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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를 생각하는 인간, 관계를 생각하시는 하나님 (눅 15: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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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생각하는 인간, 관계를 생각하시는 하나님 (눅 15:11-24) 


탕자의 비유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비유인 것 뿐만이 아니고 설교자들이 제일 즐겨하는 설교 본문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웬만큼 색다른 내용을 담지 않으면 설교하기 어려운 구절입니다. 여러분 중에서도 이미 단물 다 빠졌을 텐데 무슨 새로운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탕자의 비유는 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몇 주에 걸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은혜라는 말은 거저라는 말입니다. free-공짜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인간이 지불할 대가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예수님이 대신 대가를 다 지불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셨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추가할 부분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기만 하면 됩니다. 전적으로 예수님의 은혜에 좌우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진실입니다. 

이건 우리가 다 들어보았고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어느 정도는 다 믿습니다. 그런데 이 진리가 우리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그것은 이론적으로 은혜라는 것이 우리의 생각과 이질적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우리의 본성과 어긋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본성상으로 상당히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우리는 다 타고난 바리새인들입니다. 

만일 기독교가 율법주의적인 종교였다면 우리의 본성과 더 쉽게 맞아떨어졌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율법적인 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능적인 생각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 give and take,  심는 대로 거두기,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또 사필귀정, 인과응보 이런 것을 정의, 공평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위와는 별개로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로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진리는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걸립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변화의 속도와 비례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변화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고 구원의 결과입니다. 구원을 받은 결과로써 우리가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씨를 심은 결과로써 그것이 자라나는 것과 같습니다. 생명이 있기 때문에 자라나는 것이지 자라나기 때문에 생명이 있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변화에는 급진적인 변화와 점진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먼저 급진적인 변화는 무엇이냐. 초에 불을 붙이면 즉시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오래 기다려야 빛이 나오는 게 아니에요. 초에 불을 붙이면 즉시 촛불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사람 속에 예수님이 들어오시면 즉시 일어나는 변화가 있습니다. 이건 양적인 변화가 아니고 질적인 변화이고 도덕적인 변화가 아니고 영적인 변화입니다. 

예수 믿고 한참 있다가 구원을 받는 게 아니고 즉시 구원을 받고 즉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나 그의 행위의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이것이 점진적인 부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누가 교회 다닌다고 당장 행위적으로 다르기를 요구하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을 달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기다려야 됩니다. wait a minute, 조또 마떼 구다사이. 하나님도 기다리시는 것을 사람이 조급하게 요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인내하시는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인내하지 않는다면 그건 하나님보다 앞서 나가려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 점진적인 변화를 주도하느냐.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만큼 깨닫고 뿌리를 내리느냐에 좌우되는데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무엇으로 실감하느냐.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실감합니다. 빅터 휴고의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장발장의 변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장발장은 전과자로 오랜 세월을 교도소에서 전전했습니다. 그것이 그 사람을 아주 강퍅한 악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 장발장의 변화를 일으킨 것은 늙은 신부님을 통해서 경험하게 된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이건 픽션이지만 정곡을 찌른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이 인간의 변화를 가지고 온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정말로 변하느냐 변하지 않느냐 이 여부를 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마는 성경은 의외로 인간의 변화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변화가 구원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변하면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안 변하면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변화는 어디까지나 결과이지 그것을 조건으로 내세우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는바와 같이 탕자에게 그의 방향과 인생의 목적과 추구하는 것의 변화를 가져온 것은 그의 배고픔이었습니다. 그의 배고픔, 절박한 환경이 그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을 바꾸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카드를 쥐고 계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환란을 통과하면서, 아픔을 경험하면서 자기의 생각을 바꿉니다. 

