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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눅 1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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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눅 10:1-24)
 

2011년 교회표어는 골로새서 4:3절의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로 정하였습니다. 이 표어를 따라 저희 은혜와평강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꾼으로 올 한 해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합니다. 복음을 전하고 나타내는 일은 항상 영적인 싸움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신갑주로 무장하고 기도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하나님 나라 군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에베소서는 하늘과 땅을 통일하는 기업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때가 찬 마지막 하나님의 경륜에 참여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는 일에 힘써야 함을 말합니다. 골로새서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가득 채워 세상의 초등학문이나 철학의 헛된 속임수에 교회가 속지 말고, 머리되신 주님을 붙들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빌립보서는 

복음을 위한 봉사에 참여함이 기쁨이며 이 일에 함께 동역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 쓸 것을 채우신다고 말씀했습니다. 

특히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는 자기 일을 구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일을 구하였으며, 복음의 일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겼으며, 그 일은 자기보다 교회의 사정을 더 진실하게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자들을 교회가 존귀하게 여기라고 바울은 명령했습니다. 세상에서는 비천하게 여김을 받고 큰 이름이 없는 자라도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헌신하는 자들을 교회가 존귀하게 여겨야 하겠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교회를 위하여 보내려고 할 때 과연 누구를 보내는 것이 더 교회를 위하여 유익할까 생각했던 것처럼, 은혜와평강교회 성도들 가운데 형제 자매들의 사정을 진실히 생각하며 그들의 유익을 위하여 누굴 보낼 수 있을까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누가복음 설교본문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합당한 일꾼은 어떻게 봉사하는 것인지 알고, 이 일꾼들에게 베푸신 복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합니다.
  
누가복음의 주제는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말하는데 그건 24장의 인자가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신 일을 가리킵니다. 

24:26-27절입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그래서 누가복음은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사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하늘 성소에 승천하심을 말한다고 여러분께 이미 여러 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은 ‘승천복음’이라는 별명을 붙일만 합니다.
  
이루어신 사실에 대하여 누가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행하시며 가르치심이 전반부를 형성하고, 이 가르치심을 따라 제자들에게 명령하심이 후반부로 되어 있습니다. 오늘 설교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말씀에 포함되어 있고, 누가복음 9:51절 이하에 승천하심을 따라가는 자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일꾼이라고 말한 뒤에, 그 제자가 어떻게 따를 것인가에 대한 원칙을 말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 설교본문과 비슷하게 누가복음 9장에도 12명의 제자들을 파송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9:1절부터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머물다가 거기서 떠나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나가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
  
오늘 설교본문 말씀과 내용이 매우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9장의 12제자의 파송과 10장의 70제자의 파송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9장의 12제자들의 파송은 누가복음의 그리스도의 가르침 가운데 포함되어 있고, 10장의 70명의 제자들의 파송은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행할 것을 명하신 것 가운데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9장의 파송은 이론적이라면 10장의 파송은 실천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9장의 파송은 주님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이를테면 주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이신가를 나타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나라를 어떤 정책으로 세우느냐를 보이신 것입니다. 반면에 10장은 그 정책을 실제로 실천하여 행동으로 옮기는 것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70이라는 숫자도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여러 번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야곱의 가족 70인이 애굽에 들어갔던 것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5-7절입니다.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이 모두 70이요 요셉은 애굽에 있었더라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의 사람은 다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여기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의 성취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게 되었는데 생육하고 번성하여 매우 강했다고 말합니다. 이를 70인을 기초로 설명합니다.
  
