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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보여주신 이상적인 삶 (미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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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보여주신 이상적인 삶 (미 6:1-8)
   

오늘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이상적인 삶”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하셨습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 중임도 못하고 단임으로 마친 분으로 퇴임한 후에 더 큰 일을 하시면서 지금도 미국을 움직이는 큰 영향력 있는 사람은 지미 카터 대통령입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1977년 1월 13일 대통령 취임 연설을 할 때 미가6:8의 말씀을 읽고, 이것이 자신의 인생관임을 밝히셨습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인가를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라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우선 여호와가 누구십니까?   여호와라는 이름의 본래는 ‘야웨’입니다.  야웨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항상 존재하시는 자’라는 뜻입니다.    옛날 모세를 보내시던 하나님은 그 때에만 계시던 하나님이 아니라, 오늘 지금도 우리를 보내시면서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시며,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생명의 주인이시며, 나를 지어 이 땅에 보내어주신 나의 하나님입니다. “나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은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 나의 주인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의 말씀입니다.  

생명을 지으시고 이 땅에 보내어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 “무엇을 원하시는지”라고 달리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어놓고, 이 세상에 보내시면서 구하시고, 요구하시고, 원하시는 것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바요, 하나님의 작품들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상품으로 대량 찍어난 물건이 아니라, 작품으로 오랫동안 생각하시고, 정성을 다하여,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만물의 영장이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의 평균수명이 아주 늘었습니다.  몇 년만 지나면 누구나 90년 정도 살 것인데, 남은 생애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도 아닌 것 같고, 저 것도 아닌 것 같고, 이렇게 사는 것도 미흡하고, 저렇게 사는 것도 모자라기만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해보겠다고 하면 힘에 부치기고 하고 어떤 때에는 자격지심이 들어 포기하게 됩니다.    나 같은 것이 무엇이라고 그렇게 거창한 생각을 하다니, 시행도 안 해보고 주저앉고 맙니다.  어떤 일을 생각해봅니다.  그러면 나는 기분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흡족하지 않으실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바르게 살아가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삶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우리의 삶을 만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는데, 우리의 삶은 시험이요, 위탁받은 것이며, 잠시 잠깐 임시로, 시한부로 맡겨졌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놓고 나 몰라라 하시지 않고, 우리를 감찰하시고 하감하시고 지켜보십니다.  살펴보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은 시험장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도 있고, 하나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이 그를 지으신 것을 한탄하시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보십니다.   하감하시면서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적은 분노까지도 다 알고 살펴보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기가 죽는 것입니다.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란 위탁받은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시간, 우리의 에너지, 지적인 능력, 기회, 관계, 그리고 모든 자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돌보고 관리하도록 잠시 맡겨두신 것들입니다.  청지기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충성된 일꾼이 되기를 소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란 말을 들어야 하고, 남긴 것이 있어야 하고, 바칠 것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미소 짓게 하는 충성된 일꾼들이 되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을 미소 짓게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표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엡5:10에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면서 미소 짓게 하시고, 마음을 다하여 순종하실 때에 하나님은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춤추게 되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으로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기에 행동에 제약을 받고, 하고 싶은 것도 다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명령이니 안 할 수도 없고, 억지가 되었습니다.  

선지자 미가는 불신앙으로 치닫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고발하고 있습니다.   지금 미가는 하나님의 대변인으로, 하나님의 변호인으로 이스라엘과 변론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미가6:1-2을 봅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는 일어나서 산을 향하여 변론하여 작은 산들이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하셨나니 너희 산들과 땅의 견고한 지대들아 너희는 여호와의 변론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변론하시며 이스라엘과 변론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변론한다’는 말은 법적인 용어입니다.  

지금 미가선지자는 하나님을 변호하면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 사랑하고 선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을 향하여 고발하시고, 소송하시는 내용을 잘 들어보라고 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고소 고발하시고 변론하시려고 하는 것입니까?   3절 말씀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이르시기를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슨 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언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따져 묻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슨 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나에게 증언하라”고 하십니다.  

“무슨 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는 말은 “내가 너희에게 짐이라도 되었다는 말이냐?”, “너희에게 무슨 못할 일을 했느냐? ”라는 뜻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배심원들을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산들을 불러 앉혔습니다.   땅의 견고한 지대들을 불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땅과 산들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는 것,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함께 체험하였고, 알고 있기에 증인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도 기가 막혀 이스라엘을 불러서 고소고발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이 무슨 못할 짓은 하셨습니까?   이스라엘에게 무거운 짐이라도 지게 하였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일로 이스라엘을 괴롭게라도 한 것입니까?  

우리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애굽에서 싸우시면서 그들을 인도하여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심지도 않을 거두게 하셨고, 가꾸지도 아니한 과일을 따 먹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의 7족속을 몰아내게 하시고 그 좋은 땅을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에게 값없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을 해방하려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모압 왕 발락이 발람이라는 거짓 선지자를 불러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실 때에도 막아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산들과 땅의 견고한 지대들은 역사의 산증인으로 이스라엘의 불성실함을 함께 고발하고 정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때문에 여러분, 무슨 괴로움을 당하였습니까?  하나님을 짐스럽게 생각하였습니까?  

반대로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없는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주셨건만 하나님은 우리들의 어리석음과 비천함과 나약함으로 얼마나 고통을 받으셨는가를 생각해보아야겠습니다.  

말2:17에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일생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기쁨이 된 것보다는, 하나님을 괴롭힌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우리 하나님은 항상 우리 편이 되어 주셨고, 우리를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우리를 모른다고 하지 않으시고, 싫어버리지도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응답해야 하고, 답변해야 했습니다.  그동안 역사적인 사건을 들면서 이스라엘에게 베풀어주신 놀라우신 은혜에 이제부터 이렇게 해보겠다고 말합니다.  