오늘 본문 16,17절을 보면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그의 생각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자체가 이 사람을 구원하는 건 아니에요. 아무리 탕자가 스스로 돌이킬지라도 아버지가 받아주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아버지가 받아주는 것이 구원이에요. 사람이 스스로 돌이킨다고 그것이 구원을 성립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뉘우침이 필요한 것입니다. 회개가 필요한 거예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가까이 왔는데 회개해야 천국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이 녀석이 아무리 정신을 차린다고 해도 내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말하는 게 아니고 내 아버지 집에 먹을 것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말하면 어디 덧납니까. 그러나 아버지가 보고 싶기 때문에 오는 게 아니고 배가 고프기 때문에 돌아오는 것입니다. 인간이 회개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고 결국은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자기 문제 때문에, 자기의 배고픔 때문에 돌이키는 것입니다. 간사하지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탕자가 집에 돌아올 때 그의 생각이 자기의 행위에 맞춰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자기의 죄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래서 예행연습을 합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예행연습을 했어요. 자기가 잘못했다,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리라는 겁니다. 

맞는 얘기에요. 그래서 아버지에게 돌아와서 예행연습한대로 그대로 합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나를 받아주소서’ 외운 대로, 연습한대로 자기가 잘못했다는 죄를 지었다고 말합니다. 아들의 관심사는 거기에 있어요. 내가 잘못했다고. 그런데 아버지는 그 말을 다 듣지 않습니다. 도중에 끊어버립니다. 그래서 아들이 집에 와서 외운 대로 말할 때 21절에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끊어버렸어요. 그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거예요. 그게 중요하지 않은 거예요. 

아들은 자기의 행위와 죄를 생각하는데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생각하기보다는 관계를 생각합니다. 내 아들이다, 나는 그의 아버지다, 잃어버린 아들을 찾았다, 죽은 아들이 살아났다, 미운 아들이든 예쁜 아들이든 내 아들이다, 관계를 생각하는 것이지 아버지의 관점에서는 얘가 뭘 잘했고 뭘 잘못했고 그걸 따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식의 입장에서는 그게 중요할지 모르지만 아버지 입장에서는 옳고 그름을 따져봤자 아버지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옳고 그름을 따져봤자 아버지에게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탕자가 잘했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잘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가 돌아오면서 관계만을 생각하고 자기의 죄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건 뻔뻔한 것이고 그건 뉘우침이 없는 것입니다. 잘못한 게 있습니다. 그걸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실감하지 못하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실감하지 못하고 우리는 늘 우리의 행위에 대해서 염려합니다. 우리의 행위에 대해서 늘 염려하고 우리의 행위 때문에 늘 부족하게 생각하고 늘 자책하고 우리의 행위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민망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에요. 이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가 뜻하는 것은 이방인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고 죄인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결국은 아들이었다는 사실에서 이것은 이미 믿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아들이라고 부를 수가 없어요. 이미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가 이루어진 후에 생긴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고 대다수의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 자신의 죄를 떠올립니다. 아, 내가 그동안 교회를 많이 빠졌고, 뭐가 어땠고, 내가 뭐가 부족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기보다는 하나님이 두려워요. 하나님이 벌주실 것 같아요. 잘못한 것을 생각해요. 이건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고, 뭘 잘못했고, 뭘 빠뜨렸고, 뭐가 부족했고…. 성도들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목사 앞에 안 앉으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왜 목사 앞에 앉으려고 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불편하대요. 부담스럽대요. 아니, 눈에 보이는 목사도 부담스러우면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은 얼마나 부담스럽겠습니까. 

얼마나 하나님 앞에 민망하면 그러겠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또 이거에 대해서 뭐라고 하시겠지, 꾸짖으실 거야,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 도둑이 제 발 저린 거예요. 하지만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탕자가 돌아올 때 비록 탕자가 잘못한 것을 알지만 무얼 잘못했는지 따지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생각하기 보다는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관계를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22절에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여기에 천국의 모형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relationship. 자식이 아버지에게 잘못했다고 해서 자식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자식입니다. 다만 아버지와의 관계가 불편해지는 것입니다. 멀어지는 것입니다. 서먹서먹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더 이상 아버지가 아니고 우리가 더 이상 자식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다만 관계가 멀어집니다. 관계가 손상을 입습니다. 관계가 서먹서먹해집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생각할 때 내가 옳으냐 그르냐, 내가 맞았느냐 틀렸느냐를 생각하려고 하는데 그것보다는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섭섭해 하실까 기뻐하실까, 하나님과 관계가 어떻게 될까를 생각했었어야 됩니다. 

