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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벨의 제사 (히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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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의 제사 (히 11:1-4)
  

사람이 무엇이든 잘 하려면 기초가 든든해야 합니다. 공부하는 학생이 기초가 부실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성적을 올리기 어렵습니다. 음악을 하는 사람도 운동을 하는 사람도, 어느 분야에서 무엇을 하든 다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 신문에서 프로 야구 이승엽 선수의 기사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국민타자’라는 별명이 붙은 대선수지만, 최근 부진한 가운데 소속 팀을 옮겼죠. 일본 요미우리에서 오릭스로 이적했습니다. 

새로운 시즌을 앞두고 1월말까지 국내에서 훈련을 한다고 하는데, 무슨 훈련을 하나 보니까, 한 가지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뭘까요? 배팅 연습입니다. 아무리 대선수라도 기초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야구를 처음 시작하는 초등학생도, 화려한 경력의 대선수도, 야구가 잘 될 때에도 잘 안 될 때에도 항상 신경 쓰는 게 바로 기초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초가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의 기초가 뭘까요? 예배입니다. 신앙생활 처음부터 천국 갈 때까지, 아니 천국에서도 영원토록 할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런데 예배는 신앙의 기초일 뿐만 아니라, 신앙의 종합입니다. 어떤 사람의 신앙 상태를 진단하려면 예배 태도를 보면 됩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신앙생활의 알파와 오메가요, 기초이며 완성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게 바로 예배인 것입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우리 인생이 예배에 좌우된다는 사실입니다. 예배에서 성공하면 인생에도 성공합니다. 예배에서 실패하면 인생에서도 실패합니다. 이것은 성경의 원리이며, 많은 사람들의 사례를 통해 검증된 사실입니다. 제가 노숙한 목사가 아니라 외람된 말씀인지 모르지만, 23년차 목사로 목회 경험 상 확언할 수 있는 것은 예배 태도가 좋은 분들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막 시작하는 분들은 물론이고, 신앙의 연조가 오래된 분들도 수시로 자신의 예배 태도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부지불식간에 기본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습관이 굳어질 때도 있고, 매너리즘에 빠져서 형식은 갖추고 있지만 생동감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해 첫 달을 넘기기 전에 저와 여러분의 예배 태도를 각자 점검해 보면 좋겠습니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한 번 우리의 예배를 가다듬어 예배의 승리자, 그래서 인생의 승리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히브리 11장은 흔히 ‘믿음’ 장이라 부르죠. 믿음이 어떤 것인지 1절~3절에 설명한 후 4절부터 믿음의 사람들을 죽 언급합니다. 말하자면 히브리 11장은 ‘천국 명예의 전당’이라 표현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이름이 실린 사람은 정말 대단한 신앙의 인물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흠모하며 따라갈 신앙의 모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첫 이름으로 누가 등장합니까? 아벨! 

4절.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아벨의 이야기는 창세기 4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별 게 없죠. 아벨의 제사 이야기 한 건입니다. 그런데 히브리 11장 첫머리에 아벨의 제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제사가 그의 생애 전체를 대표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예배 한 번 잘 드리고 순교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그의 이름을 크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얼핏 생각해 보면 이게 뭐야?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예배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성경에 이름이 실렸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특히 히브리 11장에 이름이 올라간 것은 정말, 정말 대단한 겁니다. 비교해서 말씀드리면 백과사전에 이름 실리는 것보다 더 대단한 것입니다. 백과사전에 올라가는 게 사실 얼마나 대단한 겁니까? 그런데 성경에, 그것도 히브리 11장에 이름이 올라간 것은 백과사전에 이름이 실린 것과 비교할 수 없이 대단한 것입니다. 특히 천국에서 영원히 빛나는 인생입니다. 인생이 이생으로 끝난다면 아벨의 생애를 안타깝게만 여길 수 있겠죠. 그러나 영원한 내세 천국까지 고려하면 아벨은 실로 아름답고 위대한 인생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벨은 예배의 대가요 인생의 승리자였습니다. 우리가 그의 예배를 배울 수 있다면, 우리도 인생의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축복하시고 존귀케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1] 아벨이 드린 ‘더 나은 제사’ : 참 예배  

아벨의 예배는 ‘더 나은 제사’였습니다. 이 표현은 비교 우위의 의미가 아닙니다. 가인의 제사와 비교해서 조금 낫다는 뜻이 아닙니다. 절대 우위의 뜻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가인의 제사와 비교할 수 없는 온전한 제사 즉 참 예배라는 겁니다.   

