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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능력 십자가의 진리 (고전 1: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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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능력 십자가의 진리 (고전 1:10-18)
   

작금 우리 한국교회는 가장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이 언론에 그대로 노출되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서울 시내의 대형교회들이 가진 구조적인 문제점으로, 목회자들의 리더십이 땅에 떨어지고 개신교회에 대한 신뢰도가 곤두박질치고 있습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기윤실에서는 2010년 12월 14일에 “2010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이 조사는 리서치 업체인 GH코리아에 의뢰하여 작년 11월 8일-10일까지, 전국 성인 남녀 1000명을 상대로 전화설문조사로 이루어졌습니다.   

한국교회를 신뢰하느냐는 질문에 20%만이 신뢰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것도 매우 신뢰한다와 약간 신뢰한다는 것을 더한 수치입니다.     우리 사회는 성인 6명 중에 1명 정도만 우리 한국교회를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종교별 신뢰도나 호감도에 있어서 우리 한국개신교회는 가톨릭, 불교에 이어 세 번째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뢰도를 물었습니다.  가톨릭(41.4%), 불교(33.5%) 개신교(20.0%)입니다.   종교별 호감도를 물었습니다.  가톨릭(35.5%), 불교 (32.5%), 개신교(22.4%) 신뢰도나 호감도에 있어 3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응답자 중에는 무종교자가 47.0%였는데, 향후에도 종교를 가질 의향이 없다는 사람이 67.0%였으며, 향후 종교를 가질 의향이 있다는 사람 중에는 가톨릭이 14.2%로 가장 높고, 그 다음이 기독교로 10.6%였습니다. 불교는 7.3%,  이러한 통계를 접할 때마다 답답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대한감리교회는 2년 동안 두 파로 나뉘어,  수십 번 법정 싸움을 벌였습니다.  그러다가 사법기관에서 감독을 임명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법원에서는 목회자가 아닌 평신도 변호사를 감독에 임명하여 둘을 하나로 만들어보라고 했습니다.   한 2년 간 두 감독으로 나뉘어 싸우다가 이제는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직무대행에 장로교회 장로이며 변호사 한 분을 임명하여 한국감리교회의 수장의 자리에 앉혀놓았습니다.  사법기관에서는 감리교회는 이미 자정능력이 상실되었다고 보았습니다.  

비목회자요, 장로교회의 장로인 변호사로 감독대행을 맡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법원에서는 백현기 변호사(59세)를 감독회장 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고 감리회관의 감독실로 파견했습니다. 그리고 업무개시일을 정해주었고, 월 500만원의 보수를 감리교회가 부담하도록 재판부에서 결정하였습니다.   백현기장로는 합동측 장로교회인 온마음교회 시무장로님이며, 한양대학에서 교회분쟁과 관련한 민사법적인 문제를 다룬 연구로 법학박사 학위를 받으신 분입니다.  이제 이 분이 감독회장 대행으로 들어가서 전체 감리교회를 묶어 하나의 교회로 만드는 일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감리교회에서는 장로교회의 장로가 감독직무대행으로 발표하던 날, ‘감리교회 치욕의 날’이라, ‘법원이 감리교회를 농락했다’고 격한 반응이 나왔습니다. 이것은 그동안 감리교회가 협상력도 상실하였고, 정치력도 부재함으로 자초한 측면이 강하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반응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감리교회가 하나로 가는 길에 접어들었는데, 우리 국가의 법정에서 극약처방을 내어놓았으니 할 말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 장로교회는 평안합니까?   연일 보도되는 것처럼, 목회자와 목회자들 간의 갈등, 대형교회의 재정집행에 대하여 목회자와 장로들 간의 갈등, 목회자들의 윤리적인 문제가 불거지면서 교회성장에 찬물을 끼얹고 있습니다.  

기윤실에서는 한국교회의 ‘저(低) 신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교회지도자들과 성도들의 언행일치의 삶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통회자복하면서 새로워지고, 우리 주님을 본받아 섬기는 삶을 살고,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는 언행일치로 신뢰를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 목회자들이 먼저 자성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한 고난보다는 자신의 영광을 취하는데 급급하였습니다. 성직자의 삶은 청빈과 순결과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다시는 성직자로 인하여 한국교회가 부패 타락하였다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작금 한국교회는 지독한 감기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감기몸살쯤이야 하고 방치하다보면 치명적인 폐렴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지금 교회는 세속화와 물량화에 물들어 있으며, 신앙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구속은 외면한 채, 세상의 가치를 따라가고 말로는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십자가는 내던지고 산보삼아 골고다로 올라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출세의 발판이 되고, 인기와 명예를 가져다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바울과 고린도교회를 통하여 귀한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내려와 1년 반 동안 복음을 전파하여 고린도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바울은 제2차 선교여행 중에 아테네에서 선교하다가 큰 성과를 보지 못하고 고린도에 내려왔습니다.  