민수기에서도 70인의 이스라엘 대표자가 나옵니다. 여기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먹었던 것을 기억하고 광야에서 만나 먹는 것을 불평합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먹었던 것에 대한 탐욕을 품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불평하니까 모세가 여호와께 읍소하기를 ‘나 혼자서는 이 백성을 감당할 수가 없나이다’라고 합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이렇게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민수기 11:16-1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노인 중에 네가 알기로 백성의 장로와 지도자가 될 말한 자 70명을 모아 네게 데리고 와 회막에 이르러 거기서 너와 함께 서게 하라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영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그래서 결국 모세 한 사람에게 임하였던 여호와의 신을 70인에게도 주어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을 감당하도록 세웁니다. 즉 한 사람에게 주어졌던 일을 70인에게 확대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을 함께 통치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처럼 성경에 나타난 70의 숫자는 주로 확대, 확장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1-2절이 말하는 바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후에 주께서 따로 70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구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여기 70인을 따로 세우는 이유에 대하여 말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가셔야 하는데 70인을 보내고 있습니다. 주님 혼자 담당해야 하는데 70인이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함께 담당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더 많은 곳을 봉사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70인을 보내는 목적은 추수할 일꾼이 적어서 추수할 일꾼을 보내어 달라는 것입니다. 70인도 부족하여 더 많은 일꾼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즉 70보다 수가 더 확대되어 있습니다.
  
추수할 일꾼이라 함은 수확해야 할 시기라는 것을 뜻하고 그것은 곧 마지막 때라는 의미입니다. 70인의 제자를 파송함은 마지막 추수 때에 추수할 것이 많은데 일꾼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둘씩 짝을 지어 여러 곳으로 파송하여 더 많은 일꾼을 얻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때가 임박했고 또 많은 수확을 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70인 제자들을 파송한 목적입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마지막 구원역사의 때이기 때문에 이 나라에 많은 백성을 부르시기 때문에 70명의 제자를 파송해서 더 많은 일꾼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70인의 야곱의 식구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번성한 것보다 더 많은 수확이 있을 것입니다. 모세와 70인의 대표자가 여호와의 신을 받아 봉사한 것보다 더 많은 일꾼들이 마지막 때에 필요합니다.
  
이러한 목적으로 70명을 파송했는데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가야 하는가? 이것을 본문 3절 이하에 말합니다.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제자들이 가는 상황에 대하여 한 마디로 먼저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누가 들어도 큰 고난이 따르겠다는 것이라는 의미라고 알 수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가게 되면 주님께서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심’이라고 했던 바와 같이 주님을 뒤따라 고난의 길을 가야 합니다. 
  
이런 상황임을 인식하고 제자들은 가야 합니다. 그런데 떠날 때에도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앞의 9장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실 때 하신 말씀과 거의 같습니다. 주님을 따르려고 하는 어떤 사람이 죽은 부친을 장사하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했을 때, 또 어떤 사람이 가족과 작별하고 따르겠다고 했을 때 주님께서는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고,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합당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승천하시는 주님을 따르려면 땅의 것에 매이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거기에다 70인의 제자에게는 하나를 더하여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고 합니다. 어찌 보면 추수할 때이니까, 마지막 때이니까 갈 길이 급하다는 말일 수가 있겠습니다. 누구를 돌아보고, 누구를 만나보고 할 겨를이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 형제들이 군대갈 때를 연상하면 알기 쉽습니다. 군대에 가기 전 몇 달은 여행을 하거나 친척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군대 잘 갔다 오겠다고 인사를 합니다. 전국에 친척들이 흩어져 있으면 지방나들이를 하면서 문안인사를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오늘 70명의 제자들이 갈 때는 이런 인사가 필요치 않다는 말입니다. 갈 길이 급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 군대에 가게 되면 자신들이 사회에서 입었던 모든 옷들을 둘둘둘 말아서 소포로 부모님께 보내줍니다. 그러니까 군대에 가면서 액세서리나 값비싼 장신구들을 몸에 붙이고 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돈도 절대로 많이 갖고 가지 않습니다. 군대가면 이제 모두 국가가 입혀주고 먹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럼 70인의 제자들이 동네에 가면 어떻게 하는가? 5절에 말하는 바와 같이 평안으로 축복합니다. 이는 중들이 각 점포를 돌면서 목탁을 두드리며 시주를 바라는 것과 다릅니다. 이 집은 평안이 있는 곳입니다. 평안이 있는 곳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꾼이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것은 지극히 마땅합니다. 장정들이 군인으로 가게 되면 국가의 집에 들어간 것이고 국가가 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훈련해서 국가를 위해 싸우는 군인으로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7절에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70명이 제자들은 주님의 군대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비는 평안을 거절하면 어떻게 하는가? 그건 손해될 것이 없습니다. 빈 평안이 곧 자기에게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정확히 어떤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전도여행을 보면 어떤 한 곳을 기점으로 이루어집니다. 3차 전도여행은 안디옥교회를 기점으로 이루어졌고, 서바나 끝까지 가려할 때는 로마교회를 기점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교회를 복음의 전초기지를 삼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복음의 전초기지를 삼으려고 하는 것인가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긴다 하는 것은 매우 번잡한 일입니다. 한 곳에 안정적으로 거하지 못하여 자기가 하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더 급하고 그 일에 더 집중하라는 의미일 수도 있겠습니다. 비교적 후자의 견해가 전체적 의미에 맞다고 봅니다.
  
