는 말씀하기를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5)고 했습니다. 우리는 길 잃고 헤매는 양처럼 두려움과 절망 가운데 살아가던 지난날의 우리의 모습을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던 당시의 비참했던 실상을 더 깊이 알면 알수록 지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은 구원의 위대함을 더 깊이 알 수 있습니다. 

지난날의 우리의 추악한 실상을 알수록 우리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신뢰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기쁨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요, 그리하여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영혼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심으로 언제나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누리며 생명을 얻되 풍성히 받아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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