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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병든 자를 찾으시는 예수님 (마 9: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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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 자를 찾으시는 예수님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2~13) 

I. 본문해설 

본문은 예수님이 마태를 제자로 부르시는 광경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비교적 예수님의 생애 초기에 있었던 이 사건을 상세히 보도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오신 뜻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명백히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태에게 찾아오셨고, 무엇인가 말씀으로 이 사람에게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감동을 주셨기 때문에 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었고, 또 자신의 집에까지 예수님을 모셔서 식사를 하게 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II. 죄인들과 함께 잡수심 

세리는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원성을 많이 사던 직책이었습니다. 이것은 로마시대의 세금 징수제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로마가 식민지를 통치할 때 가장 어려웠던 일은 세금을 징수하는 일과 종교문제였습니다. 이 두 가지 일들을 규제할 때에 그들은 로마 사람들을 통해서 이 일을 하지 않고, 할 수 있으면 그 나라 식민지 원주민 출신 사람 중에서 로마 편에 서는 사람들을 이용해서 이 일들을 규율하였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을 위한 세금 징수는 유대인들 중에서 선발된 사람들이 징수하였습니다. 

당시의 세금 제도는 다소 모호했습니다. 구역을 정해서 로마에서 이 구역에서 이만큼 돈을 걷어서 납부를 해 달라고 그렇게 지시를 하면 그러면 이제 그 사람들이 돈을 거두었고 거기에서 얼마를 남겨서 자신들이 갖든지 간에 로마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러한 세금 제도의 불합리성 때문에 유대인들은 마땅히 내야할 세금 이상의 돈을 늑탈 당하게 되었고, 그래서 이제 이 세리들은 비교적 여유 있는 생활을 하였지만 동족들로부터는 정치적으로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이고, 종교적으로는 동족들을 수탈해 가는 그런 아주 더러운 죄인들이라고 낙인이 찍히게 되어 있습니다. 

A. 병든 자를 찾아오심 

마태가 자기의 집에서 식사를 하는데 함께 밥을 먹는 사람들은 세리와 죄인들이라고 했으니 세리가 따로 있고 죄인이 따로 있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라기보다는 동격을 나타내는 접속사로 보아서 세리 곧 죄인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한 해석일 것입니다. 그들은 동족들로부터 완전히 따돌림을 당하고 아무것도 없는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는 그 사람에게 랍비같이 생긴 분이 다가오셨고, 그에게 신앙적인 감화를 끼쳐주셨고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셨습니다. 마태의 마음이 활짝 열리게 되었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집에 초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집에서 이제 함께 식탁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종교 지도자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해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병든 자를 찾아오신 분이심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두드러진 사역가운데 하나는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시는 신유의 사역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죄인들에게 다가오셔서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시는 가운데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으로 병든 사람들을 고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의 궤적은 그의 마음이 그린 발자취이고, 그의 마음은 그의 영혼의 건강한 바에 따라 달려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병든 자들을 고치시는 육신적 질병의 치료사역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우리의 영혼을 고치기 위해서 오신 영적인 의사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영혼의 질병 상태는 인간으로 온전한 육신의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모든 기능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이런 질병 상태에 있을 때에 마음은 선한 것을 명령해도 듣지 않고, 마음이 선한 것을 명령해도 몸은 악한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절망적인 장애의 상태는 우리의 삶 그 자체를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악하고 잘못된 삶으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내면이 고쳐져 아름다운 영혼을 갖지 않는 한 우리의 삶은 달라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육신의 질병은 종종 의사들이 크게 고쳐주기도 합니다만 영혼의 질병은 의사들이 고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고치실 수 있는 질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병든 자를 위해서 찾아오셨습니다. 세리는 동족들에게 낙인을 찍혀 그들과 함께 밥을 먹을 수도, 함께 마실 수도, 그들과 함께 어울릴 수도 없는 소외된 이웃이었습니다. 이 더럽게 낙인찍힌 죄인들, 그들의 삶의 한복판으로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그들의 허허로운 날들 한복판에 오셔서 하나님의 생명을 그들에게 전해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사람들이 모두 버린 죄인들을 찾아 나서십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신앙의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은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인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감격적으로 체험하고 일평생 그 사랑에 빚진 자로 자처하였던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죄를 용서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건강한 사람들이 아니라 병든 사람들이었고, 이 세상에서 떠받듬을 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버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 마음을 다해서 여러분들에게 권하노니 주님과 함께 한해를 시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B. 제사보다 긍휼을 원하심 