지금 이 아들이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느냐 이것을 생각하고 있지만 아버지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는 것은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동안 떨어져있던 기간이 아버지에게 얼마나 슬픔이 되었을까를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잘잘못만을 말하면 그것으로 되는 줄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아요. 내가 설사 옳은 일만 하고 살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없는 옳은 삶은 의로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없는 의로움, 나는 하나님 안 믿지만 나는 바르게 산다, 나는 법을 지키고 나는 늘 옳다, 하나님이 안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관계에요. ‘너희는 나에게 오라 나를 의지하라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자의 자녀가 되리라 나는 너의 선한 목자다’ 관계를 원하시는 것이지 관계가 없는데 그냥 나는 옳게 살고 바르게 살고 나는 늘 도덕적이고 그것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게 아닙니다. 

죄가 왜 나쁘냐. 죄 자체가 나쁜 것도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과 우리 관계를 손상키시고 상처를 입히고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마음이 강퍅해지게 하고 얼굴을 돌리게 하고 하나님을 외면하게 하고 하나님을 피하게 하고 내 힘으로 내 고집대로 살게 하는 것이 더 큽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가기 전에 만약 그렇게 하면 그것이 얼마나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할지 생각했었어야 됩니다. 그걸 생각하지 않은 것이지요. 잠언 16장 2절에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저의 아이가 아기였을 때, 아마 처음으로 저의 아이를 꾸짖었을 때라고 생각됩니다.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렵지 않지요. 늘 잘못하는 일이 있으니까. 최초로 제가 엄하게 꾸짖으려고 하는데 그러니까 얼굴도 굳어야지요. 연기를 해야 됩니다. 일부러 목소리도 무섭게. 그러나 저의 의도는 단 하나입니다. 잘못했다고 빌면 용서해 주겠다. 그런데 그게 사실은 도박입니다. 그게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기싸움 입니다. 저의 아이가 잘못했다고 하면 기가 꺾이는 거예요. 그럼 부모가 이기는 거지요. 그렇게 되기를 모든 부모는 바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씩씩대면서 제가 잘못했어, 안했어? 잘못했다고 해! 그래도 잘못했다는 말을 안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제가 점점 밀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아무리 봐도 잘못했다고 말할 것 같지가 않아요.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이리와 그랬더니 오더라구요. 그래서 어떻게 했게요? 안아주었지요. 하하하.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안아 주었지요. 제가 진거지요. 그렇지만 적어도 이 아이가 아직은 철이 없어서 그런데 철이 들면 아버지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고 기억하게 될 것이고 그리고 철이 들면 아버지가 나를 이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살아야 되겠구나, 아버지의 믿음대로 따라야 되겠구나를 깨닫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 24절에 아버지가 ‘이 내 아들은’ 미워도 내 아들이고 예뻐도 내 아들이에요. 밉다고 내 아들이 아닌 게 아니에요.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예수께서 이 비유를 통해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건 사람이 만든 스토리가 아니에요. 예수님만이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아버지의 모습이에요. 탕자가 돌아왔다는 것은 누구든지 말할 수 있어요. 그러나 아버지가 받아줄지 안 받아 줄지는 우리 스스로 알 수가 없어요. 그건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계시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비유에 예수님이 어디 등장하느냐고 묻는데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는 데에 예수님의 위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역할이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기 때문에 이 비유를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것이고 예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잃었을 때도 내 아들이었어요. ‘이 내 아들’ 아버지에게는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것을 따졌어요. 이것이 하나님에게 중요한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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