그럼 70인의 제자들이 동네에 들어가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8절-12절에 말씀합니다.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는 것을 먹고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이 말씀은 지리산 토벌을 생각하면 쉽습니다. 지리산에 빨치산들이 숨어 있을 때 국군이 토벌작전에 참여합니다. 국군이 가는 부락마다 군인을 위해 음식을 대접합니다. 빨치산들로부터 학대와 괴롭힘을 당했다면 마땅히 토벌을 위해 수고하는 군인들을 대접할 것입니다. 그러면 군인들은 주는 것만 먹고 있으면 안되지요. 토벌작전을 벌여 빨치산 잔당들을 소탕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동네가 제자들을 영접하여 먹을 차려 놓게 먹게 합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주님이 주신 권세로 병자들을 고칩니다. 병의 권세 아래 놓인 자들을 고쳐 악한 권세를 토벌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동네를 점령하여 악한 권세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전파하게 합니다. 이제 주님이 죽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심으로 보좌 우편에 오르시는 영광과 권세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그 나라 백성으로 참여하라는 복음전파를 제자들은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제자들을 영접하지 않은 동네들은 어찌 됩니까? 발에 묻는 먼지를 떨어버리라는 말씀은 우선 룻기를 연상하게 합니다. 만일 율법을 따라 자신이 다른 친척의 기업을 무를 자가 되었는데 그 기업을 무르지 아니하면 발에 먼지를 떨게 되어 있습니다. 즉 그렇게 함으로 자신은 이 일에 함께 하지 않겠다고, 상관이 없는 자라고 나타냅니다. 이처럼 제자들이 전파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이 동네는 이제 상관이 없는 곳이 됩니다. 그러나 복음의 전파는 이런 동네에서도 계속됩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이런 동네가 받을 심판에 대해서 소돔보다 더 큰 심판을 받게 되리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런 심판에 대하여 13절-16절에 더 확대하여 말씀합니다. 여기 나오는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두로와 시돈은 이방 백성입니다. 두로와 시돈에게 전하였더라면 그들은 말씀을 받고 회개하여 돌이켰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이 듣지를 않습니다. 그럼 그들을 향한 심판은 두로와 시돈을 향한 심판보다 더 클 것입니다. 
  