마지막 한 가지는 예수님이 제사보다 긍휼을 원하신다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이 말씀은 사실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구약 호세아서 6장 6절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는 음성이었습니다. 긍휼이라고 번역된 히랍어 단어 ‘엘로스(ἔλεος)’라고 하는 단어는 정확하게 히브리어 ‘헷세드’의 번역입니다. 사람의 좋은 이점 때문에 자기에게 이익이 돼서 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헷세드’는 그 사랑을 베푸는 하나님이나 사람 속에 있는 성향 때문에 자연스럽게 솟아 나와서 가치 없고, 비천한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언약적 사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헷세드’의 사랑이었습니다. 

종교 지도자 바리새인들은 제사가 이 사랑보다 훨씬 더 큰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사를 하나님 앞에 향기롭게 올라가게 만드는 그것이 이렇게 ‘헷세드’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헷세드’로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입고 그 사랑에 감격함으로써 사람들을 그 ‘헷세드’로 사랑해서 하나님과 자신과 이웃 모두가 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교통하게 하는 이것이 제사를 주신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를 이 ‘헷세드’보다도 더 높게 생각하는 것은 목적과 수단을 전도하는 것이요, 본말을 바꾸는 것이라고 믿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예배와 종교 생활 속에 깃들여야할 가장 근본적인 사랑의 정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이 놀라운 엘로스의 사랑,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 그 사랑이 넘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그 마음으로 이웃을 향해 사랑을 베풀고 그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는 이 헷세드의 사랑으로 우리 모든 인류가 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이상인 줄을 아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친히 그 모본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뒤집어 놓은 신앙의 도리를 예수님이 바로 잡으시면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모두 버린 이 세리들 한복판에 다가가셔서 불결하기 짝이 없는 그들과 함께 가족처럼 먹고 마시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를 보내신 가슴 저민 사랑을 증거해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주님 앞에 나아와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고 갑니다만 마음이 없는 일만 번의 예배보다는 마음에 있는 단 한 번의 예배가 여러분들의 인생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안타까운 마음으로 여러분들에게 눈물로 호소합니다. 형식적인 신앙은 영혼을 죽이는 것입니다. 단 한마디의 기도라도 영혼의 울림이 있어야 합니다. 단 한 번의 예배라도 마음의 통곡이 있어야 합니다. 단 한 번의 찬양이라고 심중 뼈 사이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이 묻어있는 가락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식과 위선 속에 일주일을 살다가 다시 그 위선과 거짓 속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무 소망이 없는 바리새인과 같은 인간들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III.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 

아들이 영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들이 고난을 당하게 하시면서라도 우리같이 소망 없는 병든 죄인들을 당신께 다시 부르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으니 우리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의 이 불붙는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서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에 눈물처럼 흐르는 이 긍휼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긍휼을 입어서 아무 가치 없는 죄인이 이 분에 넘치는 긍휼을 입었은즉, 예전에 하나님 앞에 섰던 우리처럼 불쌍한 영혼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하고 사랑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그리고 주님이 주신 모든 자원의 최종적인 소비처가 아니라 그것들을 유통시키는 자들이 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IV. 결론 

오늘도 주님께서는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버림받은 자들 중에 몇이라도 구하시려고 그들을 위해 자기의 옥채를 깨뜨리시고 자기의 거룩한 성혈을 흘려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집 나간 자들, 당신을 멀리 떠나 아무 희망이 없이 버려져 방황하는 사람들을 오늘도 부르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우리를 버려도 변함없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사랑하시는 한 분이 있으니 그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주님의 이 사랑이 오늘 여러분들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시니 공허하게 살았던 날들에 못을 박고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주님과 함께 이 세상의 파도를 이기며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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