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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애통하는 자 (마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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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하는 자 (마 5:4)


여러분, 혹시 ‘까도남’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이 멋있는데, 그 남자가 ‘까도남’이라나 어쨌다나 ... 그 드라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드라마 이야기는 못하겠지만, 유행어에 대해서는 알아봐야 할 것 같아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 보았더니 ‘까도남‘이란, ’까칠하고 도도한 남자‘라는 뜻이었습니다. 

한때 ’꽃처럼 예쁜 남자‘라는 뜻의 ’꽃미남‘이란 말이 많이 나돌더니, ’근육을 만들어 남성적인 느낌‘을 주는 ’짐승남‘이라는 말도 유행을 했습니다. 그러더니 이제는 ’따도남=따뜻한 도시 남자‘, ’따시남=따뜻한 시골 남자‘, ’차도남=차가운 도시 남자‘, ’차시남=차가운 시골 남자‘, ’꼼도남=꼼꼼한 도시 남자‘, 등 나열하자면 끝이 없게 그런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남자 시리즈로 이야기하니까 여자들은 ’우리는 뭐 없나?‘하고 생각들 하시는 것 같은데, 여자들도 있습니다. 몇 년 전, 한 주간지에서 논란이 되기 시작한 말로, ’된장녀(짜증나는 여자, 젠장에서 된장으로의 변화로 불리워짐. 똥과 된장도 구별 못하는 여자)‘라는 말이 있고, 또 ’개똥녀‘라는 말도 있습니다. 지하철에 애완견을 데리고 탔다가 애완견이 똥을 싸는데, 치우지 않고 내렸다고 해서 붙여졌습니다. -

그 말들을 보면서 나는 어떻게 불려졌으면 좋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아무래도 좀 푸근하고 사람다우려면, ’따시남=따뜻한 시골 남자‘이 정감있는 이름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간을 보내며 집회를 참석하고 몇 번의 눈물을 흘리게 되면서, 내가 ‘울보남’이 되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사실 한국 남자들은 울지 않아야 남자답다고 생각하여 참는 것이 보편화되어 왔습니다. 어려서도 남자 아이들은 밖에서 넘어져서 울고 들어오면, 어른들이 “뚝, 남자는 우는 게 아니야”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남자들은 울면 남자답지 못하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남자나 여자나 ‘울보남’, ‘울보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까도남’, ‘따도남’, ‘된장녀’... 다 아닙니다, 우리 모두 ‘울보남’, ‘울보녀’가 되어야 합니다. 옆에 사람하고 인사합시다. “우리 울보남(녀)이 됩시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믿음 좋은 사람들의 차원 높은 영적 울음들에 대해서 나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다윗을 들 수 있습니다. 다윗은 참 눈물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잘못했거나 부족하다고 생각할 때든지, 간절하게 기도할 때라든지, 특별한 때마다 눈물을 흘렸습니다.

(시42:3)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그리고 그 표현도 심하게 뻥튀기해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시6:6)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시119:136)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같이 흐르나이다” 

사도 바울도 눈물이 많았습니다. 
(고후2:4)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 ”, 
(빌3: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 ”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이 말씀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는 사람이요,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애통’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3가지의 애통이 있습니다. 자연적, 세상적, 거룩한 애통입니다. 

1) 자연적 애통 : 사람의 죽음이나 슬픈 일을 당했을 때 자연 법칙에서 오는 애통을 말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야곱도 요셉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통곡을 했습니다.   

2) 세상적 애통 : 세상의 불공평, 억울함, 갈등, 가난, 질병, 등 세상에서 오는 애통입니다.   

3) 거룩한 애통 :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애통, 즉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겪는 애통입니다. 