창4:1~15에 기록된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를 비교해 보시죠. 가인은 농부였고, 아벨은 목자였습니다. 그들이 그 소산물로 각각 제사를 드렸습니다. 창4:3~5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 ”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기쁘게 받으셨는데, 가인의 제사를 거부하셨습니다. 극명한 대조입니다. 예배의 성패는 그들의 운명조차 갈라놓았습니다.  

[2] 참 예배의 요소 : 속죄의 피, 정성, 인격과 삶  

아벨의 제사에는 3가지 요소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습니다. 반면에 가인의 제사에는 이 3가지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이 3가지 요소가 들어 있는 예배가 참 예배입니다.   

① 속죄의 피(십자가 은혜) :  

성경을 읽을 때, 유의 사항 중 하나는 앞뒤의 문맥을 살피는 것입니다. 창세기 4장만 보면 가인의 제사를 하나님이 거부하신 게 좀 이상합니다. 반감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아니, 가인도 제 깐에는 제사를 드린다고 한 건데, 하나님이 너무하신 거 아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앞에 창세기 3장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타락한 후 하나님께서 인류 구원의 계획을 선포하셨습니다.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자의 후손’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 사탄의 권세를 파하시고 인간의 죄와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게 바로 복음이죠. 그래서 이 구절을 가리켜 최초의 복음이란 뜻으로 원시복음(原始福音)이라 부르죠.   

이 말씀을 받은 아담이 자기 아내 이름을 하와라 명명합니다. 일종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러자 또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죠? 창3:20~21 “20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아담과 여자가 범죄한 후 수치를 가리기 위해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해 입었었죠. 그런데 가릴 수 없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이 가죽옷을 입혀 주었습니다. 죄를 가려준 것이죠. 속죄는 죄를 가려주는 겁니다. 가죽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죄없는 짐승이 대신 피흘려 죽어야 합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 대속의 원이입니다.   

아마 아담이 가인과 아벨에게 이런 사실을 가르쳐 주었을 겁니다. 그 가르침대로 따르느냐 안 따르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믿음의 유무입니다. 믿음이 없는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실 수는 없죠. 당연한 겁니다. 가인에게 믿음이 있었다면 얼마든지 교환을 통해서 양을 제물로 바칠 수 있었을 겁니다. 육식을 하지 않던 시대라 오히려 교환 조건이 유리했을 겁니다. 그러므로 반감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죽옷은 대속의 복음입니다. 십자가 예고편입니다. 레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피는 생명이고,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대속의 피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짐승의 피는 예고편에 불과하고, 진짜 속죄를 위해서는 ‘죄 없는 인간’으로 오신 예수의 피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피를 믿을 때 비로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히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성소는 하나님 앞입니다. 죄인은 감히 하나님을 볼 수도 그 앞에 나아갈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면 즉사합니다. 그런데 십자가 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할 때 가장 중요한 게 무엇입니까? 십자가 앞에 나 자신을 살펴보면서 회개하는 마음을 가지는 겁니다. 

시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통회하는 마음, 십자가 의지하는 마음이 그 어느 것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물입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은혜가 없는 예배는 죽은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지 않습니다. 아무리 겉보기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화려한 프로그램이 갖춰져 있어도 그 예배를 받으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 가운데, 찬양 가운데 십자가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 깔려 있어야 합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의 예배 가운데 통회하는 마음과 십자가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 
  

② 정성(진실한 마음) :  

아벨의 제사에는 정성 즉 진실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첫 새끼와 기름을 드렸는데, 제일 좋은 것을 드렸다는 말입니다. 제물 가운데 그의 진실한 마음 간절한 마음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제물 그 자체보다 그 속에 담긴 마음을 보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원하십니다. 잠23:26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 ” 물론 예배의 형식도 중요하죠. 그러나 그 속에 담긴 마음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음의 주고받음이 중요하죠.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도 만일 마음의 주고받음이 결여되어 있다면 남남과도 같을 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도 예배도 하나님과 마음을 주고받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왜 책망을 받았습니까? 그들에게 예배가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배가 있었지만 마음이 담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15:7~8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사29:13 인용)
  
그래서 시편 기자가 예배는 무엇으로 드린다고 했습니까? 시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 ” 우리의 기도에도 감사, 찬송에도 감사, 헌금에도 감사, ... 예배의 한 순간마다 감사가 포함될 때 그 예배는 살아있는 예배가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충만히 임재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도 기쁨이 충만해 집니다.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없습니다. 천국은 지극한 복이 넘치는 곳인데, 그 이유는 바로 항상 예배가 있기 때문입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의 예배에 정성이 감사가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
  

③ 인격과 삶(선한 사람) :   

아벨의 제사에는 인격과 삶이 겸비되어 있었습니다. 창세가 4장을 잘 관찰해 보면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창4:4~5 “4 ...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 ”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 제물’을 받으셨습니다. 제물도 중요하지만, 아벨 자신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최고의 예물은 예배자 자신입니다. 가인의 제사가 왜 거부당했습니까? 피가 없는 제물이라서 그렇기도 했지만, 정성이 없어서 그렇기도 했지만, 또 한 가지 가인의 인격과 사람 자체가 사악했기 때문입니다. 

