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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대한 명령 : 서로 사랑하라 (요 13: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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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명령 : 서로 사랑하라 (요 13:34-35)


최근 트윗터를 하는데 여러분이 동시에 제게 한 다큐 영화를 보라는 추천을 해서 때늦게 용인 구시가지까지 찾아가 며칠 전 그 문제의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은퇴 후 조금은 느긋하게 삶을 엔조이하며 살고 싶다는 저의 생각을 ‘한방에’ 날려버렸습니다. 제목은 <울지마 톤즈>입니다. 

이 영화는 아프리카 오지 수단 남쪽의 작은 마을 톤즈,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딩카족 그러나 가난과 전쟁, 절망으로 가라앉은 지역에 선교 베이스를 만들었던 카톨릭 의료 선교사(인제 의과대출신) 이태석 신부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습니다. 

이 영화가 던진 충격은 너무나 치열하게 열심히 선교하다가 그가 젊은 나이에 아깝게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제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은 그의 치열한 사역도, 치열한 열정도, 그의 치열한 헌신도, 치열한 선교업적도 아닌, 그가 남긴 치열한 사랑의 흔적이었습니다. 

이 영화를 보는 동안 내내 이 다큐의 한 장면, 한 장면은 목회 40년동안 얼마나 내게 맡겨진 양무리를 진정으로 사랑했는가? 라는 질문으로 저를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인생을 걸고 정말 진정성있는 애정으로 내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사랑하다가 나를 산화시키고 싶다는 불꽃 하나를 심었습니다.

이 영화의 오프닝은 암 선고를 받은 주인공이 신부의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는 윤시내의 <열애>를 열창하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마음을 스치며 지나가는 타인처럼/흩어지는 바람인줄 알았는데/앉으나 서나 끊임없이 솟아나는/그대향한 그리움그대의 그림자에 쌓여/이 한세월 그대와 함께 하나니/그대의 가슴에 나는/꽃처럼 영롱한 별처럼 찬란한 진주가 되리라/그리고 이 생명 다하도록/뜨거운 마음속 불꽃을 피우리라/태워도 태워도 재가 되지 않는 진주처럼 영롱한 사랑을 피우리라” 

물론 그가 이 노래를 부르며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들은 톤즈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 그가 이 수단 오지 마을을 찾아간 이유, 그들을 위해 자신의 짧은 생애를 산화시킨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바로 우리가 읽은 본문 요13:34-35절의 예수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주인공이 톤즈 마을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바치기 전 이미 이천년 전 이 지구 마을을 위해 당신을 산화시키신 주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그의 제자들과 다락방에서 이별의 시간을 가지시면서 주셨던 말씀입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그런데 이천년이 지난 우리가 다시 이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1.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34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여기 새 계명, 새로운 계명은 다시 말하면 새로운 명령입니다. 한 신학자는 이 명령이 성경에서 결코 새롭게 처음 소개된 가르침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새>단어를 첨부한 이유는 이 명령이 날마다 새롭게 강조되어야 할 명령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이 명령이라니, 도대체 사랑을 명령할 수 있느냐”고 묻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거꾸로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이웃들을 당연히 사랑해야 할줄 알면서도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많은 경우 사랑을 감정적으로만 접근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나 사랑이 명령이라면 순종되어야 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이 명령은 감정을 넘어선 의지적인 응답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 대상이라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런 맥락에서 주님은 원수도 사랑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수용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무엇보다 먼저 요청되는 것은 사랑의 결심입니다. 군대 조직이 운영될 수 있는 중요한 이유는 우리는 군대갈 때 상관의 어떤 명령도 순종하기로 결심하고 가기 때문일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 수도원 운동이 일어나면서 수도사들은 세 가지 서원을 해야 했는데 이것들을 “정결, 청빈, 순명”의 맹세라고 했습니다.(지금도 사제나 수녀들은 이 서원을 지속한다) 그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것은 순명 곧 순종입니다. 그런데 이 순종이 과연 사제나 수도사에게만 필요한 것일까요? 