왜 이들을 향한 심판이 더 크게 됩니까? 16절입니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이제 제자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제자를 보내신 주님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또 주님을 듣지 않는 자들은 주님을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모세와 같은 구약의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 것과 다릅니다. 그 때는 종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지만 이제 제자들의 말을 거절하면 그건 아들의 말을 거절하는 것이요, 곧 아버지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하나님 아버지의 진노는 더 크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더구나 마지막 추수 때이기 때문에 더 이상 구원의 역사가 진행되지 않습니다. 아들의 구원을 거절하고 아들의 나라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더 큰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받은 이방 땅에 흩어지는 심판과 확연히 다르며 곧 불지옥에 던져버리는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 가운데는 70인의 제자들에게 부여된 특권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왕이 특사를 보낼 때 사신을 보내는 것과 왕자를 보내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 역사 가운데도 신하를 인질로 잡아가는 것과 왕자를 인질로 잡아가는 것은 전혀 다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제자들의 특권은 마치 아들을 대신해서 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들의 복음전파는 본문 처음에서도 말했던 바와 같이 주님이 친히 가셔야만 하는 곳이었는데 70인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이제 이 70인의 제자들을 파송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제자들이 승리했습니다. 그래서 돌아와 승전보고를 합니다. 

17절-20절입니다. “70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제자들이 나가서 싸울 때 주의 이름으로 싸웠습니다. 그 이름은 제자들에게 주신 권능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은 죽음을 이기는 권능의 이름입니다. 이 왕이 권세를 제자들에게 주었습니다. 이는 마치 왕이 자기만 친히 쓰는 보검을 장수에게 하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적군이 항복했습니다. 이는 하늘에서 번개같이 사탄이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세계 2차 세계대전 때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승리는 아마 독일의 심장부 베를린의 권세가 떨어짐과 같았을 것입니다. 즉 제자들의 이 승리는 결국 완전한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 그러니 비록 어린 양이 이리 가운데 가는 것처럼 고난의 길이지만 이 전쟁은 절대로 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전쟁의 양상은 이미 총사령관인 주님이 알고 계셨습니다. 모든 싸움에 총사령관이나 왕은 높은 곳에서 전쟁의 승패를 볼 수 있는 것처럼, 주님께서 요한계시록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늘의 권세를 갖고 있었던 사탄이 떨어지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 전쟁은 승패가 결정난 것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주신 권세는 뱀과 전갈을 밟는 능력이어서 승리가 보장되었습니다.
  
엊그제 매스컴에 보도된 청해부대의 인질구출작전을 보시면 이와 같은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UDT대원들은 첨단의 무기로 무장되어 있었습니다. 누가 준 것입니까? 왕이 준 것입니다. 그런 권세로 적들을 제압했습니다. 이런 상황도 위성을 통하여 한국에서 작전지시가 떨어졌으며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이런 장면을 연상하시면 승전보고의 내용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 이제 20절에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보통 우리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을까,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즉 마지막 주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자기 이름이 생명책에 없으면 어찌 될까하는 두려움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여기는 그런 이름이 기록된다는 구원이 확실하다는 이름의 기록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물론 군대에 가면 모든 군인들마다 생명줄이라고 하는 군번이 새겨져 있는 줄을 목에 겁니다. 그래서 혹시 전사하여 시체를 찾을 수 없을 때, 그 시체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을 때 그 군번 줄로 확인합니다. 거기에 군번으로 자기 이름을 새겨 놓은 것입니다. 이렇게 기록된 이름도 군인의 이름입니다.
  
하지만 여기의 기록된 이름은 이와 다릅니다. 저는 철원의 백마고지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고지는 중공군과 6.25전쟁 때 국군이 싸워 고지의 주인이 24번이나 바뀐 아주 치열한 전쟁터였습니다. 그 곳에 고지를 내 나라 땅으로 확보하기 위해 싸우다 전사한 병사들의 이름이 큰 비석에 빼곡히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나라를 위해 저 백마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목숨을 바쳐 산화한 병사들의 이름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이름이 바로 백마고지의 비석에 새겨진 이름이라고 봅니다. 오늘 본문의 하늘에 기록된 이름이 뜻하는 바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싸운 승리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었습니다. 한 순간의 승리로 만족하고 기뻐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이름으로 영영히 기뻐하도록 기록된 것입니다. 그저 놀다가 공짜로 얻는 구원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은 이런 이름이 기록되지 않습니다. 자기만을 위하여 살고 주님의 군대로 한 번도 싸우지 못한 사람들은 이런 이름으로 기록되지 못할 것입니다. 참으로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승리의 이름들입니다. 
  
