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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뜻을 따라 … 함께 (창 6:9-12)

첨부 1


… 뜻을 따라 … 함께 (창 6:9-12)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9)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10)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11)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12)
<창세기 6장 9~12절>

할렐루야! 
추우세요? 견딜만 하시지요?
지난 월요일 러시아 쌍뜨 뻬쩨르부르그에서 선교사로 일하는 
김 신 선교사에게 이메일이 왔습니다.
“영하 30도가 계속 되더니 요즘 평균이 영하 20도”랍니다.
그런데 편지 보내는 날은 “무척 따뜻했”답니다.
그곳은 영하 15도가 아주 따뜻한 날이라고 합니다. 
옆의 분에게 “오늘은 아주 따뜻한 날입니다.”라고 인사합니다.
마음먹기에 달린 것 같습니다.
따뜻하다는 생각을 가지면 따뜻함을 느껴집니다.

젊어지기 위해 운동하고 예뻐지기 위해 여러 가지 화장품을 바르지만
영적인 삶을 위해, 영적인 젊음과 생기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하시는지요?
하나님과 동행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예배’입니다.
예배에 승리해야 동행에 실패하지 않습니다.
‘예배’에 실패하면 하나님과 동행자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예배’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패한 시대, 의로운 노아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매일매일“좋았더라 …”고 하셨습니다.(창 1:10,12,18,21,25)
우리들도 날마다의 삶을 통해 열심히 살고, 
‘참 좋았다, 오늘 참 감사한 날이었다’라고 
간증할 수 있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좋다고 하셨지만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사람들이 변하자 
세상을 보는 하나님의 생각이 달라지셨습니다.
창세기 6장 6절과 7절에 보면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창6:6~7)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셨다 했고 심지어 
사람을 지면에서 쓸어버리겠다고 까지 하셨습니다.(창 6:6~7)
그 이유는 사람이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창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그런 시절에 노아가 살았습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노아가 살던 시대를
“…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 …”(창 6:11)
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 땅이 부패하였으니 … 모든 혈육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창 6:12) 고 했습니다.

세상이 부패했고, 사람들이 부패했으며 폭력이 넘쳤습니다.
그렇게 부패하고 타락한 시대였지만 
한 사람, 노아에 대한 설명은 달랐습니다.

“…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창 6:9)

노아라는 이름에는‘휴식’, 혹은 ‘위로’라는 뜻이 있습니다.
182세에 노아를 낳은 노아의 아버지 라멕은 
땅에서 수고롭게 일하는 자들을 편안하게 하고 위로하리라는 뜻에서
그 아들의 이름을 ‘노아’라 하였습니다. (창 5:29)
『비전 성경 사전』(서울; 두란노, 2006), pp.118~119. 참조

그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습니다.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런 노아에 대해 성경엔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노아가 …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창 6:22, 7:5, 7:9, 7:16)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노아는
주변 상황에 휩쓸려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을 때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고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 복잡하고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 사는 우리들은
어떻게 살고 있고,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요?
모든 사람들이 다 곁길로 갈 때 바른 길로 갈 수 있을까?
다른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하고, 말을 하든지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각대로 갈 수 있습니까?

동행 - 세상과 구별되는 삶

‘3의 법칙’이라는 것을 들어보셨습니까?
하나, 둘에는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데 
셋 이상 숫자가 많아지면 사람들이 영향을 받는다고 합니다.

하루에도 수 만 명이 지나다니는 
서울 강남의 한 횡단보도에서 실험을 해보았습니다.
횡단보도를 건너던 한 남자가 중앙선 부근에서 걸음을 멈추고
멀리 빌딩 꼭대기에 뭐가 있는 것처럼
이마에 손을 대고 고개를 들어 쳐다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곁에서 길을 건너던 사람들은
아무도 그 사람을 신경쓰지 않습니다.

다음에는 두 사람이 함께 길을 건너다가 동일한 행동을 해보았습니다.
이번에도 주변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고 
빌딩 꼭대기를 쳐다보던 두 사람을 무관심하게 비껴갔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행동을 세 사람이 했을 때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세 명의 남자가 길을 건너다 말고
걸음을 멈춘 채 서로 수군거리면서 빌딩 꼭대기를 쳐다보니까
함께 길을 건너던 수십 명의 사람들도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세 남자와 같은 방향을 쳐다보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받는 것이 사람입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주변 상황’ 앞에서 약해지기 마련입니다.
남들이 다 오른쪽으로 가는데 혼자 왼쪽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 신앙 생활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일터에서 주일을 지키며 
직장 생활 하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 교회 가는 것을 반대하는 가족들과 함께 살면서
최선을 다 해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 …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가 정말 이렇게까지 하면서 하나님을 믿어야 하나’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직장에서 …, 가정에서 … 하나님 모르는 사람들 틈에 끼여 살면서
하나님 마음에 드는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 …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잘해야 합니다.