안드류 머레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될 때 우리 모두는 순종의 학교에 입학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이 사랑하라고 명하신 분부 앞에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순종을 결심함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사랑의 시작입니다. 선교사님들은 문화권을 달리하는 땅 끝 사람들을 사랑하도록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예루살렘에서 우리가 날마다 만나는 이웃들을 사랑하도록 부르심을 받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사랑을 명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2. 주님의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란 ‘따르는 사람들’(follower)이란 의미를 갖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순간부터 우리는 우리의 주님 되신 그분을 주목하고 그분을 본받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본받을 일이 많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분의 사랑의 실천을 본받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4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사람들의 구체적인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것으로 사랑을 실천하십니다. 벳새다 들판의 배고픈 군중들에게 5병2어의 기적으로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십니다. 눈이 먼 자에게 빛을, 귀먹은 자에게 듣게 함을, 말 못하는 자들의 혀에 언어를 주시고, 걷지 못하는 자에게 걷는 힘을 공급하셨습니다. 그리고 영생의 말씀이 필요한 자들에게 진리를 공급하셨습니다. 할 수 있는 일로 할 수 있는 때에 이웃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으로 그의 사랑의 몸짓은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이 예수님의 제자였던 <울지마 톤즈>의 사제 이태석의 사랑도 그렇게 시작됩니다. 지천으로 깔린 톤즈의 병든자들을 위해 그는 비록 12칸의 한국 보건소 수준의 클리닉이지만 소중한 병원을 만들었고, 하루 종일 빈둥거리는 톤즈의 청소년들을 위해 그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학교 건물을 보수하여 12년 과정의 돈 보스코 학교를 열었습니다. 전쟁으로 정서가 고갈된 이들을 위해 서른 다섯 명으로 구성된 브라스 밴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버림받은 한센 병 환자들의 마을을 찾아 무너지고 닳아빠진 하나 하나의 발들의 치수를 재어 맞춤 샌들을 만들어 신겨줍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일보다 더 중요한 사랑의 실천은 그들과 함께 있어주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아니 그는 그가 이 톤즈의 선교사로 오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가 거기에 이들과 함께 계신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가 처음 그곳에 단기 선교를 갔다가 다시 그곳에 장기 선교사로 돌아온 이유를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톤즈에서 열흘을 지난 뒤 떠나오며 서품을 받은 후 이곳으로 돌아오리라는 강한 다짐을 가지게 한 것은 가난과 전쟁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향한 인간적인 동정심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 안에 살아계신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함께 있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주일 모임만 의존하지 않고 셀 모임을 강조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고통 받는 이웃들과 함께 있어주며 사랑을 나누는 자리, 거기에서 우리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하시겠다고 언약하신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3. 세상의 필요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아니 예수님의 몸인 교회에서 가장 보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세상은 우리의 주일성수로 감동을 받지 않습니다. 세상은 우리의 새벽기도나 철야 기도를 보고 감동을 받지 않습니다. 세상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줄줄 꿰는 우리의 성서연구로도 감동을 받지 않습니다. 

본문 35절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내 제자인줄 알리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하는 순간은 우리가 사랑하기 어려운 이웃까지 끌어안고 사랑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라브리 운동을 한 고 프랜시스 쉐이퍼 박사는 “사랑은 예수의 제자들의 뱃지이다”고 했습니다. 사랑이 세상의 필요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린 이런 찬송을 불러왔습니다.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랭함을 아느냐/곳곳 마다 사랑 없어 탄식소리 뿐일세/악을 선케 만들고 모든 소망 채우는/사랑 얻기 위하여 저들오래 참았네/사랑 없는 까닭에 사랑 없는 까닭에/사랑위해 저희들 오래참고 있었네”(찬373장)

우리 교회의 비전은 “민족을 치유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그러나 무엇으로 이 비전/사명을 이룰수 있습니까? 사랑이 해답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없이 이 민족은 치유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없이 이 세상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목장은 이 사랑을 연습하고 실천하는 우리들의 예루살렘 다락방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배운 사랑을 갖고 유대와 사마리라와 땅 끝까지 나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울지마 톤즈>다큐 영화는 마지막에서 절정에 도달합니다. 저는 마지막 대목에서 극장인 것을 잊고 거의 오열할 뻔 했습니다. 사제 이태석은 잠시 휴가로 한국에 나왔다가 대장암 3기 판정을 받습니다. 그는 암 판정을 받고도 톤즈 선교 사역을 후원하는 음악회를 열고 활동을 쉬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이 아시는 이유로 48세를 일기로 그는 작년 2010년 1월 14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세상을 떠납니다. 그는 병석에서도 온통 톤즈 생각뿐 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아끼는 사람들이 마지막 의식으로 그의 장례후 이 태석 신부의 장례식 광경을 담은 비디오와 영정 모습을 갖고 아프리카 톤즈로 떠납니다. 

사제 이태석이 키운 브라스 밴드 단원들을 한 방에 모이게 하고 비디오를 틀기 시작했습니다. 이 딩카족 청소년들은 어려서부터 용감한 사람이 되도록 울지 않도록 훈련된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비디오 화면에 사제가 등장하자 어떤 고통에도 전쟁의 가족들의 주검 앞에서도 울지 않던 철옹성 같은 아이들이 하나 둘씩 울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신부의 영정을 들고 브라스 밴드단원을 앞세운 거리 행진을 시작합니다. 온 거리가 울고 톤즈가 울기 시작합니다. 밤이 오자 그들은 마지막 이별을 위해 밤 하늘 별이 쏟아지는 들판으로 나아와 이태석 신부에게 배운 마지막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어떤 찬송 못지 않은 위대한 영감의 노래였습니다.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당신이 내 곁을 떠나간 뒤에/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오/예~~예~~~예~~/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다큐 영상 제작팀이 이곳을 찾아 한센 병자들의 마을을 찾아 사제의 사진을 보여주자 병자들은 그의 사진에 그들 특유의 뭉툭한 손으로 사진 속 얼굴을 쓰다듬고 입맞춤을 하며 서로 앞을 다투어 고백합니다. “그는 나에게 옷을 주었어요, 그는 내가 아플 때 나를 치료해 주었고요, 내가 슬플 때 나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셨어요, 그는 나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이 모두 예수님의 사랑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2010년 4월 11일 처음으로 이 다큐가 방영되고 9월 9일부터는 극장 판으로 개봉된 후 시청자들의 뜨거운 반응으로 이 영화는 금년 초까지 연장되어 방영을 계속했고, 그 결과로 수단 어린이 장학회가 결성되고 두 명의 톤즈 청년들이 한국에 와서 공부하게 되었고, 톤즈를 지원하는 의료 선교가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랑의 능력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사랑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당신을 따라오는 제자들에게 분부하시는 사랑의 계명입니다. 이것이 한해의 삶을 시작하는 우리에게 주께서 명하시는 교훈입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오늘 우리는 과연 이 사랑의 명에 대한 순종을 결심할 수 있겠습니까?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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