이 승전보고를 접하신 후에 우리 주님은 기도하심을 통하여 이 승전보고가 아버지께서 무엇을 주심인지에 대하여 감사하고 기뻐하십니다. 

21절-22절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이 승전보고를 접하시고 주님은 성령으로 기뻐하셨습니다. 이 기쁨은 하늘의 기쁨입니다. 하늘의 군대가 악한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먼저 아버지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어떤 감사였습니까?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했습니다. 그럼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앞에서 고라신아 벳새다와 가버나움의 심판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두로와 시돈을 대조시켰습니다. 그러면 여기 지혜있는 자들은 이스라엘 곧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일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 아이들은 이방인들 가리키며 누가복음의 복음 전파의 수혜자인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을 가리키는 말일 것입니다.
  
즉 유대인은 주님을 거절하고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승리는 이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천하고 낮은 사람들에게 나타낼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이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 뜻이 이제 제자들의 파송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이루어졌고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승리는 아버지가 누구이신지, 아들이 누구이신지 알게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의 권세를 이긴 모세와 여호와를 알 수 있으나 아버지와 아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참으로 누가 복이 있는 자들입니까? 사탄이 항복하고 그 권세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하는 아들의 권세가 제자인 자기에게서 나타나고 이것이 곧 아버지의 뜻이며 아들의 나라임을 아는 자가 참으로 복이 있는 자들입니다. 
  
추수 때에 제자들에게 주신 권능과 그들의 싸움으로 말미암은 승리는 이전에 아무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의 제자로써 파송을 받아 싸워 이긴 승리는 새로운 역사의 승리요, 새 하나님 나라의 승리이며, 이 영광과 싸움에 승리한 군대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이 승리로 말미암아 아들과 아버지를 알게 된 때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복이 있습니까!!!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이런 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군인들이 특수임무를 받게 되면 정상적인 절차로 자기 위의 상급자가 부르지 않습니다. 비밀스런 루트를 통하여 가장 큰 권세를 가진 군통치권자가 부릅니다. 청와대의 대통령이 특사를 파견할 때 특수한 임무가 주어지고 그 임무를 맡은 군인은 대통령을 독대합니다. 이전에는 잘 모르다가 이젠 대통령의 뜻이 무엇이고 그 일에 자기를 어떻게 불렀는지 알게 됩니다. 그런 일은 예전에 김신조와 함께 북한의 124군 부대인가요? 그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하여 남한의 대통령을 죽이려고 하였을 때 아마도 그들은 김일성의 특수지시를 받았을 것입니다. 바로 신약의 제자들은 그런 부르심을 입은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본문 23절-24절의 말씀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된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이런 승전보고는, 이런 승리의 역사는 옛 시대에는 어느 누구도 보지도 듣지도 못했습니다. 다윗의 군사로 이스라엘이 이방인과 싸워 승리했어도 지금 70인의 제자들처럼 ‘귀신들도 항복하더이다’라는 보고를 하지도 듣지도 못했습니다. 사탄이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그런 승리의 권세는 보지도 듣지도 못했습니다. 
  
구약 백성의 이스라엘의 군사들에게는 주지 않았던 승리를 이제 주님의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승리를 획득한 자들이 정말 복이 있는 자들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나라 수영의 역사 속에 아시아의 물개 소리를 듣는 승리는 있었어도 세계 챔피언으로서의 승리는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아니 아시아의 수영 역사에서도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박태환선수가 해냈습니다. 또 피겨스케이팅의 김연아 선수가 해냈습니다. 우리 선배들은 이런 일을 듣고자 했고 보고자 했어도 감히 넘보지도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젊은이들이 해낸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복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바로 이런 말을 23절-24절이 하는 것입니다. 구약 백성 이스라엘이 맛보지 못했던 승리가 이제 70인의 제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참으로 큰 복을 얻는 자들입니다. 
  