6-7절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사랑과 신실하신 은총에 응답하려는 이스라엘의 심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기쁜 마음이 아닙니다.  감사하고 감격하는 마음도 아닙니다.  그야말로 투정이요, 반항이요, 억지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근본적으로 처음부터 반항적이고,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제물이 잘 바치면 그것으로 다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제사가 아닙니까?   제물, 그래요.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나가면 될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고기 아닙니까?   절기를 지키고, 수많은 제사를 정하시고 제물이나 가져오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미가가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송아지나 잡아 바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짐승을 죽여 제사하는 것은 곧 자신을 죽이는 것과 같기에, 그의 마음을 찢어 회개하면서 새롭게 살라는 의미를 가르치려고 제사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는 미가 동시대의 선지자로 이사야 1:11절에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고 하셨습니다.  무수한 제물이 하나님에게 무슨 유익이며 기쁨이 되실 것입니까?   전혀 기쁨이 되지 않았습니다.  

12절에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월급 날은 아직도 멀었는데, 왜 주일을 빨리 돌아오는 거야.  가서 하나님 앞에 눈도장이라고 찍고 와야지,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은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시51:16-17에서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무수한 제물을 드리면 환심을 살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죽을죄를 지었어도 제물만 드리면 용서하실 수밖에 없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의식적인 행위나 제사와 같은 것이 아니라, 진정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8절을 다시 봅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1) 정의를 행하라

우리는 매사에 공의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공의로우시기에 우리도 공의를 실천해야겠습니다.  의롭게 살아가는 것을 목표로 해야 됩니다.  아무리 힘써 잘 살아도 하나님의 공의를 이룰 수 없으니 포기하자고 말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여 바르게,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산상수훈의 8복에서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5:6)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의를 갈망해야 합니다.  공의, 정의가 우리 몸에 배어야 하고,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공의를 외면하고, 편법을 모색하고 빠져나갈 궁리만 한다면 그것은 우리 성도들의 마땅한 자세가 아닙니다. 

2) 인자를 사랑하라

이 말은 ‘인자’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헤세드’ 라고 하여 친절 인자, 자비, 자애라는 말입니다.  ‘헤세드’는 애정과 긍휼을 가지고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을 보살피겠다고 약속하시고 끝까지 사랑하는 언약적인 사랑을 헤세드라고 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실제적인 도움으로, 모든 사람을 대할 때에 친절하게, 용기를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런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호세아6:6에서도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미가는 호세아 선지자의 외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인애란 하나님의 헤세드입니다. 

관계 전도를 가르치는 오이코스 전도 세미나에서 좋은 인간관계를 쌓기 위하여 “미인대칭”이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미: 미소짓기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얼굴부터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의 얼굴에는 늘 웃음이 가득해야 합니다.   우리 한국인은 억지라고 웃어야 봐줄 수 있지 가만있으면 모두 다 심각한 얼굴입니다.  외국인들이 보면 싸우자는 얼굴이랍니다.  웃어야 합니다.  

인: 인사하기입니다.  사람들과 마주칠 때마다 먼저 자연스럽게 인사가 나와야 합니다.  “멋집니다.”  “좋아 보입니다.” 인사 잘해야 합니다.  

대: 대화하기입니다.  말을 주고받아야 서로에 대하여 마음이 열립니다. 대화가 열리면 마음이 열리고 귀가 열려 복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칭: 칭찬하기입니다. 사람들은 늘 칭찬하고, 격려하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칭찬하는데 돈이 드는 것도 아닙니다.  칭찬하면 고래도 춤춘다고 하지 않습니까?

애지중지 사랑하는 딸이 학교에 입학하여 처음 성적표를 가지고 왔는데, 모든 과목이 가가가가가가가가 양이 하나 있습니다.  수,우,미는 하나도 없습니다.  두 부모가 밤새도록 고민합니다.  엄마가 입을 열었습니다.  “얘야, 양이 하나 있구나 너는 한 과목만 공부하지 말고, 골고루 공부해야 한다.”   아버지가 말합니다.  “‘가’라는 말은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고, ‘양’이라는 말은 양호함, 잘 했다는 말이란다”라고 했답니다.  칭찬이 지나쳤는지는 몰라도 아이를 기죽일 것은 없습니다.   

부자유친이라는 말도 사용합니다. 

부: 부드러움입니다.  부드러워야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 교역자들은 부드러워야 합니다.  “이것은 이것입니다.” 그렇게 딱 부러지게 말하면 다시는 말을 붙일 수 없습니다.  사람이 부드러워야 합니다.   

자: 자상함입니다.  자상하다는 말은 다른 사람에게 세심하게 배려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자상한지, 요즈음에는 무엇을 물어보면 끝까지 책임지고 해결해줍니다. 

유: 유머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 유머가 있어야 합니다.  유연해야 하고, 여유가 있어야 하고, 웃음이 있어야 합니다.  

친: 친절입니다. 고객만족이 아니라, 고객감동의 시대입니다.  

잠19:17에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에게 꾸어 드려 보세요.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분, 금도 내 것이요 은도 내 것이라고 하시는 하나님에게 꾸어드리면, 하나님은 원금에 이자, 그리고 잘 하였다고 누르고 넘치게 하여 안겨주십니다. 

3)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고, 하나님과 함께 생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겸손하지 않으면 그것이 잘 되지 않습니다.  벧전5:5에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미가 선지자는 율법에 기록된 제사를 무시하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미가가 강조하는 것은 정의와 인자를 사랑하는 것과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없이 다만 제사를 드린 것으로 만족하거나 자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이상적인 삶은 제사로 그치지 말고,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아시고, 더 나은 제사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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