바울은 이곳 고린도에 교회를 설립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바울은 이를 놓고 자신이 예수 공동체를 심었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3:6)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었다고 했습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고전 3:10)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으로 고린도교인들을 낳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고 했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이곳 고린도에 내려와서 두렵고 떨리는 가운데 십자가의 복음을 전파하여 교회를 설립했습니다. 바울은 아테네(아덴)에서 철학자들과 어울려 토론하며 복음을 전하였지만, 이렇다한 성과를 얻지 못하고 고린도에 내려왔습니다.  

그 때의 심정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전2:3에서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 2:3)고 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4-5) 고 했습니다.  

고린도라는 도시에 와서는 오직 십자가의 진리만 전파하려고 했습니다.  고전2:1-2에 잘 나와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교회가 잘 성장하고 있을 때에, 바울은 이제 고린도를 떠나서 에배소에 와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였습니다. 

바울은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유대로 오는데 가이사랴에 상륙하여 교회의 안부를 묻고 자기를 선교사로 파송한 시리아의 안디옥교회로 갔습니다.  

그 후에 고린도교회는 교역자가 부재한 상태에서 힘들게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에배소에서 천거한 아볼로라는 성도가 와서 고린도교회를 맡아 지도하게 되었습니다.   아볼로가 교회를 이끌어갈 때에는 교회가 더욱 부흥 성장하였고, 말씀에 굳게 서게 되었습니다.  아볼로는 언변이 좋았고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었고, 예수에 관하여 열심히 가르치고 있었고, 부리스길라와 아굴라와 교제하면서 하나님의 도에 대하여 정확하게 이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고린도교회는 이미 기독교를 믿다가 외지에서 들어온 이들이 서서히 한 그룹이 형성되면서 자기들은 예수님이 직접 임명하신 베드로 사도를 통하여 말씀을 들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몇몇 사람들은 우리는 바울에게서 직접 말씀을 들은 바울에게 속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볼로를 통하여 은혜를 받고 말씀을 깨달은 사람들은 아볼로에게 속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어디에 속하기는 어디에 속하느냐, 바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라고 중립적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울파는 나는 바울이 최고의 사도라고 생각한다며, 바울로부터 세례를 받았거나 은혜를 받은 사람들로 교회의 터줏대감 노릇하는 오래된 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그동안 이교도였는데, 그 흑암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바울이 증거하는 복음을 듣고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아무도 예수 믿는 사람이 없는 황무지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심은 사도바울에게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오로지 바울만이 진정한 사도라고 주장하는 이들었습니다. 

아볼로파는 나는 아볼로가 최고 실력 있는 사도라고 생각한다는 사람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들 중에는 논리적이고, 실력이 많았고 구약 성경을 영해하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아볼로에게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아볼로만이 성경에 능통한 사도라고 믿는 이들로, 교회에서 새롭게 열심을 내고 중진으로 올라오는 엘리트 교인들이었습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와서 말씀으로 은혜를 끼치고 새신자들을 잘 양육하여 큰 교회를 발전시키신 분이었기에 그를 존경하면서 그 중 어떤 사람들은 아볼로파라고 몰려들었습니다. 

게바파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나는 시므온 베드로, 게바가 예수님이 직접 임명하신 사도요, 교회의 초석이며, 우리는 게바를 통하여 은혜 받은 사람이라고 하여 외지에서 들어온 유대인 중심으로 모여진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베드로가 주장하는 것처럼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파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속한 무리가 아니라, 순수하게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신앙과 생명을 주관하실 분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로,  그리스도가 어찌 나뉠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들은 그리스도로부터 직통 계시와 체험을 강조하는 이들로 보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분쟁은 신학적인 의견을 달리하면서 모여진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영도자를 중심으로 뭉쳐진 집단이었습니다.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라고 하였습니다.  이러다 보면 바울과 그리스도를 동일시할 수도 있는 결과도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적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13)고 지적하였습니다.  