이제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비록 고난의 길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군대이니 하나님의 집에서 모든 필요를 채울 것입니다. 군사들은 복음 전파의 특수임무를 다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할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상 맛보지 못했던 하늘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영광을 맛볼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주님은 모든 권세를 이들에게 첨단의 무기로 공급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귀신들이 항복하여 그들이 붙잡은 인질들을 놓아 줄 것입니다. 이런 승리를 주시려 함이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 일에 참여함을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이방인은 이 주님의 군대로 참여하여 옛 백성들이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하늘의 승리를 거둘 것이며 그 역사적 현장에서 경험하고 그 이름을 하늘에 남길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보는 눈이, 이들이 얻은 승리가 얼마나 복이 있는 것입니까! 아들 안에서 아버지를 밝히 아는 영광의 생명이 그들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70인의 제자들이 파송하여 얻은 승리의 영광과 그들이 얻은 업적을 보고 들음은 현 시대 우리들과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이들이 전파한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은 무엇입니까? 이제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사 부활하셔 승천하심을 알고 보고 듣고 있습니다. 가까이 오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이미 확실히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알고 있습니다. 그 나라가, 아들의 나라가 이미 세워졌습니다. 건국되었습니다. 이미 우리에게는 확실한 증거와 약속이 다 있습니다. 
  
이들은 귀신의 왕을 굴복시킨 승리의 소식은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의 부활의 승리와 승천하심으로 보좌 우편에 이미 앉으신 역사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오순절 이후의 시대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주님이 약속하신 것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구했습니다. 오순절에 그들에게 최고의 첨단의 무기가 임했습니다. 바로 성령의 권능이었습니다. 이 권능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가는 곳마다 위협과 핍박이 따랐으며 세상의 군왕들이 협박했습니다. 그러나 이 부활의 증인들은 물러서거나 감추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가는 곳마다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구원의 열매가 맺어졌습니다.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나도 그들은 더 복음의 전파를 위하여 세상 끝까지 달려가려 했지 자기 안전을 위하여 숨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권능을 담지한 부활의 증인들로 말미암아 바벨론, 곧 로마가 항복했습니다. 이러한 승리는 이전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승전보고는 이전에 없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전파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아들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고 전하였습니다. 이제 12명의 사도만이 전파자, 곧 마지막 때의 추수일꾼이 아닙니다. 또 70명도 아닙니다. 오순절에 모인 120명만이 아닙니다. 이 구원역사의 마지막 때에 얼마나 많은 추수일꾼이 교회의 역사에 등장했습니까? 여기 오늘 설교본문의 추수할 일꾼을 보내어 주소서 하는 요청이 어떻게 역사 가운데 응답되었는지 여러분이 직접 보고 듣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교회 역사 속에 지금까지 2000년이 흐르도록 수많은 일꾼들이 각 동네가 아닌 모든 대륙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여러분과 저에게까지 증거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처음 오셔서 평강을 주셨던 것처럼, 평화의 사신들이 여러분에게 평안을 전하였고 여러분은 이를 받아서 하나님의 집이 되었습니다. 성령이 거하는 하나님의 성전이 된 것입니다. 이 곳에서 주님의 사역자들이 일꾼으로 하나님의 녹을 받고 귀신의 권세로부터 갇힌 자들을 위하여 복음 전파의 일을 최전방에서 감당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부르신 부르심은 그냥 공짜로 천당가라고 부르심인가? 성경은 그런 부르심과 구원을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길에 동행하는 자로서 부르십니다. 주님과 함께 싸우는 군대로 부르십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얻으신 영광을 우리도 얻게 하십니다. 그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럼 이 때는 정말 마지막 추수할 때입니다. 정말 종말의 심판이 임박해 있습니다. 우리에게 시급한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지금 교회의 현실을 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정말 온전한 주님의 일꾼이 많이 있습니까?
  