노아는 그런 어려운 환경에서, 주변상황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랐기에 택함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마음에 합한 동행의 삶을 살자고 했습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하자고 하는 것이고
쉽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입니다.

동행 - 하나님을 전하는 삶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며 살았던 노아는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방주는 앞뒤가 없는 큰 배를 말합니다. 물에 떠 있기만 하는 배입니다.)

창세기 6장 15절 말씀에 따르면 방주는 길이 삼백 규빗에 너비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으로 지으라고 했습니다.
(규빗 - 사람의 팔꿈치부터 가운데 손가락 끝까지의 길이)
길이 135m, 폭 22m, 높이 13미터로 노아가 만들었던 방주는
농구장 20개를 나란히 두 줄로 붙여 10개씩 배열한 규모였습니다.
<목회와 신학 편집부, 『창세기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서울; 두란노, 2008), pp.221~225. 참조>

지난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서울 건국대학교 옆에 있는 
성락성결교회(지형은목사)에서 부흥회를 인도했습니다.
그 교회에 도착해서 보고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새로 건축한 교회가 만평이나 된다고 하더군요.
우리 교회는 3000평인데, 만평이니 얼마나 큽니까?

1500평 땅에 지은 10,000평 건물을 보고도 놀랐는데 …
그에 비하면 방주는 어마어마하게 큰 것이지요.
그 거대한 방주를 짓는 데는 120년이 걸렸습니다.

성경에는 노아가 살던 곳이 바닷가라는 기록이 없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을 무렵에는 홍수를 염려할 만큼 비가 많이 오지도 않았습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배를 만들 이유가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노아와 그 가족들이 큰 방주를 짓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때 의로운 사람이었던 노아는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계획과 심판에 대해 말해 주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뭐하러 큰 배를 짓느냐’고 물었을 때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주었을 것입니다.

배가 완성되었을 때 각종 동물을 배에 태웠습니다.
그때 사람들에게도 방주에 함께 탈 것을 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홍수 심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 …”(벧후 2:5) 습니다.

노아는 “의를 전파하는 자”였습니다. (벧전 2:5)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드러냈던 사람이었습니다.
노아는 120년 동안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했습니다.
노아의 그런 순종은
세상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전해주는 사역이었습니다.

노아가 배를 짓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임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이었습니다.
노아는 하루 이틀도 아니고 120년 동안 그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행하셨던 행적과 말씀들이
신약 성경 4복음서(마태/마가/누가/요한복음)에 담겨 있습니다.
각 복음서는 담고 있는 내용들이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마지막 부분의 결론은‘세상에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마 28:19~20, 막 16:15, 눅 24:46~47, 요 21:15~17)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복음 전파는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반드시 지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 방주를 준비했던 노아처럼 …
아무런 신호도, 보증도 없었지만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삶으로 증거했던 노아처럼 …
우리들도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의를 전파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 24:37)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그 날도 노아 때 홍수가 시작되었던 것처럼 
어느 날, 생각지 않은 때에 다가올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그 날까지도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을 것처럼 먹고 마시고 결혼하고 살았던 것처럼
지금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일상 가운데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일 / 복음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면서
끊임없이 세상을 향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자고
방주에 들어오라고 외쳐야 합니다.

물론 세상은 우리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를 비웃을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기에 부끄러운 일들이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교회가/목회자가 … 부끄러운 뉴스에 주인공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빛 되고 소금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고/복음전하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역사 속의 기독교는 언제나 핍박과 멸시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땅굴 속에서 신앙생활 해야 했고 짐승의 밥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복음은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달되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지금까지 들었던 
교회와 목회자,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수많은 비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앞으로도 계속 듣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믿음을 잡아 흔드는 사건, 소식들이 계속 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고전15:58)
여러분, 어떤 일이 있어도 믿음을 잘 지키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뜻을 따라 … 함께

노아는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었고
완전한(NIV - blameless,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노아의 의로움은 하나님의 말씀 /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던 믿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순종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드러냈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며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을 전해야 하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모습이 바로 노아의 모습입니다.
과학적인 증거를 요구하고 합당한 이유를 묻는 이 시대에
믿음과 순종을 외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 정확히 표현해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외면하던 시대에 믿고 순종하며 
하나님과 동행했던 의인 노아와 그 가족들은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도 주변 환경과 조건에 흔들리기보다
동행하시는 하나님만 바라보는 우직함, 답답해 보일 만큼의 순종이 필요합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뜻이 통해야 합니다.
아모스 3장 3절에 보면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암 3:3) 라고 했습니다.