독일의 튀빙겐 학파의 F.C 바울(Baur)은 고린도교회의 분파는 이방인과 유대인간의 대립과 분열로 보고 있습니다.  바울파와 아볼로파가 연합하고, 게바파와 그리스도파가 연합하여 싸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 사람들은 하나의 교회 안에 수많은 분파를 만들고, 교단을 만들고, 헤아릴 수 없이 갈라져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면 하나의 교회를 만들 터인데, 내 안에 “내가 나의 주인”이 되고보니 갈라지고 나뉘게 되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각각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나는” 누구에게 속했다고 말하지만, “나는 ”이라는 말, 즉 내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바울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바울파를 형성하는 것을 보면서 자기가 아주 적은 사람들에게만 세례를 준 것을 감사한다고 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보내신 것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17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들이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다보니 세례를 받는 이들이 생기고 좋은 일꾼들이 형성되지만, 기본적으로는 예수를 증거하는 일에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도를 받아들임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십자가의 도”라고 하였는데, 복음의 다른 이름입니다.  “십자가의 도”라고 했는데, 원문에는 “호 로고스”라고 하여 “십자가의 그 말씀”이라고 해야 합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십자가의 이치”라고 하였고, 새번역에서는 “십자가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로고스라고 하면, 십자가가 가진 교훈, 메시지, 원리를 말합니다.  바로 우리는 그 십자가가 지닌 교훈과 메시지, 십자가의 이치를 가지고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는 어떤 교역자나 사람에 의하여 좌우되는 사람이 아니라, 모두다 십자가의 말씀, 십자가의 진리를 받아들임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시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말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말씀할 때에, 구원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이 시간 십자가의 도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 죄악 세상에서 멸망하는 사람들은 이 십자가의 도리, 십자가의 진리, 십자가의 이치에 대하여 미련한 것으로 보려고 합니다.  불신의 사람들은 세상에서 고상한 삶을 살고, 선한 일을 힘쓰고, 바르게 살면 구원을 받고, 좋은 세상으로 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바르고 착하게 살면 된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십자가의 도리,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다 해결해주신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하면, 이해할 수 없다, 어리석은 것이라, 미련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롬1:16에서도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고 했습니다.  이 복음, 십자가의 복음, 십자가의 이치는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저는 한국교회를 걱정하는 한 사람의 목회자로서 지금까지 믿는 십자가만 말하였고,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여 주었다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는 십자가 나의 십자가를 말하지 않은 잘못을 범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더럽고 추한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냥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받는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외쳤습니다.  물론 쉽게 예수 믿게 하려고 한 설교였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만 외치고 믿으라고 한 것이 십자가의 의미와 그 담겨진 뜻을 반감시키고 있었습니다.  십자가는 항상 예수님이 지신 것이라고 하는 것으로 다 된 줄 알았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으니, 우리는 그 안에서 구원만 누리자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을 말하지 않았고, 자기 십자가 지고 주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능히 주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혹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가 참 제자라고 외쳤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다 그렇게 살지 못하니, 대신 성목사님이나 제발 그렇게 살아주면, 우리는 그것으로 위안을 삼고 성목사님은 우리의 진정한 목자라고 믿겠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내려놓음”이라는 책을 쓰신 몽골국제대학교 교수이시며 선교사이신 이용규박사가 “더 내려놓음”이라는 책에서 ‘반쪽짜리 복음’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삶에 변화가 없고, 교회는 다니지만 능력이 없고, 교회생활이 처음에는 재미가 있었지만, 점차 교회에서 상처받고 실망하면서 힘들어지시는 것은 십자가 복음에 대해 반쪽만 알고 살아가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그는 세례에 대해서도 같은 주장을 합니다.  세례 받을 때에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사실만 알았다면 세례에 대해 반쪽만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례의 온전한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자아가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가 상징하는 의미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의 자아가 죽어도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자아로 태어나야 합니다.  우리 안에 사시는 예수님이 주인이 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더 내려놓음이란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몽골국제대학교에 와서 말씀을 전하다가 이런 질문을 하였답니다.  “지렁이를 밟으면 왜 꿈틀하는지 아세요”라고 했습니다.  그 목사님이 주신 정답이 십자가의 복음을 바로 이해할 수 있게 정곡을 찌르고 있었습니다.  “제대로 밟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밟아 죽여야 하는데, 잘못 밟아서 죽지 않았기 때문에 아파하고 상처받고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주시는 생명과 부활에 참여하려고 하면 반드시 십자가에 죽어야 부활이 오고, 죽음을 경험해야 생명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가 자성해야 합니다.  사분오열되었진 교회, 사회로부터 빈축을 당하는 교회, 순수한 복음이 결여된 교회, 사회에 소망을 주지 못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십자가의 도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도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할 때에 나도 십자가에 못 박았노라고 고백하고 이제는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보다 앞세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 말씀하옵소서. 제가 순종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실 때에, 우리 사회는 우리를 통하여 주님을 바라보게 되고, 주님 앞에 돌아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자신은 비우고 내려놓고, 주님으로 채우시고 주님 예수님이 우리 안에 사시면서 구원의 감격과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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