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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망은 주님께 있습니다 (시 3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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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은 주님께 있습니다 (시 39:3-7)

 
우리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이자 장로교회의 창시자라 불리는 존 낙스가 세상을 떠날 때 그의 동지들이 물었습니다. “소망이 있습니까?” 이 질문의 뜻은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생에 소망이 있습니까? 교회개혁에 소망이 있습니까? 스코틀랜드의 미래에 소망이 있습니까?” 한때 통치자들의 박해 속에서도 지치지 않고 교회개혁을 단행했던 존 낙스였습니다. 

설교는 어찌나 우렁찼던지 그가 설교할 때에는 사람들이 나무둥지가 흔들리는 것 같다고 말했던 존 낙스였습니다. 

그러나 그랬던 존 낙스도 세상을 떠날 때에는 힘이 없었습니다. 한마디의 말도 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망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존 낙스는 숨을 거두면서 힘이 없어 말은 못하고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습니다. 그 뜻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있다.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께서 하신다. 하나님을 의지하라. 주님께 소망을 두라. 소망은 주님께 있다!” 

본문의 말씀은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렸던 다윗왕의 고백입니다. 그는 불이 붙은 것과 같은 뜨거운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시편 39:4) 

첫째로 그는 인생의 연약함을 토로했습니다. 하나님께 자기의 연약함을 알게 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인생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합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시편 39:5上) 

둘째로 그는 사는 날이 짧다고 고백했습니다. 영원하신 주님 앞에서는 자신의 날이 없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날이 잠시잠깐 지나갔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시편 39:5下 )

셋째로 다윗은 하나님께 인생의 덧없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든든히 섰다고 해도 잠시잠깐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은 허사일 때가 많고 무너질 때가 많으며 헛된 일에 소란하고 노심초사해서 재물을 모으고 지위를 차지하고 권세와 명성을 얻어도 결국 다 지나가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인간의 무지와 무능과 무력, 한계, 사는 날이 짧고 무상함을 고백함으로 우리의 소망이 지식이나 소유나 우리의 능력에 있지 않고 오직 주님께만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춘하추동같은 인생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났고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사는 사람은 누구나 커다란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일생을 산다는 과제입니다. 사람은 일생을 살아야합니다. 연한이 각각 다르고 처지가 각각 다르지만 사람은 일생을 살아야합니다. 우리의 일생은 결코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감당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연말이 되면 우리는 다사다난했던 한해를 보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다사다난했던 세월을 수십 년째 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살았다고 말합니다. 야곱도 험악한 일생을 살았습니다. 인생이 춘하추동 같다고 말합니다. 따뜻할 때도 있고 뜨거울 때도 있으며 시원할 때도 있고 견디기 어려운 추위도 우리의 일생 중에 있습니다. 여러 가지 유혹과 함정이 있습니다. 건강하다가도 병들고, 기쁜 일이 있다가도 슬픈 일이 닥쳐옵니다. 이처럼 우리는 종잡을 수없는 춘하추동 같은 일들이 반복하는 일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없는 일들에 직면할 때도 있습니다. 역경과 고난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저는 35살이 되던 1972년에 인도네시아에 선교사로 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제가 처음 갔던 곳에 작은 도서실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그 도서실을 세운 이력을 읽어보았습니다. 그 이력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어떤 교단에서 독신여성 선교사를 파송했는데 인도네시아 말을 배우던 중에 밤에 강도가 들어와서 그 선교사를 살해했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가족과 교회가 그를 기념하고자 이 도서실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읽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로 삼아라. 내가 세상 끝날 때까지 너희와 함께 항상 있겠다고 말씀하신 그 주님은 지금 살아계시는가? 그의 약속은 신실한 것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인도네시아 선교에 사명감과 열정을 가지고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직장도 포기하고 가족과 친척을 떠나온 이 젊은 여성이 어떻게 전도 한번 하지도 못하고 말을 배우다 흉악한 강도의 칼에 죽임을 당할 수 있는가? 살아계신 주님은 무엇을 하고 계신가? 항상 함께 하시겠다던 주님은 어디 계신가? 많은 사람들의 만류와 여러 가지 일들을 버리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온 내가 여기서 선교할 가치가 있는 것인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고민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선교사 댁에 며칠을 머물렀었는데 그 댁의 객실에 이런 글귀가 걸려있었습니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때때로 당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 다른 사람들에게 생기는 일들, 우리가 목도한 여러 가지 사건들,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정의의 편이시라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여, 우리는 때때로 당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한 구절이 더 있었습니다. 바로 이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의지합니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때때로 당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의지합니다.” 