본문 창세기 6장 9절을 쉬운성경으로 보면
“… 노아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과 함께 살았습니다”(창6:9)라고 했습니다.
“뜻을 따라 … 함께”사는 것이 동행입니다.
한 가지 뜻을 정하고 뜻을 따라 같이 사는 것, 
같이 가고, 같이 걷는 것이 동행입니다.
그런데 매 순간순간 동행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10년이 넘은 사건인데 
지금까지도 제가 그 일 때문에 시달림을 당하는 일이 있습니다.
2000년도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빌리그래함 목사님이 주최하는 집회가 있었습니다. 
그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몇몇 목사님과 동행했습니다.
이태리에 가서 기차를 타고 스위스를 들려 
암스테르담에 가자고 하여 먼저 이태리에 도착했습니다.

로마에서 밀라노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 이 것 저 것 둘러본 후에 
스위스 제네바로 가는 기차를 타러 기차역에 갔습니다.
분당의 목사님이 함께 갔던 목사님 중에 
자기가 제일 막내라고 기차표를 사오겠다고 하고 매표소에 다녀왔습니다.
기차표를 받아든 우리 일행은 
제네바행 기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들어가서 기차를 탔습니다.

그런데 저는 ‘남이 한 일을 잘 못 믿어서인지 …’
뭐든지 제가 다시 한번 확인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여러차례
기차가 제네바로 가는 것이 맞는지 확인했는데 모두 맞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기차 요금이 너무 쌌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네바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물었습니다.
스위스 제네바까지 가려면 한참 가야 하는데 
대답하는 사람마다 금방 간다는 것입니다.
저는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이 기차가 스위스 제네바로 가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기차는 이태리 제노바로 가는 기차라는 것입니다.
그 순간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 

저는 급한 마음에 일행에게 가서 ‘이거 아니래. 내려’라고 
소리치고는 제 가방을 챙겨 뛰어 내렸습니다. 
그런데 제가 뛰어내리고 보니 저 혼자 내려습니다.

제 아내와 다른 일행들은 기차 안에서 허둥지둥 짐을 챙기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겨우 겨우 모두 내렸습니다. 

다른 목사님들이 제 아내에게 
‘아직도 살날이 많으니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한마디씩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하튼 김병삼목사님께 어찌 된 일인지 물어봤더니 
외국이니까 혀를 좀 굴려서‘제느바’라고 했는데
표 파는 사람은 이태리 제노바로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그때 이후 지금까지도 그때 그 사건 때문에 시달림을 당합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동일하게 동행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어떤 때든지/무슨 일을 만나든지 변함없이 동행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 그때 일을 다시 생각해봐도 …
왜 제 가방만 들고 혼자 뛰어내렸는지 모르겠습니다.
급하다니까 무조건 뛴 것입니다.
여러분은 웃지만 여러분도 급한 일에 처하면 
동행자에 대한 생각 없이 자기 자신만 생각할 것입니다.

모든 순간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 어려운 일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어떤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려면 매 순간순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
매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여 아쉬움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6세기 유럽의 수도사였던 
알로이시오(Aloysius Gonzaga, 1568~1591) 가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어느 날 휴식시간에 모든 학생들이 즐겁게 놀다가
잠시 스승과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이때 스승이 질문을 했습니다.
“혹시 지금 당장 세상의 종말을 당하게 된다면 
자네들은 각자가 어떻게 무슨 일을 하겠는가?”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떤 학생은 빨리 교회에 달려가서 기도를 하겠다고 했고
어떤 학생은 집에 가서 부모님과 함께 종말을 맞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알로이시오는 자기 차례가 돌아오자 주저하지 않고
“지금은 휴식시간이니까, 이대로 놀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어떤 순간, 어떤 상황을 맞든지 지금 그대로 맞겠다는 표현입니다.
그만큼 자신의 일에 충실했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매 순간순간 하나님과 동행하십니까?
자신있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가정에서 … 학교와 일터에서 …
하나님 때문에 힘이 들고 하나님 때문에 뒤처지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임을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부패한 시대에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듯이
척박한 믿음의 땅에서 하나님을 고집하고, 
하나님을 전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삶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때 무슨 일을 하든지 / 무슨 일을 만나든지 /
아무리 급해도 순간순간 주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다고 하지만
내 앞에 급한 일이 있을 때, 내 앞에 당황스러운 일이 있을 때
내 앞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내 앞에 손해 볼만한 일이 있을 때
그런 때에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인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황스러운 일을 앞에 두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인지
아는 사람에게 먼저 전화를 하는 사람인지
우리들 자신을 돌아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급하다는 이유로, 당황스럽다는 이유로, 
불의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하나님과의 동행을 외면하고 혼자 뛴 적은 없는지
우리들 스스로를 돌아보고 노아와 같이 말씀에 순종하며
동행하는 자로 승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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