그렇다면 이 거룩한 애통을 갖고 사는 사람, 오늘 말씀이 말하는 복이 있는 자, 이 애통하는 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1. 나의 죄로 인해 애통하는 사람 일반적으로 평범하게 사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나쁜 일을 하지 않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니까 그런데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더 나아가서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기의 실상을 보게 됩니다. 모든 위선의 껍질을 벗고, 또 자기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 알았던 환상의 세계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무서운 충격을 받게 됩니다. 어떤 한 순간에 지금까지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자랑했던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자기 영혼 앞에서 이런 것들이 참으로 보잘 것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그의 내면의 세계가 폐허인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나는 인생을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왔는가’, ‘무엇을 남겼는가’, ‘내가 지금 당장 죽는다면 과연 하나님께 갈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순간, 그는 인생의 깊은 회의와 절망과 허무감에 빠지는 충격을 느끼게 됩니다. 이때 그는 가슴을 치면서 오로지 자기 안에 있는 것은 죄와 허물뿐이고 기억하기 싫은 과거만이 남아 있다는 것을 느끼고는 조용히 내면에서부터 무너지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울어도 끝이 없고, 옷을 찢고 마음을 찢어도 그 애통함이 끝이 없는 비참한 상태를 애통한 마음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반드시 거듭나는 사람에게 경험되는 애통입니다. 이때 흘리는 눈물은 회개의 눈물입니다. 

저는 중학생일 때, 처음으로 이러한 눈물을 흘렸음. 중등부 예배 때, 담당 전도사님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내 죄를 대신해서 지셨다는 말씀을 하셨고, 이 시간 우리의 죄를 주님 앞에 고백하고 회개하자고 하시며 기도를 시키셨을 때, 어린 시절부터의 죄들이 다 떠올랐습니다. 그때까지 몰랐습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14살 소년이 그때까지 죄를 지었어야 얼마나 지었을까요? 그런데 그때 깨달은 것은 내 마음속에 죄악된 마음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평생 처음으로 눈물, 콧물을 엄청나게 흘리면서 회개했습니다. 그 사건이 저에게 첫 번째 성령체험의 사건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나의 연약함과 죄악성이 깨달아질 때마다 하나님 앞에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나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했습니다.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런데 그런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고 회개하는 자의 죄를 예수님께서 해결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욜2:12)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 나의 죄로 인해 애통하는 사람, 그 사람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2. 이웃의 아픔과 고통을 보면서 애통하는 사람 이웃이 아픔과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애통해하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 이런 사람이 흘리는 눈물은 사랑이 들어있는 사랑의 눈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웃이 당하는 슬픔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시며 애통해 하셨습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셨다는 내용이 3번 나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마르다와 마리아가 슬피 우는 모습을 보면서 함께 눈물을 흘리셨고(요11:35), 멸망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는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눅19:41). 또한 이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로 결정하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기도를 하셨습니다(히5:7). 이러한 주님의 눈물에는 사랑이 깃들어 있습니다. 

시인 윤동주 님의 서시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 일제의 강압에 고통받는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시인이었습니다. 그는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옥사했습니다. 여러분, 나라가 어려울 때에 민족의 지도자들은 조국을 사랑하는 뜨거운 눈물을 쏟으며 애국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언젠가 라디오에서 나오는 가요를 듣고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해바라기’라는 듀엣 가수가 부른 노래인데, ‘사랑으로’라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듣고는 복음송처럼 생각해서 불렀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바람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그러나 솔잎 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우리 타는 가슴 가슴마다 햇살은 다시 떠오르네 / 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그러나 솔잎 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이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흘리는 눈물입니다. 

눈물은 사랑의 계량기입니다. 우리들은 우리 주변에서 울고 있는 울음소리를 얼마나 듣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내 이웃이 어려운 일을 당하고, 슬픈 일을 겪고, 아파할 때, 그들을 향한 눈물이 나옵니까?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함께 울어 주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롬12: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웃의 아픔과 고통을 보면서 애통해 하는 사람이 된다면 복된 사람인 것입니다. 

3. 다른 사람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 애통하는 사람 자기 안에 있는 죄와 허물을 보고 애통해하는 것을 넘어, 다른 사람의 죄까지도 자기의 죄로 알고 대신 애통하는 경지까지 간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이웃의 모든 죄와 허물이 바로 자신의 죄와 허물이라고 생각하고 대신 아파하고 대신 눈물을 흘리며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구원을 받도록 애쓰고 힘쓰는 사람이 됩니다. 