죽음의 골짜기 같은, 절망 밖에 없고 손을 들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그러나” 하고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지식도, 지혜도, 의지도, 경험도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위로와 격려, 주님께서 주시는 신비한 평화의 힘 때문에 우리가 일어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옆에 또 다른 글귀가 있었습니다. “당신이 진 십자가가 남의 것보다 무겁다고 생각하는가? 주님의 위로도 더 위대할 것이다.” 로마서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로마서 8:35)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로마서 8:37) 

광야 같은 이 세상의 나그네 길에서 우리의 소망은 승리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궁극적이고 진정한 소망이십니다. 

인간에게는 죽음의 문제가 있습니다

두 번째 큰 문제가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인생에는 연한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는 날이 그림자 같고 아무리 길어도 한 뼘 정도 밖에 안 된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우리의 일생이 영원 앞에서는 없는 것 같다고 고민했습니다.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종말이 옵니다. 인생행로에 종말이 옵니다. 언제 어떻게 오느냐?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 날은 옵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이 인생길에서 넘어야할 마지막 고비입니다. 그런데 이 죽음을 감당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왜 약을 먹고 왜 수술을 하고 병원에 갑니까? 죽음의 강을 건너기가 어렵습니다. 

교계에 총회장을 하셨던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분이 중병이 들어서 수술을 하셨는데 결국은 수술을 하다가 포기했습니다. 어느 날 아들 목사가 병원에 입원해있는 아버지께 갔더니 아버지가 “내가 어제 꿈에 천당을 갔다 왔다.”고 하시더랍니다. 그래서 아들 목사가 물었습니다. “좋으셨습니까?” “참 좋더라. 성경에 있는 그대로더라.” 그러자 아들 목사가 고통스러워하는 아버지를 보고 말합니다. “아버지, 빨리 가이소.” 효심이 담긴 말이었습니다. 이곳은 이렇게 고통스러우니 어서 좋은 천국으로 가셔서 평안하시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목사님이 말합니다. “싫다. 내가 조금만 더 너희들과 같이 있고 싶다. 아내와 아들딸, 며느리, 사위, 손자손녀, 친구들 교우들, 이 세상에서 조금만 더 같이 있고 싶다.” 이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유일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죽음의 강 앞에서 우리의 위로와 소망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위로와 소망이 누구입니까? 돈입니까? 권력입니까? 지위입니까? 명성입니까? 우리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고백하는 신앙고백 중에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 있습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첫 번째 물음이 이렇습니다.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우리의 유일한 위로가 무엇입니까?” 답은 이렇습니다.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우리의 유일한 위로와 소망은 우리의 몸과 영혼이 우리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입니다.” 중요합니다.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우리의 유일한 위로와 유일한 소망은 우리의 몸과 영혼이 우리의 신실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입니다. 

1904년 7월 30일 중국 선교개척자 허드슨 테일러 목사님의 부인 제리 테일러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처녀로 중국선교회에 헌신했고 52년 동안 중국에서 선교사로 전심전력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 마지막에 병이 들었습니다. 호흡이 곤란했습니다.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요청했습니다. “빨리 숨이 멎도록 기도해주십시오.” 

그의 남편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가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빨리 숨이 멎게 해주십시오.” 약 5분 후에 숨이 멈췄습니다. 그때 제리 테일러가 숨을 거두면서 마지막으로 말했습니다. “그의 은혜가 내게 족하다.” 승리의 고백입니다. 바울 사도가 말씀했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린도전서 15:5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린도전서 15:57) 

소망은 오직 주님께 있습니다.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그분만이 우리의 궁극적 소망입니다. 이 소망위에 굳게 서기를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서 바울 사도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린도전서 15:58) 

예수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둔 사람들의 수고는 절대로 헛되지 않습니다. 소망교회가 주님께 소망을 둔 명실상부한 소망의 공동체로 성숙하고 전진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기원합니다. 
(서정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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