1980년대만 하더라도 각 교단의 신학교에 신학생이 넘쳐 났습니다. 그런데 지금 현실은 어떠합니까? 미달 사태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구하여야 하겠습니까? 우리 중에 누가 일어나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이 시대에 부르심은 무슨 아버지의 뜻이 있는 것입니까? 추수할 일꾼들이 일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추수해야 할 수확물들이 너무 많은데, 내 부모와 형제와 자식과 이웃과 친척들이 이렇게 많은데 어찌 추수할 일꾼은 잘 보이지를 않는 것입니까? 여러분과 제가 이 일로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받으신 고난을 자기 몸에 채워 바울 사도께서 봉사했던 것처럼 우리 가운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려고 하는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이것은 정말로 시급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사람들이 개인의 종말, 곧 죽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영광을 구하고 자기 부를 채우려는 자들만이 가득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얻으신 승리와 영광을 함께 얻는 자들은 과연 누구입니까? 그리하여 아버지와 아들을 밝히 아는 성령의 기쁨을 누리려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고, 마지막 심판의 때에 우리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겠습니까?
  
그럴 때 만약 여러분이 주님의 위대한 군사로 나서시면 주님께서는 그에게 그가 가지신 성령의 권능을 부여하시고 비록 고난 가운데서도 절대로 패하지 않게 하시며 주님의 얻으신 그 영광의 승리를 맛보게 하시며 참으로 아버지와 아들을 보고 듣게 하는 생명의 교제에 참여케 하실 것입니다.
  
성령의 말을 여러분의 입에 주실 것입니다. 이 복음을 전할 때에 두려워하거나 창피하게 여기지 말고 도리어 담대하게 신발의 먼지를 떠십시오. 거절하는 그들에게 멸망의 빙거가 나타남을 보고 긍휼히 여기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에게 임한 영광과 평안을 즐거워하십시오. 고난과 핍박으로 두려워 물러서지 마십시오. 우린 그런 군대가 아닙니다. UDT보다 더 뛰어난 군사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이름을 얻으셨습니까? 여러분이 구원을 얻고 그 싸움에 이긴 승리의 업적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전적비에 여러분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까? 하늘에 기록한 이름으로 기뻐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저 내 한 몸, 내 삶, 내 가족만을 생각하고 자기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하지 않았나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에 하늘의 싸움에 승리한 무공훈장이 있나 돌아보십시오. 그게 참으로 부활의 승리와 성령의 권능을 알게 되는 지름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지름길입니다. 주님의 살아계심을 말로만 되뇌이지 말고 싸움에서 얻은 승리고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이 70인의 제자들은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다 도망간 제자들입니다. 부인한 자들도 있고 예수님을 판 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영광을 본 제자들은 이와 전혀 달랐습니다. 바로 이 부활하신 후에 성령의 권능을 입은 제자들의 주님을 따랐던 삶이 우리에게 성령으로 공급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70인의 제자보다 더 큰 영광의 승전보를 주님 앞에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일로 기도하십시다. 추수할 일꾼을 보내어 달라고 기도하십시다. 그 일꾼들에게는 주님이 함께 하시며 모든 것을 공급하시며 하나도 잃지 않고 지키고 보호하실 것입니다. 집안에 가만히 계시면 이 영광과 승리를 어떻게 우리가 알고 듣고 보겠습니까? 주님을 따라 고난과 영광에 이르는 길을 가지 않는 자는 이름도 없고 영광스럽고 복된 구원도 없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마지막 때에, 시급한 때에 이 추수할 일꾼이 되도록 하십시다. 그리고 이 복에 참여토록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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