요즘 세상에는 고발자가 많아졌습니다. 신문이나 TV에서 똑똑하고 잘났다고 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나는 잘못과 허물이 없는데 이렇게 된 것은 모두가 다 너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너 때문에 정치가 나빠졌고, 너 때문에 사회가 혼란해졌고, 너 때문에 경제가 파탄에 이르렀고, 그리고 너 때문에 교회가 썩어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나 때문’이라는 소리는 참 듣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가 아닙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흘리며 죽으실 때에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시면서 죽으셨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 인간의 모든 죄악을 인하여 대신 책임을 지시고,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는 수고와 고난을 겪으신 모습이 바로 이러한 애통입니다. 내가 더 다른 사람의 영혼을 사랑해야 하고, 내가 더 섬겨야 하고, 내가 더 사랑을 실천해야 하고, 내가 더 나를 낮추어야 하는 것이 이러한 애통을 가진 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지난 주간에 ‘신년특별집회’를 열고, 강사님으로 ‘반봉혁’ 장로님을 모셨습니다. 지금도 전도 현장을 누비고, 낙도의 소외된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섬기는 장로님의 모습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실, 첫날 저녁과 다음날 새벽 집회시에 간증을 들을 때, 장로님이 눈물을 자주 보이시더라고요. 그래서 그 눈물을 보면서 생각하기를 ‘원래 감정적인 분이신가, 아니면 연기력이 좋으셔서 눈물을 잘 보이시나’했습니다. 그런데 둘째 날 점심시간에 점심식사를 함께 할 때, 식사 중에 한 섬에서 자신을 기다리시다가 돌아가신 할머니 이야기를 하시다가 눈물을 흘리시는 것입니다. 

그 할머니는 낙도선교회의 배가 들어가는 날에는 깨끗하게 치마저고리를 입고 기다리신대요. 그리고 나오는 날에는 선착장까지 나오셔서 배가 눈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고 계신다고 합니다. 반 장로님이 식사 중, 그 할머니가 이 배를 기다리시다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리시는 것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아, 이분이 정말로 이웃을 사랑하며 그들의 고독과 아픔에 애통해하는 분이구나’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또한 수요일 저녁에는 우상숭배와 미신으로 가득 찬 마을인 비래마을을 전도한 이야기, 갖은 핍박과 멸시를 당하면서도, 똥물을 뒤집어 쓰면서도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물러서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간증을 듣고, ‘아, 장로님은 정말로 영혼을 불쌍히 여겨 애통해하는 분이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집회 후, 반 장로님의 ‘두부전도왕’, ‘낙도전도왕’ 책을 읽다가 그 내용들을 보면서 장로님이 눈물 흘리시던 장면들이 떠올랐습니다. 

여러분, 제가 이번 주에 진정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애통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이렇게 애통하는 자에게는 진정한 위로가 하늘에서부터 내려온다고 했습니다. 

(시126:5~6)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애통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의 기쁨과 위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하늘의 보상까지 있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으로’라는 노래에 있는 가사 중, ‘그러나 솔잎 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우리 타는 가슴 가슴마다 햇살은 다시 떠오르네’ 라고 있는데, 이 작사자는 애통 후의 위로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흥미있는 사실은 ‘위로’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파라칼레오’인데, 이 단어는 ‘곁에서 부르다’는 뜻으로 ‘성령’(파라칼레토스)과 동일 어원입니다. 곧 우리가 애통해 하면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오셔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함께 기도해 주시므로 우리의 애통이 평안으로, 근심이 성숙으로, 고난이 선으로 바뀌어 우리가 위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진정 예수 믿음의 행복인 것입니다. 이번 주는 저에게 ‘애통’과 ‘눈물’, 그리고 ‘성령’과 ‘행복’의 상관관계에 대한 큰 깨달음이 있었던 주간이었습니다. 결국 애통도 성령 충만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의 죄로 인해 애통하는 사람, 이웃의 고통과 아픔을 보고 애통하는 사람, 다른 사람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 애통하는 사람, 이와 같이 진정으로 애통하는 자가 되시어 하늘의 기쁨과 위로를 체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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