창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심통을 부리자,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의 속에 웅크리고 있는 죄를 지적하십니다. 결국 그 죄를 다스리지 못한 가인이 아벨을 살인하는 죄악까지 저지릅니다.   

예배는 공식적인 예배 시간도 중요하고 모든 순서가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삼상15:22~23 “22 ...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 ” 불순종하면 제사 무효이고, 더 나아가 우상 제사나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배 시간 중에도 말씀을 경청하는 시간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전5:1 “너는 하나님 앞으로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여러분, 구약 이스라엘이 수도 없이 하나님께 책망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1:12~15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 14 ...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피묻은 손은 이스라엘의 악한 삶을 가리킵니다. 악한 삶을 버리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 그들의 예배를 받지 않으시겠다는 겁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마5:23~24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인간관계에서 문제가 있으면, 그 예배는 무효라는 겁니다. 먼저 풀고 오라는 겁니다. 심지어 헌금을 많이 해도 삶이 부정하면 무효라는 겁니다. 

마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그러므로 공식적인 예배를 드리기 전에 우리의 삶 속에서 선한 인격과 선행이 있어야 합니다. 히13: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그래서 바울이 우리의 삶이 곧 예배라고 증거합니다. 

롬12:1~2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선한 뜻대로 사는 나 자신이 예물이라는 겁니다. 이를 흔히 ‘생활예배’라고 하죠. 공예배보다 중요한 게 생활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양쪽을 다 보시는 분입니다. 공예배의 모습과 생활의 모습이 다른 이중생활은 절대로 안 된다는 겁니다. 신행일치(信行一致), 예행일치(禮行一致)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공예배의 현장에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월요일에도, 화요일에도, 수요일에도, ... 날마다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순간순간, 때마다 일마다 우리를 지켜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 순간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즘은 하도 세태가 신앙에 나태해져서 ‘선데이 크리스천’(Sunday Christian)도 쉽지 않지만, 성경은 그 정도로는 안 되고 ‘에브리데이 크리스천’(Everyday Christian)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3] 참 예배자의 축복과 영광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기뻐 받으시고 축복하십니다. 우리가 아벨의 제사 같은 참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축복하시고 우리를 영화롭게 해 주십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 현장입니다. 우리 영혼과 하나님이 마주치는 겁니다. 영적인 스파크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밝아지고 새 힘이 넘칩니다. 

시73: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 ” 만사형통은 영혼으로부터 시작되고, 예배로부터 시작됩니다. 

요삼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영혼이 잘 잘 되면 나머지는 다 따라오는 겁니다. 

수년 전에 영국의「The Times」에 예배와 수명과의 관계를 연구한 자료가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정기적으로 예배하는 크리스천이 그렇지 않은 일반인들과 비교할 때 평균 수명이 7년이나 길다고 합니다. 흑인들의 경우는 14년이나 더 길다고 합니다. 예배를 통해 영혼이 새 힘을 얻으니 당연한 결과입니다. 
  
참 예배자는 더 나아가 존귀한 인생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높여 주십니다. 삼상2:30 
“ ...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높이면, 하나님께서 예배자를 높여주십니다.   

예배가 신앙의 종합인 것처럼 예배에서 승리하면 종합적인 축복과 영광이 따라옵니다. 이용규 선교사님의 저서「내려놓음」에 나오는 간증입니다. 현지인 교회를 개척했는데, 한 자매가 귀가 안 들렸는데 기도 가운데 듣게 됐다고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체험했겠죠. 당연히 예배를 사모하게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자마가 소를 잃어버렸습니다. 몇 시간 동안 찾아 헤매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한편 예배시간이 다가옵니다. 얼마나 갈등이 됐을까요? 하지만 그 자매는 결단하고 예배의 자리에 나아갔습니다. 선교사님도 그 사정을 알고 하나님께 사정을 살펴 주시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예배가 끝났는데, 밖에 소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이처럼 예배의 회복은 모든 것의 회복입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마음속에 새기시고 나 자신의 예배를 잘 진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벨의 제사 같은 참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참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그래서 부디 예배에 승리하시고, 더 나아가 인생에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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